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다뉴브의 비명이 한강의 노래가 되기까지

by 어느 외교관의 꿈

70여년 전, 두 소녀를 통해 양국을 이어준 시인의 절규


부다페스트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고교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김춘수 시인의 <부다페스트에의 소녀의 죽음> 이란 시에서였다. 시의 내용은 아직 어린 내 마음에 지독하리만치 강렬한 이미지로 박혔다. 그로부터 수십 년 뒤, 외교관으로 헝가리에 부임하여 다뉴브 강가를 거닐면서 시인이 그토록 절규하며 불렀던 그 소녀의 환영을 다시금 마주하게 되었다.

김춘수 시집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김춘수 시인은 1956년 10월, 소련의 압제와 공산주의 독재에 항거했던 '헝가리혁명'을 모티브로 하여 이 시를 써 1957년 "사상계"지에 발표하였고, 1959년 이 시를 제목으로 한 시집 <부다페스트의 소녀의 죽음>을 출간하였다. 당시 진해 해군사관학교 교수였던 시인은 부다페스트에서 13살 난 어린 소녀가 소련군의 기관총에 쓰러졌다는 외신 보도에 큰 충격을 받았고, 6.25 전쟁의 포화와 일제강점기 투옥되었던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자유의 소중함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이 시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다뉴브 강가에 쓰러진 헝가리 소녀와 한국 전쟁 시 한강 모래사장에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한국 소녀를 하나의 운명으로 묶어낸 시인의 통찰은 시공간을 초월한 인류애적 연대를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닮은 꼴의 역사가 빚어낸 정서적 연대


헝가리의 현대사는 우리 민족이 걸어온 질곡의 세월과 거울처럼 닮아 있었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은 비록 소련군의 무력 진압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좌절된 혁명'으로 기록되었지만, 그 불씨는 사그라지지 않고 이후 동유럽 자유화 물결의 거대한 서막이 되었다. 마침내 1989년 10월, 헝가리는 공산당 일당 독재를 종식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의 대전환을 이루어냈다.


이러한 헝가리의 격변기는 한국 외교사의 결정적인 분기점과 맥을 같이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열기 속에 양국은 상주대표부 설치에 합의했고, 1989년 2월 1일 드디어 정식 대사급 관계를 수립했다. 이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 중 최초의 수교로, 우리에게는 '북방외교'의 거대한 물꼬를 트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내가 헝가리에서 근무하던 1990년대 후반, 헝가리는 아직 체제 전환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헝가리 사람들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40년 이상 헝가리 사람들과 사회에 뿌리를 내린 사회주의체제의 관습과 문화를 걷어내는 것은 아직 큰 도전이었다. 그리고 이 도전을 이겨내는 데 한국과의 협력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폐허에서 일어나 한 세대 만에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을 일군 한국의 모습은 그들에게 분명한 희망의 이정표였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 붕괴에 헝가리의 역할, 그리고 한반도에 주는 함의


1999년 9월 부다페스트 헝가리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던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 기념행사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헝가리는 1989년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함으로써 동독인들의 탈출을 도와 베를린 장벽 붕괴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은 매년 헝가리와 함께 베를린 장벽 붕괴를 기념하는 행사를 하면서 헝가리에 대한 고마움을 표해 왔다. 이 행사에 참석한 쉬뢰더(Gerhard Schröder ) 독일 총리는 '독일통일을 가능하게 했던 헝가리의 행동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독일 국민의 감사를 전했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헝가리가 수십만 명의 동독인들에 대해 자유로운 통행을 허용한 것은 유럽사의 전환기가 되었다'라고 하면서, 헝가리가 21세기 독일의 탄생 현장에 있었다고 강조했다. 나는 한 나라의 용기가 인류사에 얼마나 큰 파동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 생생한 역사를 마주하면서 이런 기적 같은 역사가 한반도에서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베를린장벽붕괴10주년.jpg 헝기리 괸츠 대통령과 악수하는 쉬뢰더 독일 총리


시인의 절규가 이어준 70년의 유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나 할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비극과 시인의 외침은 30여 년 전 양국 간 수교의 기틀이 되었고, 이제 7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양국 국민의 정서를 잇는 깊은 뿌리가 되었다. 지금도 다뉴브강과 한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다. 그 물결 속에는 시인이 포착했던 '자유를 향한 뜨거운 피'와 '치욕에서 싹튼 용기'가 여전히 맥동하고 있고, 두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주고 있다. 그 숭고한 울림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며, 70여 년 전 김춘수 시인의 절규를 이곳에 옮겨둔다.


<부다페스트의 어느 소녀의 죽음> - 김춘수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의 소련제(製)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순간,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삼십보(三十步) 상공으로 튀었다.

두부(頭部)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鋪道)를 적시며 흘렀다.


―너는 열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의 일만(一萬)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江)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뉴브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슈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사장(沙場)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쥐고

왜 열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까,

죽어 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한국의 열세 살은 잡히는 것 하나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 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한강에서의 소녀의 죽음도

동포의 가슴에는 짙은 빛깔의 아픔으로 젖어든다.

기억의 분(憤)한 강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흐를 것인가, 영웅들은 쓰러지고 두 달의 항쟁 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부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꾼 지금,

인류의 양심에서 흐를 것인가,


마음 약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한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사람은

불면의 밤, 왜 모든 기억을 나에게 강요하는가.

나는 스물두 살이었다.

대학생이었다.

일본 동경 세다기야서 감방에 불령 선인으로 수감되어 있었다.

어느 날, 내 목구멍에서

창자를 비비 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머니, 난 살고 싶어요.>

난생처음 들어보는 그 소리는 까마득한 어디서,

내 것이 아니면서, 내 것이면서……

나는 콩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고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누가 나를 우롱하였을까.

나의 치욕은 살고 싶다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내던진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에서 역으로 싹튼 것일까.

싹은 비정의 수목들에서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소녀의 뜨거운 피 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아쥬로 움트며 위협하고

한밤에 불면(不眠)의 담담한 꽃을 피운다.


인간은 쓰러지고 또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또 쓰러질 것이다.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악마의 총탄에 딸을 잃은 부다페스트의 양친과 함께

인간은 존재의 깊이에서 전율하며 통곡할 것이다.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 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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