상처 받은 그 자리에서 새 길을 찾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표현을 몸소 체감한 적이 있었다. 과학자원과 근무 시절, 인사과의 한 선배에게서 들은 충격적인 말 때문이다.
다음 단계를 고민하던 시기
과학자원과에서의 근무는 보람찼지만, 한편으로는 늘 '다음 단계'를 고민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당시 외교부 내에서 과학자원과는 소위 '비선호 부서'였고, 대부분 직원들은 희망해서라기보다 인사과에서 임의로 배치하여 근무하게 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전문성을 쌓기보다는 다음 단계로 나가기 위한 ‘경유지’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첫 해외공관 발령을 앞둔 입장에서, 과학자원과에서 일정 기간 근무한 뒤 내가 희망하는 공관에 발령받기 유리한 부서로 옮기고 싶었고, 특히 다자외교의 업무 기회가 있는 곳에서 역량을 펼치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3년이나 머물게 된 것은, 희망 부서로 이동이 번번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의 좌절
근무 중 두 번이나 다른 과로 옮길 기회가 찾아왔다. 첫 번째는 1996년 중반, WTO를 담당하는 ‘통상기구과’였다. 당시 민동석 과장이 연수 이전에 내가 모셨던 오갑렬 과장에게서 좋은 평가를 들었다며 함께 일해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기뻐하는 마음으로 과장님께 이동 희망의사를 밝혔다. 과장은 국장과 협의해 보겠다고 하였고, 그 결과는 국장의 반대로 어렵게 되었다는 답으로 돌아왔다. 당시 주철기 국장님은 통상국과 와의 경쟁의식 때문에 국제경제국 직원이 통상국으로 옮기는 것을 자존심의 문제로 생각하고 허락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6개월 후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국제기구국 군축원자력과에서 근무하던 조태익 서기관이 주러시아대사관으로 떠나며 후임으로 나를 추천한 것이다. 서정하 군축원자력과장과 서대원 국제기구국장도 이를 수용했다. 내가 그토록 희망하던 국제기구국 근무기회가 생기는 것에 크게 고무되었고, 이번만큼은 '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는 또다시 '불가'였다. 이번에도 국장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일 년 반 동안 부서 일에 충분히 기여했다고 자부했기에 실망감은 더 컸다. 답답한 마음에 과장님께 간곡히 선처를 요청했지만, 과장님도 “어쩔 수 없다”며 만류했다.
낯선 선배의 독설, 별이 보였던 대낮
답답한 마음에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외교부 본청 인사과를 찾았다. 안면도 없던 인사과 주무 선배에게 조심스럽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선배님, 부서를 옮기고 싶은데 이런 상황에서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게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너 같이 인사에 민감한 놈은 처음 봤다.”
순간 대낮인데도 눈앞에 별이 번쩍이는 듯했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이가 뱉은 그 인사에 민감한 놈이라는 '낙인'은 마치 내 존재를 부정하는 듯했고, 그동안 쌓아온 노력과 열정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할 말을 잃은 채 "선배님이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이해되지 않지만, 그렇다면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왔다. 극심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부서를 옮기고 싶다는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일까.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선배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런 말을 내게 던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아가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회의감이 나를 짓눌렀다. 그날 이후, 나는 인사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한 신경 쓰지 않고 적응해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운명의 아이러니: 상처를 준 자리로 돌아가다
그런데 운명은 참으로 기묘한 방식으로 흘렀다. 그로부터 7년 뒤인 2003년 12월, 나는 내게 그토록 큰 상처를 주었던 바로 그 자리, '인사과 주무'로 발령을 받았다. 내게 독설을 내뱉었던 선배의 그 책상에 앉아 동료들의 인사 고민을 듣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만감이 교차했다. 인사가 단순한 자리 배치가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과 열정이 걸린 절실한 문제라는 것을 누구보다 뼤저리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6개월 뒤 인사운영팀장으로 승진하였고, 주니어 외교관으로 내가 겪었던 서러움을 후배들이 겪지 않도록 공정하고 따뜻한 인사를 위해 고민하고 노력했다. 또한 인사 문제가 개인의 희망과 조직의 필요가 늘 충돌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절실히 깨달았다. 그 선배의 모진 말은 나를 무너뜨리기보다는, 오히려 인사라는 업무의 무게감을 배우게 한 '거친 예방주사'였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상처가 없었다면, 나는 인사 업무를 맡았을 때 그토록 간절한 후배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을 것이다.
상처의 자리에서 다시 열게 된 새로운 길
인사과에서의 소임을 마친 2005년 8월, 나는 마침내 꿈에 그리던 주유엔대표부 1등 서기관으로 발령받았다. 그리고 2008년, 다시 본부로 귀임하며 앉게 된 자리는 10여 년 전 국장님의 반대로 가지 못해 눈물지었던 바로 그곳(당시 군축원자력과), '군축비확산과'의 과장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느껴졌던 그 말은, 내 외교 인생에서 강렬한 한 장면으로 남았다. 돌이켜 보면, 그날의 날벼락은 상처였지만, 결국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 번개와 같았다. 때로는 '날벼락' 같은 순간이 전혀 예상치 못한 길로 안내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처의 자리에서 나는 다시 새로운 길을 열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