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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범 Nov 08. 2017

#27. 포석(布石) ---(1)

개인

바둑을 둘 때, 앞으로 집을 차지하는데 유리하도록 처음에 돌을 벌여 놓는다는 뜻으로 바둑이나 정치하는 쪽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다.

일반적인 개념으로 재 해석을 하면 “장래를 위하여 무엇인가 미리 손을 쓴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포석의 하나로 사용되는 돌엔 특별한 미션이 부여되어 있다.

왜냐하면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의도가 은밀하게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포석엔 정교한 전략적 선택이 녹아 있다. 그러므로 포석 하나 때문에 이기는 바둑이 되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지는 바둑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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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을 놓으려면 원하거나 이루고 싶은 미래의 그것이 지금 놓는 포석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선제적으로 읽어내는 통찰력이 중요하다. 포석을 놓는 시점에서는 주변인들의 우려를 사는 일이 적지 않다. 납득할 수 없는 범위의 선택 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삼성전자는 IMF로 인해 너나 할 것 없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일본을 비롯한 전자분야 선진회사에 자문을 구한 일이 있다. 그들은 LCD, 반도체, PC, 카메라…… 등 여러 갈래로 분산되는 다각화보다는 특별한 한 두 가지로 집중하는 전문화 전략을 제안했다.

기업의 전략적 선택은 미래를 위한 하나의 포석일 수 있다. 잘못된 전략은 기업의 미래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름의 대명사 코닥은 필름에서 디지털로 대변되는 미래 시장을 읽어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코닥이라는 이름은 기업의 역사에서 실패로 끝난 사례 중 하나로 학습되고 있다.


삼성이 그들의 자문을 그대로 수용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삼성은 그들 제안한 전략적 포석을 수용하지 않았다. 미래엔 융합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사업이 하나의 포석이 되어 미래엔 서로 융합된 사업의 시너지를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으로 귀결된다. 알기로는 세계 유수의 전자 회사 중에 삼성전자만큼 잘 짜인 생산구조를 갖고 있는 회사는 없다.

오늘날 Apple과의 핸드폰 전쟁에서 버틸 수 있는 것도 어쩌면 과거에 놓았던 전략적 포석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가령 반도체라고 하는 특별한 무기를 자체적으생산, 선도하거나 각종전자 기기를 유저가 원하는데로 생산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IT 공룡인 Apple이나 google 등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물론 현재의 경쟁력이 미래를 담보하지 않기에 지금도 삼성에서는 미래의 생존을 위한 포석을 고민하고 있을 테니 미래의 흥망은 짧은 지식을 가진 내가 논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삼성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두뇌들이 풀어야 할 숙제이기 때문이다.


포석은 개인에게도 중요한 고민을 자극한다.

더군다나 AI(인공지능)라고 하는 괴물이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면서 수 없이 많은 직업이 사라질 것에 대한 공포의 그림자가 충분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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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고 있는 이 일은 안전할 수 있을까?”  

2007년 1월 9일은 iPhone이 선 보인 날이다.

핸드폰 역사에서 iPhone은 그 이전과 이후를 나눌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앉은자리에서 세상 돌아가는 일을 바로 알 수 있게 된 것이 신기하지 않은 세상이다. 자그마한 기기 하나로 음악, 영화, 통신, 게임, PC, 번역, 비서, …… 못하는 게 없는 특별한 경험을 수십억의 지구인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수없이 많은 직업이 없어지거나 그 명맥을 유지하는 선에서 간간히 목숨을 이어가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불과 10여 년의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 등을 일시에 묻어버릴 만한 괴물이 출현하려 용트림을 하고 있다.

그것은 수많은 인간의 밥줄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인간의 존엄성까지 위협할지 모른다는 경고장이 발부되는 실정이다. 4차 산업으로 명명된 것 중 하나인 인공지능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AI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아니 내가 하는 이 일은 존속될 수 있을까?

생존을 위한 포석을 놓아야 하는 시점인 것은 분명하다. 기업도 개인도 지금 필요한 한 가지는 통찰력이다.

“우리는 (지금의 나는) 어떤 그림을 아웃풋으로 하는 포석을 놓아야 할까?”

 

나는 강사다.

강단이 없는 강사는 의미가 없다. 강사는 해당 영역의 지식을 활용하여 인간의 삶에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별한 영역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직업에 비해 인풋 대비 아웃풋을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다양성을 갖고 있다.

