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에서 꺼내 본 모로코에서 내 삶의 단편
일기장 속에서 만나는 과거의 나
과거의 일기를 들추어 보는 것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정이다. 그 시절, 낯선 땅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발버둥 치며 남겼던 흔적들을 대할 때면,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지기도 하고 때로는 따뜻한 위안을 받기도 한다.
기록되지 않은 삶도 여전히 기억의 심연 속에 살아 있겠지만, 일기장을 펴는 순간 마주하게 되는 '나'는 시간을 거슬러 사라지지 않고 내 앞에 생생하게 나타난 현재화된 나의 단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성실하게, 조금 더 자세하게 그 시절 내 삶의 모습과 생각들을 남겨놓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쩌면 기록하는 자의 공통된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펼쳐든 먼지 쌓인 일기장 속에서 어느 젊은 외교관의 평범한 하루를 발견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무엇을 했고 누구를 만났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기록이지만, 그 속에서 치열하게 하루를 메웠던 내 모습을 보며 25년 전의 나에게 조용한 격려를 보내게 된다. 2001년 5월 28일, 주모로코 대사관에 부임한 지 석 달째 접어들던 날의 기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열풍(熱風)과 팽팽한 긴장감 속에 시작된 하루
"엊그제부터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그늘에만 들어서면 시원해지던 이곳 날씨도 이번 열풍(Chergui)에는 맥을 쓰지 못하고 있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멜리카(Melika)의 말로는 앞으로 이틀 정도 이런 더위가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아침부터 대사님과의 회의를 시작으로 모리타니아 참사관, 모로코 원자력연구소장과의 면담 등 촘촘한 일정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월요일마다 열리는 주철기 대사님과의 주례 회의는 출장 중인 민자규 영사님을 제외하고 나와 이은경 서기관만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지만 팽팽한 긴장감 속에 진행되었다.
나는 KBS 기자의 서부사하라 유엔감시단(MINURSO) 취재 지원, 대사님의 겸임국 모리타니아 방문 준비, 원자력연구소장의 방한 계획 등 산적한 현안들을 보고했다. 보고가 이어지는 동안 대사님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내가 놓친 빈틈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모로코 국왕의 세네갈 방문 결과에 대한 정보 파악이 미진했던 점, 주말 현지 신문의 한국 관련 기사를 기민하게 챙기지 못한 점에 대해 지적이 이어졌다. 이은경 서기관이 보고한 대사관의 예산적인 어려움과 관련해서는 신문 구독을 줄이고 전기료를 아껴 쓰는 노력을 하면서 하반기 중 본부에 추가적인 비용 지원 요청을 검토하기로 했다.
당황했던 현지식 인사, 남자끼리의 볼 키스
회의가 길어지는 바람에 겸임국인 모리타니아 대사관의 므바라크(M'bareck) 참사관과의 약속에 조금 늦고 말았다. 서둘러 들어선 나를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맞이했다. 갑자기 그가 내 어깨를 감싸더니 자신의 뺨을 내 뺨에 가져다 댔다. 순간 당황한 나는 그것이 현지식 인사라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한 채 서둘러 안부를 물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그와 통역으로 함께 간 비서 자마(Jaama)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이어가는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에어컨도 무력한 무더위 속에서 한 손으로 계속 흐르는 땀을 닦으며 6월 중순에 있을 우리 대사님의 모리타니아 방문 일정을 조율했다. 총리와 각료 면담, 무상원조 기증식 주선... 겉으로는 적극 협조하겠다는 그의 말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진심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 믿으며 설득을 이어갔다. 면담을 마치고 나올 때는 잊지 않고 이곳 방식대로 뺨을 마주치는 인사를 나누었다. 현관 바깥까지 나와 배웅하는 그에게 다음 주 점심 식사 초대를 약속하며, 오늘 첫 만남에서 쌓은 신뢰에 기분 좋은 여운을 남겼다.
외교관의 일상, 세일즈 외교
이어 부랴부랴 향한 곳은 모로코 원자력연구소(CNESTEN)였다. 메디우리(Mediouri) 소장의 방한을 앞두고 양국 연구소 간 협력 약정 검토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다행히 본부에서 원자력업무를 담당했던 경험 덕분에 이곳 연구소 방문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고, 소장과 관계자들도 친절해서 찾을 때마다 편안한 마음이 드는 곳이었다. 메디우리 소장은 미국 유학파 출신의 실력파 학자로 매우 친밀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협력 약정이 모로코 외무부 승인을 받았다는 희소식을 접한 뒤, 나는 소장에게 방한 계기에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 시찰을 강력히 권했다. 당장 모로코에 원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먼 미래에 그들이 원전을 건설하게 된다면 반드시 한국의 기술이 그 기초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소장이 관심을 보여서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후 전문을 통해 우리 원전 방문주선을 본부에 건의하였다. 모로코는 아직 원전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향후 원전 건설 추진 가능성이 있고,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나라가 모로코 원전시장 진출 기반을 다진다는 차원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해 달라고 했다.
다시 대사관에 돌아와서는 이곳 국방부와 경찰청에 한 우리 방위산업체가 보내온 상품 카탈로그를 동봉해서 향후 관련된 정부 물품 구매 시 고려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지난 5월 21일 이곳에서 개최된 한-모로코 IT 포럼과 관련해서 주말 동안에 현지 언론에 보도된 두 건의 기사 내용을 요약해서 본부에 보고했다. 비서에게는 수요일 카사블랑카의 기계산업협회, 정보산업협회 방문 일정을 주선해 놓으라고 지시하고, 내일 있을 러시아 대사관 서기관과의 오찬 차량까지 점검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루가 저물었다.
땀방울로 만들어간 내 삶과 외교의 이정표
"지난 한 달 동안 통상교섭본부장 방문, 정보통신부 차관 방문 준비로 매우 분주했었는 데, 이제 큰 행사가 끝나니 차분한 마음으로 나름대로의 일상적인 외교활동에 다시 돌아가고 있는 듯한 하루였다."
우리 외교의 한 변방, 모로코에서 땀흘리던 젊은 외교관의 하루는 어느 직업인의 하루와 다르지 않다. 외교관의 삶이란 거창한 구호나 화려한 연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뜨거운 열풍 속에서 땀을 닦으며 상대방과 뺨을 맞대고, 미래의 가능성을 위해 한 통의 서한과 보고서를 정성껏 써 내려가는 그 평범하고도 치열한 하루하루로 점철되고 있는 것이 외교관의 일상이다. 25년 전 그날의 내가 흘린 땀방울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소중한 이정표였고, 우리 외교사의 한 모퉁이에 보이지 않게 쌓았던 나의 작은 기여였다. 그날의 공기와 땀방울은 여전히 내 곁에 머물러, 오늘의 나를 지탱해 주고 있다. 일기장 속에서 다시 마주한 그 치열했던 젊은 날의 내 앞에 잠시 멈추고 조용히 미소를 건네본다. 그리고, 이제 반백이 된 그 젊은이 앞에 펼쳐진 길을 다시 뚜벅뚜벅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