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의 '샹젤리제', 안드라시 거리의 주인이 되어

대사 교체기, 총무에게 내려진 특명: "관저를 사수하라"

by 어느 외교관의 꿈


안드라시 거리의 가로수 아래, 서툰 열정이 머물던 시간


부다페스트의 '샹젤리제'라 불리는 안드라시 거리(Andrássy út)에 위치한 우리 대사관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아담한 건축물로,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곳이었다. 1872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 시대의 외교장관 언드라시(Andrássy) 백작이 파리의 샹젤리제를 모델 삼아 건설한 이 거리는 그 이름에 걸맞게 우리나라와 이탈리아 등 각국 대사관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다뉴브강 인근의 번화가인 바치 거리(Váci utca) 부근 엘리자베스 광장에서 영웅광장(Hősök tere)까지 2.3km에 달하는 이 길은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로 손꼽힌다. 내가 이임한 직후인 2002년, 안드라시 거리는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부다페스트 안드라시 거리 스케치화


이 거리 아래로는 유럽 대륙 최초의 지하철이 흐르듯 지나갔다. 버이저 거리(Bajza utca) 역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면 바로 앞에 우리 대사관이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지하철 승강장까지의 깊이가 건물 1층 높이도 채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표면을 깊게 파지 않고 지하철을 놓은 뒤, 그 바로 위에 자동차 도로를 올리는 공법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기술이었다. 100여 년 전 이미 이런 공학적 성취를 이루었다는 사실에 전문가들도 경탄을 금치 못하곤 했다. 대사관에서 '부다페스트의 명동'인 바치 거리까지는 지하철로 불과 10분 거리였다. 가끔 점심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나가 식사를 하곤 했는데, 살아있는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만끽하던 일상은 그 자체로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유럽대륙 최초의 지하철-부다페스트 지하철 1호선


국장급 집무실 부럽지 않던 2등 서기관의 첫 사무실


당시 주헝가리 대사관은 대사를 포함해 총 5명의 외교관이 근무하는 규모였다. 참사관과 나를 포함한 외교부 소속 3명, 그리고 해외홍보원 등 타 부처 주재관 2명으로 구성되었다. 적은 인원처럼 보일 수 있으나, 예나 지금이나 우리 재외공관의 절반 이상이 5명 이하로 운영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극히 평균적인 수준이었다.

안드라시 거리 109번지 주헝가리 대한민국대사관


출근 첫날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내 사무실의 규모였다. 본부 국장급 집무실에 맞먹을 만큼 널찍한 공간에 5인용 소파와 TV, 고급 가구까지 갖춰져 있었다. 오직 나만을 위한 이 당당한 사무실을 마주하니 왠지 모를 자부심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게다가 정무, 경제, 영사, 총무 등 분야별로 현지인 직원들이 배치되어 보좌를 해주었으니, 비로소 명실상부한 외교관이 되었다는 실감이 나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대사 교체기, 총무에게 내려진 특명: "관저를 사수하라"


첫 부임지에서 2등 서기관으로서 내게 주어진 임무는 경제와 총무 업무였다. 참사관이 정무를, 동료 서기관이 영사를 맡은 가운데 나는 대사관의 살림꾼 역할을 도맡아야 했다. 하필 부임 시기가 대사 교체기와 맞물려 있었다. 전임 대사의 이임과 신임 대사의 부임을 준비하는 일은 고스란히 총무 서기관의 몫이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할 틈도 없이 쏟아진 업무는 내게 적지 않은 도전이었다. 부임한 지 고작 3일 만에 이종무 대사가 이임했고, 닷새 뒤 한화길 대사가 부임했다. 그 공백기 동안 내게 하달된 임무는 '관저에 상주하며 집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관저는 단순한 거주 공간을 넘어 국가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엄중한 장소이기에, 한시도 비워두거나 외부인의 손에만 맡길 수 없다는 취지였다.