AI는 숫자를 다루는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노출된 정보를 떡 주무르듯 다룰 수 있다. 제한된 시간 내에 정답이라고 정의되는 값을 도출하는데 경쟁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이미 숫자로 인식되는 정보를 다루는 게임은 끝난 얘기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인공지능은 감정을 다루는 인간의 뇌를 훔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인간이 정복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감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견이 갈리고 있지만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진 않다. 다만 AI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도 하지만 또 그에 따른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에 대한 이견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연장선 상에서 내가 하고 있는 강사의 직업도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인공지능은 예술 분야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선 보이고 있다.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한다. 뿐만 아니라 전문 분야의 기사를 쓴다. 요즘은 드라마에서 인공지능 로봇을 다루는 프로그램도 등장하고 있다(ex : TV 드라마 “보그 맘”)

강사를 대신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아직은 투박한 모습이 없지 않지만 인간만이 가능한 고유 영역 중에서 가장 고도의 경지라 할 수 있는 감정을 다루는 것까지 넘보고 있는 것이다. 숫자가 점령당하고 감정을 다루는 능력까지 빼앗기면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단어는 사라질 것이다. 앞서간 느낌이 없진 않지만 이 글이 인간의 존엄적 가치까지 다루겠다는 생각으로 출발된 것은 아니다. 또 그렇게 깊이 있는 생각을 논할 만큼 식견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개인적 생각은 접어두기로 하자.


나는 강사로서 생존할 수 있는가?

또 생존을 위해 지금 어떤 포석을 두어야 하는가?


머리가 아프다.

숫자를 다루는 영역인 보험사에 근무하지만 주된 강의는 숫자의 영역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영역에 더 가까운 강의를 한다. 조금 더 정확하게 구분 짓는다면 “동기부여” 쪽에 가까운 일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그에 어울린 강의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간의 감정은 변화무쌍하다. 희로애락의 격차가 커서 마치 조울 성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처럼 기복이 심하다. 그렇게 쉼 없이 움직이는 인간의 감정에 자극을 주는 일이 주로 하는 일이다.

좌절되어 있는 마음에 할 수 있다는 불을 댕기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들떠있는 기분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것도 역시 어려운 작업이다.

인간이기에 통 할 수 있는 감정의 나눔,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공감과 경청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동기부여는 불을 댕기기보다 찬물을 끼얹는 것과 같다.

흔히 말하는 영혼이 없는 화려한 언어적 표현을 동원하고 적재적소에 필요한 감정적 단어를 활용하여 전하는 것은 쉬울지 모르지만 그 속에 반드시 담겨야 하는 인간의 냄새를 인공지능이 해결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묻는 다면 그것은 회의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은 인간을 흉내 낼 수 있겠지만 누가 뭐라 해도 인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간의 기술이 뛰어나도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꿀순없다. 껍데기는 바꿀 수 있지만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본연의 그것까지 송두리째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을 대체할 순 있지만 인간이 지닌 본질까지 담아낼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 기인해서 생각하면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고, 인간이기에 위로받을 수 있는 강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공지능처럼 무한 정보를 순식간에 끌어다 쓰거나 교육과는 무관한 어떤 질문에도 흔들림 없이 답변할 수 있는 강사는 못되지만, 교육생의 질문에 대해 모르면 모른다고 답 할 수 있는 인간다움과 교육생과 함께 호흡하면서 웃고 울고 나누며 교감하는 강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인간성(人間性), 인간애(人間愛)가 답은 아닐지?

사람 냄새로 가득한 강의를 해야 한다는 생각 외엔 또 다른 생각이 떠 오르질 않는다.

추상적이긴 하지만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모르겠다.

인간의 본질이 서로 통(通)하는 그런 강의를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인간과 인간의 근원 문제,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는 인문학”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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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주는 메시지를 삶에 적용해보고 그에 따른 느낌을 강의 내용에 녹이는 일이 필요하다. 어쩌면 내가 희망하는 강사로서 생존하기 위한 포석으로 가장 먼저 섭렵해야 할 분 문학이지 않을까 예측해 본다.

물론 동의하지 않아도 좋다. 내가 하는 일의 생존을 위해 나름 고심하는 가운데 내려진 포석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만 자신이 하는 일(業)의 관점에서 좀 더 길고 강한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지금 이 시점에서 보다 나은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어떤 포석을 둘 것인지 고민하는 시간은 꼭 가져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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