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뉴브강에 새겨진 내 마음의 원픽, 부다페스트
누구에게나 가슴 한구석에 등불처럼 켜져 있는 도시가 있다. 외교관 생활을 하며 세계 곳곳의 수많은 도시를 거닐었지만, 누군가 내게 '가장 아름다운 곳'을 묻는다면 나는 단 1초의 망설임 없이 부다페스트를 꼽는다. 나의 첫 부임지였던 헝가리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나를 매료시킨, 그야말로 '첫사랑' 같은 나라였다.
부다페스트의 아름다움은 조화와 균형에 있다.
도도히 흐르는 다뉴브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의 부다(Buda)와 동쪽의 페스트(Pest)가 마주 본다. 그 사이를 웅장하고 우아한 란치드 다리(Lánchíd, 세체니 사슬다리)가 잇고 있다. 주택가인 부다 언덕 위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고혹적인 부다 왕궁과 마챠시 성당이 강물을 굽어보고 있고, 강 건너 페스트 평원에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연상시키는 고딕 양식의 국회의사당과 활기 넘치는 바치 거리가 부다를 향해 정중히 인사하듯 펼쳐져 있다.
혹자는 비엔나나 파리의 건축물에 비해 이곳이 소박하다 말할지 모르나, 강과 언덕 그리고 도심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한 폭의 완성된 풍경화'와 같은 부다페스트를 이길 도시는 세상에 없다. 매일 아침, 차를 몰고 부다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와 햇살이 부서지는 다뉴브 강변을 달려, 란치드 다리를 건너 안드라시 거리 끝의 대사관으로 향하던 출근길. 그리고 다뉴브 강이 자아내는 도시의 황홀한 야경. 그 눈부신 풍경을 눈과 머릿속에 담으며 느꼈던 작은 기쁨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내 삶의 소중한 갈피로 남아 있다.
유럽 속 '언어의 섬', 8000km를 잇는 언어혈통의 공감대
헝가리가 매력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유럽 한복판에서 마주하는 '낯익은 독특함'이다. 유럽 한복판에 위치한 내륙국이면서도 헝가리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바로 언어다. '유럽 속 언어의 섬'이라 불리는 이유이다. 대부분 유럽국가의 언어가 인도-유럽어족인 것과 달리, 헝가리어(마자르어)는 한국어, 몽골어, 일본어와 함께 아시아에 뿌리를 둔 우랄-알타이 어족에 속한다. '마자르(Magyar)'가 바로 헝가리를 일컫는 헝가리어라는 사실을 부임 후에야 알게 되었고,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만 보던 이 이론을 현장에서 확인하고 경험하면서 묘한 전율을 느꼈다.
비록 문자는 라틴 알파벳을 쓰지만, 헝가리어는 우리처럼 성(姓)을 앞에 쓰고 이름이 뒤에 온다. 날짜도 '년-월-일' 순이며, 주소 역시 큰 단위에서 작은 단위로 내려간다. 목적어가 동사 앞에 오고, 전치사 대신 접미사를 사용하며, 접미사를 통해 존칭을 만드는 구조까지 우리와 빼닮았다. 8,000km라는 물리적 거리가 무색할 만큼 언어라는 가느다란 끈이 두 나라를 잇고 있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헝가리 사람들도 한국과의 이런 문화적 공통점을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한 헝가리 지인이 농담조로 했던 이야기가 아직 기억에 남아있다. "옛날, 우랄알타이 지역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팻말을 만났다. 이 팻말을 보고 일부 무리는 서북쪽으로 향했고, 다른 일부는 서남쪽으로 향했다. 서북쪽으로 향한 사람들이 핀란드인이고, 서남쪽으로 향한 사람들이 헝가리인이었다. 팻말을 이해했던 사람들이 핀란드인이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헝가리인이었다." 당시 개도국에 머물고 있던 헝가리 인들이 선진국 핀란드를 부러워하며 던진 자조 섞인 유머였지만, 그 기저에는 같은 뿌리에 대한 강한 인식이 깔려 있었다.
같은 언어적 혈통(langage family)에 속했다는 것이 양국을 정서적, 문화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었고, 이런 언어적, 문화적인 공통점은 외교적으로도 양국관계 발전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또한 내게는 첫 공관인 헝가리에서 흥미롭고 기대에 찬 여정을 시작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노벨상의 나라, 헝가리의 저력
헝가리는 작지만 거인 같은 나라다. 남한 정도의 면적에 인구는 1,000만 명에 불과하지만, 무려 16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아이들의 지능 장난감인 '루빅스 큐브'를 발명한 루빅 에르놔(Rubik Ernő)도 헝가리인이다. 우리 대사관 앞을 지나던 부다페스트 지하철은 1896년 개통된 '유럽 대륙 최초의 지하철'로, 헝가리의 수준 높은 근대화 역사를 웅변한다. 600여 년간 유럽의 역사를 주도한 합스부르크 왕조와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을 형성하여 동등한 지위에서 발전을 이룬 것도, 비록 1차 대전으로 제국 영토의 3분의 2를 잃었지만 헝가리 민족의 저력을 보여주었던 역사다.
헝가리를 방문하는 한국사람들이 헝가리를 우리보다 한 수 아래의 나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헝가리가 아직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도기적인 상황에 있고, 1인당 국민소득도 우리나라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처음부터 달랐다. 문화적으로, 기술적으로, 심지어 정치적으로도 우리가 배울 것이 많은 나라라고 생각했다. 한 번은 헝가리를 방문한 국회의원들을 수행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에는 헝가리에 한 수 가르쳐주고 가겠다며 의기양양했던 의원들이 헝가리 국회의사당을 방문하고는 크게 놀라며 헝가리에 대한 선입견을 거두는 것을 보았다. 1902년 완공된 웅장한 국회의사당 앞에서 그 규모와 역사, 디테일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던 것이다. 한 기업인도 헝가리에 오기 전 가졌던 선입견이 깨졌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값싼 헝가리 인력을 활용하여 기계설계를 하려고 부다페스트에 왔던 그는 "갓 대학을 졸업한 헝가리 학생이 한국의 10년 차 경력직 수준의 역량을 가졌다"며 경탄했다. 당초 6개월의 단기를 계획했었는데, 아예 사무소를 차려서 본격적이고 장기적인 투자로 선회했다.
다시 돌아보고, 다시 생각해 보아도, 이처럼 우리와 문화적인 공통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배울 것이 많고 아름다운 헝가리에서 나의 첫 해외근무를 시작하게 된 것은 정말 내 외교관 인생의 큰 행운이었다.
변치 않는 애정으로 헝가리의 성공을 기원하며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지금, 헝가리와 한국의 관계는 눈부시게 도약했다. 수백여 명에 불과했던 교민은 어느덧 1만 명을 넘어섰고, 삼성SDI와 SK, 한국타이어 등 우리 대표 기업들이 헝가리를 유럽 진출의 전초기지로 삼고 있다. 당시 30대의 젊은 총리였던 빅토르 오르반이 지금까지 장기 집권하면서 역동성을 잃은 듯한 안타까움은 있지만, 양국이 서로를 향해 뻗고 있는 손길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25년 전, 서툰 걸음으로 시작했던 나의 첫 부임지 헝가리. 여전히 부다페스트의 밤은 다뉴브강의 물결을 따라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나의 첫사랑 같은 헝가리가 언제나 행복하고 성공적인 길을 걷기를, 그리고 양국의 우정이 그 깊은 뿌리만큼이나 견고하게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