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너머로 피어난 협력의 꽃

아드리아해의 진주, 크로아티아 리예카항 현대화 사업

by 어느 외교관의 꿈

텅 빈 고속도로와 총탄의 흔적: 2000년대 초반의 기억

'아드리아해의 진주'라 불리는 크로아티아. 지금은 전 세계 여행객들이 꿈꾸는 눈부신 휴양지이지만, 내가 주헝가리대사관에서 크로아티아 업무를 겸임하던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우리나라는 크로아티아가 독립한 이듬해인 1992년 11월 수교했지만, 현지 대사관이 설치된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05년 12월에 와서였다. 그전까지는 국경을 넘어 신생국 크로아티아와의 관계를 관리하고 재건을 지원하는 것은 주헝가리대사관의 소임이었다.


크로아티아는 소연방의 붕괴와 동유럽에서의 탈냉전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1991년 6월 유고슬라비아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 유고슬라비아의 인민군(JNA)이 크로아티아로 진격하였고, 독립에 반대하는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도 크라이나 세르비아공화국(RSK)을 세우고 민병대를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독립은 곧 전쟁과 내전의 문을 여는 서곡이 되었던 것이다. 1995년 11월 크로아티아의 승리로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4년간의 전쟁(크로아티아는 '조국전쟁'으로 부른다) 동안 2만여 명의 사상자와 7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부코바르에서의 격렬한 전투뿐만 아니라 유명한 관광지인 스플리트와 플릿비체, 두브로브니크까지도 포격이 가해졌고, 경제와 인프라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독립 후에도 3년간 유엔이 주도하는 과도행정기구의 통치를 받았고, 1998년 1월에 와서야 독립국으로서 완전한 행정권을 가질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 지도

1999년, 처음으로 육로를 통해 크로아티아 국경을 넘었을 때 마주했던 광경이 아직 눈에 선하다. 자그레브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시원하게 뚫려 있었지만,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어 적막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자그레브는 큰 피해를 피해 갔지만 자그레브 인근의 시삭(Sisak) 제철소 외벽에는 치유되지 못한 총탄 자국이 훈장처럼 박혀 있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자그레브 시내에는 전쟁의 여파가 아직 감돌고 있었고, 전후 재건이라는 거대한 도전 앞에 선 신생 독립국의 무게감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리예카 항구에 심은 희망: EDCF 현대화 사업

당시 우리 정부는 전후 재건 지원의 일환으로 3,500만 달러 규모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지원을 추진하고 있었다. 대상은 크로아티아 최대의 무역항인 아드리아해 북부 리예카(Rijeka) 항구 현대화 사업이었다. 노후화된 컨테이너 크레인을 현대적인 장비로 교체하여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 슬로베니아의 코퍼항과 경쟁하며 유럽으로 향하는 관문을 선점하려는 크로아티아 정부의 최우선 국책사업이기도 했다.


EDCF 지원을 위해서는 사업제안서와 타당성 조사, 구체적인 지원조건 협의와 MOU 체결, 차관협정 체결 등 복잡한 과정으로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내가 주헝가리대사관에 부임했던 1998년 8월에도 이미 오랫동안 진전을 보지 못해 왔던 현안이었다. 나는 한화길 대사와 함께 수차례 크로아티아를 방문하면서, 이 사업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고, 리예카 항만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양국 간 협의를 진전시켰다.


2001년 1월, 헝가리 이임을 코앞에 두고 한화길 대사님의 마지막 자그레브 방문 일정이 잡혔는데, 나는 이 계기에 EDCF 협약이 체결되어 마무리될 수 있도록 마지막 박차를 가했다. ‘이번에 매듭짓지 못하면 기약 없이 더 지연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였다. 마침내 양측 간 협약 문안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나는 본부 조약과를 재촉해 우리 측의 국내절차를 적기에 완료토록 하면서, 서명이 이루어질 조약문을 특별 외교행낭으로 공수받았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크로아티아 측에서는 대사 방문 시까지 서명을 위한 국내절차를 마무리하기 어렵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크로아티아 외무부 담당자에게 "매우 실망스럽고 좌절감을 느낀다(very disappointed and frustrated)"는 비외교적인 언사까지 동원하며 압박했다. 마침내 1999년 1월 16일, 대사의 자그레브 방문 시 극적으로 협정 서명을 마칠 수 있었고, 이때의 쾌감은 34년 외교관 생활 중 작지만 기억에 남는 보람으로 간직하고 있다.


