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주철기 대사님을 그리며
주니어 외교관 시절의 아쉬움
성숙한 외교관으로 준비되어 가는 내 외교관 인생의 초기 10년간 나는 소위 선호부서에 근무해 보지 못했다. 과학자원과 이후 발령받은 주헝가리대사관과 이어서 근무한 주모로코대사관의 경우 모두 외교부 직원이 대사 포함 4명에 불과한 작은 공관이었다. 선배들의 어깨너머로 외교의 문법을 익힐 기회가 간절했던 시절이었다. 외교부에 다시 복귀했을 때는 어느새 더 이상 새내기가 아닌 여러 후배들이 바라보고 있는 부서의 차석 서기관 위치에 있었다. 세 번째 재외공관으로 발령받은 주유엔대표부에서 20여명이나 되는 기라성 같은 선배, 동료 외교관들과 함께 근무하면서, 이런 기회가 조금 더 일찍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평생의 롤모델이자 멘토, 故 주철기 대사님
그렇지만 새내기 외교관 시절, 내게 평범하지만 외교관으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자질을 몸소 일깨워주시고, 내가 평생의 롤모델이자 멘토로 생각하는 분이 있다. 과학자원과에서 국제경제국장으로 모셨던 故 주철기 대사님이다. 국제경제국장을 거쳐 제네바 차석대사, 모로코 대사, 프랑스 대사를 역임하고, 훗날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서 국가에 헌신하셨던 그분과 나는 세 번의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첫 번째는 과학자원과에서 국제경제국장님으로(1996-1997년), 두 번째는 주모로코대사관(2001-2002년)에서, 마지막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2014~2015년)다.
작은 일이지만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인정한 상사
연수 후 배치된 과학자원과는 외교부 내에서 그리 주목받는 부서가 아니었고, 사무실도 본청 아닌 별관에 떨어져 있어 물리적·심리적 소외감이 있었다. 국장님들도 대부분은 과학자원과 업무를 우선순위로 두지 않았고, 결재 문서를 가져가도 읽어보지도 않은 채 대충 서명만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번은 방글라데시 원전 건설 동향을 파악하라는 지시 전문을 결재받으러 갔을 때, 국장님으로부터 “이런 일까지 우리가 해야 하느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내가 쏟은 열정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내가 하는 일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회의감도 들었다.
그러나 두 번째 국장님으로 모시게 된 주철기 국장님은 전혀 다른 분이었다. '주철기 장군'이라는 별명답게 열정이 넘치셨고, 신앙심 또한 깊으셨다. 그러나 주변의 평가는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모든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지나친 열정을 가진 그분의 스타일을 두고 '경중이 없다'라는 인식도 있었다. 그렇지만 새내기였던 내게 모든 사안에 진심을 다하셨던 그분의 철저함과 열정은 오히려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분은 내가 가져간 결재 서류를 단 한 장도 허투루 넘기지 않으셨다. 피곤에 겨워 졸린 눈을 껌뻑이면서도 문안을 수정하고 질문을 던지곤 하셨다. 상사가 내 업무에 애정을 갖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존재 가치를 느꼈다. 내가 맡은 일의 의미를 일깨워 주고, 외교관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해 주셨다. 지금 다시 과학기술외교가 주목받고 있지만, 이미 주철기 국장은 당시에 과학기술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외교부가 과학기술외교의 선도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도록 초석을 놓으셨다. 일본, 캐나다, 호주 등과의 과학기술공동위원회와 원자력공동위원회의 수석대표를 외교부가 맡도록 주도하고, 아시아원자력안전협의체(ANSCO) 구상을 구체화 한 것도 모두 그분의 혜안과 집념 덕분이었다.
"보조자에 머물지 말고 주도자가 되어라"
주 국장님은 직원이 해외 출장을 갈 때면 항상 본 회의 외에 '플러스 알파'의 임무를 부여하셨다. 당시 과학자원과 업무는 관계 부처를 지원하는 성격이 강해 자칫 수동적인 태도에 빠지기 쉬웠다. 하지만 국장님은 달랐다. 한 번은 한미 원자력공동위원회 참석차 워싱턴에 갔을 때, 국무부의 과학기술외교 담당자를 따로 만나 양국 간 현안을 짚고 오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당시 주미대사관 김건 1등 서기관(국민의힘 국회의원)의 도움으로 일정이 주선되어 생애 첫 국무부 청사에 들어가 면담을 나누고, 그 내용을 보고서로 작성해 본부에 보냈던 그 순간의 짜릿함이 아직 생생하다. 주니어 외교관이었던 내가 '주도하는 외교'의 보람을 처음 맛본 순간이었다.
OECD 가입 초기, OECD 과학기술정책위원회(CSTP) 참석차 파리 출장길에 올랐을 때도 국장님은 OECD 사무국의 과학기술담당 과장과의 단독 면담을 하고 오도록 지시하셨다. 회의장 구석에서 수석대표를 보좌하던 내가, 파리 시내의 식당 테이블에 마주 앉아 한국의 정책을 설명하는 ‘주인공’이 되었고, 조력 역할의 실무자로 갔지만, 국익을 대표하고 주도하는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체감하고 돌아왔다. 그분은 그렇게 새내기 외교관이었던 내가 보조적 역할에 머물지 않고, '서류를 만드는 공무원'을 넘어서서 '현장을 누비며 주도하는 외교관'으로 자라 가도록 훈련시켜 주셨다.
운명이 이어준 세 번의 동행
이후 외교부 생활에서 나는 주 대사님과 여러 번 궤를 같이했다. 과학자원과 시절의 인연은 모로코 대사관에서의 재회로 이어졌고, 나는 대사관 차석으로 주 대사님을 보좌하면서 현장에서 대사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가까이 지켜보며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10년 뒤, 외교안보수석으로 놀랍게 복귀한 주 대사님은 내게 청와대 외교비서관실 행정관으로 일할 기회를 주셨고, 나는 대통령의 외교 어젠다가 최상위 단계에서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경험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외교 인생 초기, 소위 '주류 부서'를 거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주 대사님이라는 큰 산을 만난 덕분에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 선배들로부터 배울 기회가 적었던 주니어 시절의 내게, 대사님은 존재 자체로 거대한 학교였다.
그리운 멘토를 추억하며
안타깝게도 대사님은 2019년 2월, 뇌종양 투병 끝에 소천하셨다. 격동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말년에 고초를 겪으셨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그분이 내 외교 인생에 남긴 궤적은 풍파에 씻기지 않을 만큼 깊고 선명했다. 방글라데시와 아세안에서 대사로 일할 때 나는 "주 대사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떠올리면서 스스로를 다잡고는 했다. 이제 외교의 무대를 떠난 나는 후배들에게 그런 영향을 줄 수 있었던 사람인지 스스로 묻게 된다. 회의장에서, 모로코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 그리고 청와대의 긴박한 현장에서 그분과 함께했던 시간들은 내 평생의 자산이었다. 주철기 대사님이라는 스승을 만난 것은 내 외교 인생의 큰 행운이었고, 그 분과의 여정은 진심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