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지금까지 만난 의사들은 대체로 시크하지만 설명을 잘해주는 편이었다.
밴딩을 권했던 의사만 빼고는 말이다. 다시 생각해 봐도 너무 낡은 방법이었다. 아마도 그는 의사의 업을 은퇴하기 전 마지막으로 여유로운 자리를 찾다 거기로 갔을 것이다.
다시 서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신문을 검색하고 여러 가지 평을 검색했다.
뇌혈관 내 수술, 즉 중재술을 잘하는 의사라고 했다. 지금이야 혈관 내 수술이 보편화되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약간은 낯선 분야였다.
어쨌든 그도 명의 리스트에 있었다.
뇌혈관 내 수술은 잘 만하면 표시가 하나도 나지 않는다. 처음 명의라고 찾아간 의사도 중재술을 개척한 사람이었으니 이번은 기대가 남달랐다.
오전 첫 진료 시간이라 새벽부터 온 가족을 차에 실어 B병원으로 향했다. 당시 둘째는 아직 엄마의 젖을 찾는 아기였다.
진료실에 들어갔다.
미리 입력한 자료를 훑어보던 의사에 물었다.
가능성은 있는지, 장애를 가질 확률을 어느 정도 되는지, 조금이라도 확률이 높은 치료를 받기 위해 여러 가지 질문을 했을 때 의사의 첫 반응은 공격적이었다.
의사 말의 요지는 이러했다.
내가 몇 %라고 말하면 그것을 꼬투리로 날 공격할 거 아니냐. 나에게 치료를 받을지 받지 않을지 결정해라, 아님 더 이상해 줄 이야기 없다.
귀를 의심했다.
이 사람,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런 식으로 환자를 대하면서 자신을 진짜 믿고 따라온 환자에게는 잘 대해준다고 하였다. 그의 심정도 이해되지만 사람을 대하는 직업으로서는 낙제점이었다.
그래도 목숨을 구걸하러 온 사람에게 너무 한다 싶었다.
순간 잠자코 듣고 있던 아내가 말했다.
‘내가 수술을 받더라도 선생님한테는 받지 않을 겁니다.’
폭탄 같은 선언이자 운명을 선택하는 말이었다.
사실 나의 기억에는 없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나는 의사의 말 중에 ‘안팎을 동시에 해야 합니다.’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수술을 피할 수 없구나, 중재술로는 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기 위해 의사의 말 한마디도 놓칠 수가 없었다.
몇 시간을 달려 진료실에 들어 간지 2~3분 만에 나왔다. 정확한 시간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우울했다. 보호자도 환자도 그랬다.
십여 년이 지난 후 친분이 있는 다른 의사 선생님과 대화 중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그 선생님도 그렇게 이야기해 놓고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 그도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의 가시 돋친 말이 너무 아팠다.
그도 환자들에게 말로서 상처를 많이 받았겠지만 그래도 너무한 처사였다.
아마, 이야기가 잘 되었다면 그때 그에게 수술을 받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사람의 운명이라는 게 늘 순간의 작은 선택으로 결정되는 것 같다. 지금도 그 생각을 변함없다.
병원을 나왔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 같았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지?” 운명이라는 것이 말이다.
아내는 나보다 더 낙담했을 것이다. 아내는 죽음보다 장애를 더 걱정하고 있었다.
멀쩡한 사람이 장애를 가지면 자신에 대한 존엄성이 사라진다.
아무리 수족같이 남편이나 아내, 자식들이 보살펴도 스스로 삶을 영위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가 생긴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놓이면 서로 갈등하게 되고 힘들어하게 된다.
사람이 스스로 삶을 영위하는 것은 삶의 질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건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적인 죽음을 맞기 십상이다. 비참한 일이다. 개인으로나 가족으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