먼지 쌓인 현판에서 발견한 위대한 유산


주헝가리 대사 관저는 다뉴브강 서쪽 부다 언덕의 고급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834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지상 2층 규모의 고풍스러운 신고전주의 양식의 저택이었다. 헝가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는 마쳐스 왕의 이름을 딴 '마쳐스 키라이(Matyas Kiraly) 거리'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주변은 대통령 관저와 각국 대사관저들이 밀집한 유서 깊은 지역이었다. 본래 헝가리 외무부가 영빈관으로 사용하던 이곳은 1988년 한-헝가리 수교 교섭이 시작된 역사적 현장이기도 했다. 우리 정부가 1990년 이를 매입해 관저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방문하는 헝가리 고위 인사들마다 이곳이 갖는 양국 관계의 상징성을 입을 모아 이야기하곤 했다.

주헝가리대사관저 스케치화

당시에는 미처 몰랐던 관저에 대한 놀라운 사실이 내가 떠난 후인 2007년에 밝혀졌다. 관저 보수 공사 중 다락방에서 먼지에 쌓인 채 방치된 대리석 현판이 발견된 것이다. 거기에는 이 건물이 1846년, 당대 최고의 건축가 힐드 요제프(Hild József)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1957년 헝가리 정부가 문화재로 지정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힐드 요제프는 성 이슈트반 성당 등 헝가리의 랜드마크를 설계한 거장이다. 그런 역사적 가치를 지닌 건물이 우리 대사관저라는 사실은 양국 관계에도 큰 의미를 갖는 것이고 실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총무 부인'도 총무, 아내에게 건네는 뒤늦은 고백


하지만 관저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새내기 서기관에게 대사 부재 기간 동안 관저를 지킨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느껴지기도 한 동시에 마음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다. 내가 사무실에 출근하고 나면, 담장 높은 대저택에서 갓 돌이 지난 아이를 데리고 홀로 집을 지켜야 했던 아내를 생각하면 안쓰러움이 앞섰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아내에게 그 화려한 저택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어쩌면 '아름다운 유배지'와 같았을지도 모른다. 특히 관저 경비견인 커다란 셰퍼드에게 매일 두 차례씩 칠면조 고기를 데워 챙겨줘야 했던 일은 개를 무서워하던 아내에게 견디기 힘든 고역이었다.


이 짧은 경험은 총무 '부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시간들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아내는 헝가리에 근무하는 내내 총무 부인으로서 '半 공식적인'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야 했다. 관저 만찬이 있는 날이면 요리사와 함께 장을 보고, 행사 내내 주방에서 음식 나가는 일을 도왔다. 그럴 때면 현지 보모를 구하거나 한인 교회의 지인에게 아이를 맡겨야 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세월이 흘러 그 시절을 되돌아보니, 그 모든 고충을 묵묵히 감내해 준 아내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금할 길 없다.


公과 私의 경계, 그리고 비 온 뒤 굳어진 땅


신임 대사 내외가 부임한 직후, 사모님이 총무인 내게 건넨 첫 요구는 '관저 비품 목록'이었다. 이는 인수인계의 핵심 사항이었으나, 부임한 지 일주일 밖에 안 된 나는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어떻게 총무가 그것도 모를 수 있느냐"는 싸늘한 반응 앞에 나의 첫 공관 생활은 호된 신고식으로 시작되었다.


이후에도 관저 소모품 구매를 두고 갈등은 이어졌다. 관저가 공적 장소인 동시에 사적인 생활공간이라는 이중성 때문이었다. 나는 '공적 물품은 대사관이, 사적 소비 물품은 개인이 부담한다'는 공사 구분의 원칙을 고수했다. 어느 날 전화상으로 원칙을 견지하는 내게 사모님은 서운함을 숨기지 않으셨고, 이튿날 나는 평소 온화하시던 대사님으로부터 처음으로 매서운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당혹스러웠지만, 합리적인 업무 수행 과정에서 생긴 오해이기에 진심을 다하면 풀릴 것이라 믿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처럼, 서먹했던 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공관 3석으로서 대사님의 출장을 자주 수행하며 육로 이동의 긴 시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점차 가까워졌다. 심지어 부활절 연휴에는 대사님 부부와 우리 부부가 함께 체코 프라하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사모님과 내가 번갈아 가며 밴을 운전하며 달렸던 그 2박 3일의 여정은, 초기의 서툴렀던 갈등을 눈 녹듯 녹여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의 긴장과 웃음은 이제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 내 외교 인생의 밑그림이 되었다.

한화길 대사님 내외와 체코 프라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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