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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범 Nov 20. 2017

#32.  궁(窮)해야 변(變)한다(1)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ㅣ)

窮 다할 궁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이젠 방도가 없다”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게 된다.

궁지에 몰리면 죽기 살기, 이판사판, 목숨을 건 도박이 벌어지는 것도 다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유능한 장수는 적의 퇴로 중 하나는 열어두고 전쟁을 한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까지 막아버리면 적군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역효과가 발생한다. 그래서 퇴로를 막고 하는 전쟁은 피차간에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궁하면 변한다고 했다(궁즉변 窮則變)

그것이 비단 전쟁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전쟁터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 궁즉변(窮則變)이다.

궁(窮)하다는 것은 절실하다는 필요를 자극한다. 무언가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마음이 극에 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카드를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궁(窮) 하지 않다는 것과 괘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아직은 버틸 만하다는 일말의 미련은 변(變)화의 싹을 키워내지 못한다.


“지금도 충분한 이익이 나는 사업인데 굳이 모험일 수 있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는가?”


사람도 기업도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는 선택이다.

가진 것에 대한 향수에 취한 정도가 심할수록 변화에 대한 열망은 줄어든다. 충분하게 누릴 수 있는 현 상황을 위험이라고 하는 칼 날 위에 올려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이 새로운 변화의 카드를 거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시도보다는 하고있는 것을 지키거나 개선하는데 역량을 집중자고 말한다.

궁(窮) 하지 않은 사람이나 조직에서 흔히 보일 수 있는 저항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궁함의 끝에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넉넉한 집엔 궁함이 없다. 먹고사는 문제는 걱정 리스트에 들어 있지도 않다. 그들만의 문화와 가치를 공유하기 위한 것에 신경을 쓴다. 그것이 일반적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향에 맞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창업자의 개척정신이 살아 있는 1대(창업), 창업주의 정신을 이어받은 2대(계승)는 동시대를 살기 때문에 일정 부분 고통스러운 삶의 배경을 공유하고 있지만, 3대로 넘어가면 무리한 확장을 시도하다가 수성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기업을 망가트리는 예가 허다한 것이다.

이는 궁(窮)함의 의미를 몸소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좋은 환경에서 세계 유 대학에서 경영을 공부했어도 몸으로 맘으로 부딪히며 버텨낸 1대와 2대의 절실함을 머리만으로는 올곧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환경의 변화를 외면하거나 읽지 못하고 적절한 선택을 하지 못해서 궁(窮) 해지는 것도 있지만 인위적으로 궁(窮)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스포츠의 예를 들어보자

야구에는 만루작전이라는 것이 있다. 1루, 2루, 3루 모든 베이스에 주자가 나가 있는 것인데, 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작전중 하나다. 어쩌면 벼랑 끝 전술이라 할 수 있다. 수비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욱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내야, 외야 할 것 없이 타자의 타구가 자신을 향하게 될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는 갖가지 상황을 복기하면서 게임에 집중하게 된다. 안타 한 방이면 적어도 2점은 각오해야 하는 만큼 투수는 물론 수비진 모두 긴장할 수밖에 없다. 자칫 대량 실점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사뭇 더 긴장하게 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자의 경우도 부담감이 가중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점수를 낼 수 있는 타격을 생각하면서 타석에 서지만 상대팀 투수가 어떤 공을 던질지 모르는 변수가 있다. 더욱더 집중하면서 일구일구 신중하게 던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적시에 안타가 터지면 영웅 같은 기분을 느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웃이라도 되는 날이면, 그것도 더블플레이를 당하는 타구를 날리기라도 하면 졸지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그래서 타자도 투수도 팽팽한 긴장의 양끝을 붙잡고 한치의 양보도 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집중하기 시작하면 결국엔 몰입이 일어난다.

궁(窮) 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부정에 기인하든 긍정에 기인하든 변(變)화를 부르는 단초가 된다

궁(窮)의 끝은 기존의 것을 부시거나 무너트린다. 그래야 새로이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왕조의 부패가 극에 달하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왕조를 갈망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변화를 대하는 기업의 안이함은 새로운 경쟁자의 칼을 피하지 못한 까닭에 도태의 수순을 재촉받는다


시대의 흐름도 마찬가지다.

컴퓨터와 인터넷에 기반한 지식혁명의 시대인 3차 산업혁명도 지능정보기술로 대변되는 4차 산업의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다.왕조, 기업의 몰락은 안이함이라는 부정적 상황에 기인하였지만 1.2.3.4차로 대변되는 산업혁명은 보다 나은 삶을 갈구하는 인간의 지적 탐구 욕심이 시대가 수용할 수 없는 극에 다다르면서 발생하는 것이다. 역시 궁(窮)이다


개인의 능력은 다를까?

그렇지 않다. “왕년에” 타령에 익숙한 사람은 이미 지난 시대의 향수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사람이다. 이미 오래전에 시대의 버림을 당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지난날의 상식이 지금도 통용되는 상식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지나온 경험 값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백과사전 같은 모범답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기에 항시 열린 사고를 갖고 있지 못하면 시대의 주류가 되지 못하고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에 맞는 역할을 갖기 위해 고민하면서 준비한 경우는 변(變) 화의 열차에 탑승하여 그다음을 기약할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변(變)화의 칼날에 베이거나 강제로 끌려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즉 궁(窮)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당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극에 달하면 변화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상관없다.

그렇다면 우린 읽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극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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