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예보의 붉은 장미

총성이 멎은 곳에서 일상이 다시 시작되고 있던 도시

by 어느 외교관의 꿈

역사의 화약고, 그 비극의 이름

사라예보는 1914년 6월,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쏜 두 발의 총성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이다. 우리에게는 1973년 4월 이에리사 선수의 기적 같은 금빛 스매싱이 울려 퍼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승리의 기억이 남아있는 곳이지만, 동시에 1990년대 현대사에서 가장 잔혹했던 '인종청소'의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비운의 땅이기도 하다. 나는 주헝가리대사관 근무 시절인 1999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이 비운의 도시를 방문했다. 당시 우리 대사관이 신생국이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깨어진 공존의 꿈: '유럽의 예루살렘'이 흘린 눈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와 함께 구유고연방공화국에 속했었다. 무슬림(보스니아계), 정교회(세르비아계), 가톨릭(크로아티아계)이 수 세기 동안 이웃사촌으로 공존해 온 '발칸의 소우주'라 불렸다. 특히 한 거리 안에서 성당의 종소리와 이슬람 사원의 아잔(Azan) 소리가 어우러졌던 사라예보는 '유럽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며 관용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러나, 1980년대 말 소연방의 붕괴와 동유럽의 탈사회주의 움직임 속에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이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과정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민족주의의 광기는 어제의 이웃을 오늘의 학살자로 바꾸어 놓았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가장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92년 국민투표로 유고 연방에서 탈퇴를 결정하고 독립을 선언하자, 이에 반대한 세르비아계는 '스르프스카 공화국'을 세우고 밀레소비치의 세르비아 군대의 지원을 받아 사라예보를 43개월 동안 완전히 포위했다. 이는 현대전 역사상 가장 긴 포위전으로, 도시 전체가 거대한 창살 없는 감옥이 된 셈이었다. 산등성이에 배치된 세르비아 민병대의 저격수들은 거리의 민간인을 사냥하듯 조준 사격했고, 생계를 위해 줄을 선 시장박닥에 까지 무자비한 박격포탄이 떨어졌다. 이 기간 동안 사례예보 시민 1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내전의 상흔 속에서 마주한 인간의 얼굴

보스니아 내전은 역사장 최악의 인종청소로 불릴 정도의 집단학살을 낳았다. 특히 1995년 스브레브니차에서 벌어진 8,000여 명의 무고한 무슬림 남성들의 학살은 인류의 양심에 씻을 수 없는 낙인을 남겼다. 결국 유엔과 NATO가 개입하였고, 1995년 11월 미국의 중재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의 지도자들이 미국 데이톤(Dayton)에서 평화협정에 서명하면서 잔혹했던 학살전쟁이 마침내 끝났지만, 4년 남짓 내전 기간 동안 25만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우리나라는 Dayton 협정 직후인 1995년 12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국제사회의 재건노력에 동참하고 있었다. 나의 두 차례 방문도 컴퓨터와 차량 등 한국국제협력단을 통한 우리의 무상원조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1999년 10월, 내가 처음 마주한 사라예보는 데이턴(Dayton) 평화협정 이후 4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전쟁은 멈추었지만 폐허 속에서의 현실은 참담했다. 시내 건물 외벽에는 스위스 치즈처럼 구멍 난 총탄 흔적이 가득했고, 깨진 유리창 너머로는 전쟁의 공포가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길바닥 곳곳에는 포탄 자국을 붉은 잉크로 채워 희생자를 추모하는 '사라예보의 장미(Sarajevo Rose)'가 선혈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기억을 지우지 않겠다는 도시의 다짐이었다.


내가 묵었던 시내 한복판의 '홀리데이인 호텔'은 종군 기자들의 숙소이자, 전쟁 당시 저격수들의 광기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역사의 목격자였다. 공항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골목마다 UN 마크를 단 흰색 장갑차와 도요타 차량들이 곳곳에서 불안한 평화를 감시하고 있었고, 국제사회가 임명한 고위대표(High Representative)가 국가 체계 수립을 주도하는 모습은 이 나라가 넘어야 할 전후 재건의 산이 얼마나 높은 지를 실감케 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바슈차르시아 시장의 좁은 골목에서 진한 보스니아 커피 향을 맡았다. 오스만 시대의 모스크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양식의 건물이 나란히 서 있었고, 총탄 자국이 남은 벽 아래에서 공을 차며 웃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폐허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는 인간의 회복력의 증거였다.


21세기, 되풀이되는 비극과 성찰

사라예보 거리를 거닐며 나는 인간의 잔혹함에 대해 자문했다. 인간의 잔혹함은 어디까지인가. 한솥밥을 먹던 이웃에게 총구를 겨누게 만든 그 증오의 동력은 대체 무엇인가. 폭력의 주체가 먼 곳의 괴물이 아니라 바로 평소에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던 옆집 이웃일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가장 참담하게 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지금, 비극은 장소만 바꾼 채 되풀이되고 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의 마리우폴, 그리고 중동에서 들려오는 폭격 소리는 사라예보의 비명과 닮아 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생명과 존엄성을 짓밟는 행위는 인류가 얼마나 진보했는지를 묻는 질문 앞에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기술은 21세기를 달리고 있지만, 인간 내면의 야만성은 여전히 20세기의 증오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


전쟁은 단순히 물리적 파괴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품었던 '신뢰'라는 가장 고귀한 가치를 도려내는 일이다. 사라예보의 장미는 단순한 붉은 흔적이 아니라, 인류가 서로의 가슴에 남긴 지워지지 않는 흉터이자, 동시에 기억을 통해 다시는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붙잡는 일이 아니라, 미래를 지키는 최소한의 장치다. 총성이 멎은 자리에 일상이 다시 피어나듯, 언젠가는 그 흉터 위에도 진정한 용서와 화해의 꽃이 피어나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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