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외교의 물꼬를 튼 헝가리와의 인연
내가 과학자원과에 근무하던 시기, 국제경제국은 주철기 국장 주도로 우리나라의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을 마무리 짓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침내 1996년 12월 12일, 우리나라는 29번째 OECD 회원국으로 이름을 올렸다. 당시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세계화’ 정책의 정점이었던 이 과정에서, 외무부(현 외교부)는 범정부 차원의 '세계화' 전략을 국제무대에서 관철하고 뒷받침한 최전방 컨트롤 타워였다. 1995년 가입 신청서 제출부터 1996년 최종 승인까지, 외무부는 20여 개 위원회별 심사를 조율하며 한국의 입장을 대변했고, 그 중심에는 국제경제국이 있었다. 1991년 유엔 가입으로 국제사회의 완전한 일원이 된 한국은, 이제 OECD 가입을 통해 ‘선진국 진입’이라는 또 하나의 외교사적 이정표를 세웠다.
그러나 OECD 가입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 1997년 말 한국은 초유의 금융위기에 직면했고, 구조조정을 조건으로 한 210억 달러의 IMF 긴급 구제금융에 명운을 맡겨야 했다. IMF 사태는 국가 시스템 전반을 뒤흔들었으며, 외무부 역시 직격탄을 피할 수 없었다. 국가 부도의 위기 속에서 외무부는 허리띠 졸라매기를 넘어선 처절한 조직 개편과 운영의 변화를 겪어야 했다. 145개의 재외공관 중 1998년과 1999년 2년 동안 22개가 폐쇄되었고, 인력도 20% 가까이 감축되었다. 1998년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외교통상부'로 개편되면서 통상 기능을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외무부의 전체 정원은 오히려 줄어드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환율이 800원대에서 1,600~2,000원까지 치솟으면서, 원화로 책정된 외무부 예산은 사실상 반토막이 났다. OECD 가입은 한국 외교사에서 '국제 사회의 주류 진입'이라는 이정표를 세웠지만, 경제적으로는 '준비되지 않은 개방'이라는 독배가 되었다는 뼈아픈 평가를 피할 수 없었다.
이 격변은 과학자원과에서 첫 재외공관 근무를 준비하고 있던 내 삶의 경로도 바꿔놓았다. 나의 타 부서 이동을 붙잡았던 주철기 국장은 당시 외무부도 OECD 전문가를 길러야 한다면서 나의 OECD 사무국 파견을 추진 중이었다. 인사과는 1998년 상반기 4급(과장급) 1명과 5급(사무관) 1명 파견을 계획하고 관계부처와 협의하고 있었다. 나 역시 원자력기구(NEA)와 과학기술정책위원회(CSPT)와 같은 OECD 업무에 관여하고 있던 터라 경제기구이기는 하나 국제기구/다자 경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른 아침 종로외국어학원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출근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나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외환위기의 파고는 나의 '파리행 티켓'을 휩쓸어갔다. 정부는 외화 절감을 위해 공무원들의 해외 파견을 대폭 축소했고, 이에 따라 외무부도 OECD에 과장급 1명 파견만 추진하고, 5급 파견 계획은 취소하였다. 결국 나의 OECD행은 무산된 것이다. 당시 과장급 1호 파견자로 결정된 이는 통상기구과장이던 조현 현 외교부 장관이었다. 국가적 위기 앞에 개인의 아쉬움은 삼켜야 했고, 3년을 꽉 채운 과학자원과 근무를 뒤로한 채 이제는 현장으로 나가는 일을 더 이상 늦출 수는 없었다.
1998년 추계 인사에서 나는 다자공관인 주제네바대표부와 함께 주베트남대사관을 희망공관으로 신청하였지만, 나의 운명이 연결된 첫 공관은 주헝가리대사관이었다. 헝가리는 1980년대 후반 우리 정부가 추진했던 북방외교의 첫 성과로, 1989년 2월 구소련 사회주의 국가들 가운데 우리와 최초로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이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 불가리아, 루마니아로 이어진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수교를 견인한 북방외교의 상징적인 국가였다. 돌이켜 보니 헝가리와의 인연은 외교부 입부 초기 첫 부서였던 '경제협력2과' 시절 이미 있었다. 1992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제4차 한.헝가리경제공동위원회' 담당 실무자로 회의를 준비하면서 헝가리와 첫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염원했던 국제기구에 대한 희망은 접어야 했지만, 북방외교의 물꼬를 튼 헝가리에서 본격적인 외교관 행보를 시작하게 된 것은 충분히 설레는 일이었다.
부임 준비 중 만난 주한헝가리대사관의 페로사(Perosa) 참사관은 나의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모스크바대 출신의 한국학 박사로 한국어에도 능통했던 그는, 헝가리를 거쳐 간 한국 외교관들이 모두 잘 풀렸다는 덕담과 함께 내 부임을 '좋은 징조(good sign)'라며 치켜세워주었다. 한국의 경제 위기는 금방 회복될 것이라는 그의 낙관적인 전망과 정성스레 건네준 현지 인맥 리스트는 낯선 땅으로 떠나는 내게 큰 자산이 되었다. 그와 대화하며 비로소 내가 현장을 누비는 '진짜 외교관'이 되었음을 실감했고, 부다페스트에서의 삶에 대한 기대도 커졌다.
당시의 경제 상황은 부임 준비 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때 2,000원대까지 치솟았던 환율은 부임 직전 1,300원대로 내려왔지만, 위기 전 800원대에 비하면 여전히 가혹한 수준이었다. 현지에서 차를 살 엄두가 나지 않아 국내에서 중고차를 구입해 등록 말소 후 이삿짐 컨테이너에 실어 보내는 고육지책을 써야 했다. 그렇게 아낀 달러 한 장 한 장이 참으로 소중했던 시절이었다.
1998년 8월 21일,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이제 갓 돌을 지난 첫 아이를 품에 안고 아내와 함께 부다페스트 땅을 밟았다. 개인의 성취보다 국가의 생존이 시급했던 엄중한 시기였지만, '유럽 속 언어의 섬'이라 불리는 그 낯선 나라에서 외교관으로서 나의 진짜 여정은 그렇게 막을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