라면 상자와 일류의 품격: 기업인이 가르쳐 준 '비용'의 가치

이 사업을 떠올릴 때면 항구의 크레인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나는 얼굴이 있다. 당시 파트너였던 삼성물산의 김기정 부장이다. 헝가리 부임 이후 이임할 때까지 크로아티아 EDCF 사업과 관련해 삼성물산과 긴밀히 협조했는데, 당시 이 사업을 담당했던 김기정 부장이 거의 매번 크로아티아 현지에서 우리의 일정을 주선하고 준비해 주었다. 대사관이 없던 시절, 그는 현지의 모든 일정을 완벽하게 조율하며 우리 외교 활동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삼성물산 김기정 부장과 리예카항에서

자그레브 출장시 어느 날 시내 호텔 내에 차려진 그의 임시 사무실 한구석에 쌓인 라면 상자를 발견했다. 바쁜 일정에 식사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던 그는 사무실에 라면상자를 가져다 놓고 틈틈이 끼니를 해결했던 것이다. 일류 기업의 간부가 왜 끼니를 그렇게 때우느냐고 묻자,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기업에게는 현지 활동비 전체가 비용입니다. 식비 하나라도 아끼는 것이 결국 경쟁력입니다." 공무원으로서 비용의 개념이 희박했던 내게 그의 검소함과 프로 정신은 신선한 충격이자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 죽비와 같았다. 훗날 그가 부사장까지 승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자가 면제되었습니다": 외교관으로서 맛본 최고의 보람

외교관으로서 가장 큰 성취감은 내가 쏟은 노력이 누군가의 실질적인 혜택으로 돌아갈 때 찾아온다. 2000년 5월, 크로아티아 정부로부터 한국인에 대한 30일 비자 면제 결정을 통보받고 나는 남몰래 환호했다. 우리 기업인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현지 경제계 인사들을 만나 "한국 기업인이 더 많이 와야 경제 협력이 산다"며 끈질기게 설득했던 논리가 결실을 본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한-크로아티아 외교관관용 비자면제협정 체결식(2001.2.12, 부다페스트)


여기에 더해 이임 직전인 2001년 2월, 지지부진하던 외교관·관용여권 비자면제협정까지 체결하며 크로아티아와 관련한 숙제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협정 문안 협상이 마무리되었음에도, 협정에 서명할 헝가리주재 크로아티아의 전권위임장이 연이은 대통령과 대사 교체와 맞물려 번번이 무산되어 왔었는데, 끈질긴 교섭으로 돌파해 마침내 한화길 대사 이임 전 우리 대사관에서 부다페스트 주재 양국 대사간 협정에 서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20여 년 후, 아드리아해에 흐르는 온기

시간은 흘러 크로아티아는 2013년 7월 EU의 28번째 회원국이 되었고, 그 10년 후인 2023년 유로화를 도입하고 1인당 GDP가 2만 달러를 돌파하여 당당히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2003년 2만여 TEU에 불과했던 리예카 항의 연간 물동량은 이제 35만 TEU를 훌쩍 넘어서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최근 들리는 소식에 따르면, 리예카 항만 관계자들은 여전히 한국을 각별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20년 전 우리가 함께 심었던 리예카항 현대화의 씨앗이 오늘날 크로아티아 경제의 든든한 뿌리가 된 셈이다. 텅 빈 고속도로를 달려 자그레브로 향하던 그 시절,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리예카의 미래를 설계하던 우리 기업인과 외교관들의 치열함이 지금도 푸른 아드리아해의 물결 위에 잔잔한 자부심으로 일렁이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사라예보의 붉은 장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