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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범 Jul 16. 2019

#92. 친구와 적은 한 끗 차이

frenemy = friend + enemy

시진핑이 미국을 방문했을 (2012년), 미국 언론들은 중국을 “프레너미”로 표현했다. 이는 친구이면서 또 한 편으로는 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조어로, “여자의 적은 여자다”, “영원한 아군도 없지만 영원한 적도 없다”는 표현과 그 맥을 같이한다.


서울대 경제학 교수를 역임한 송병락 교수는 그의 저서 <전략의 신>에서 프레너미를 이렇게 적었다.


“대부분의 싸움은 동종 간에 이루어진다. 개미는 개미들끼리, 사자는 사자들끼리, 개는 개들끼리 싸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중학생은 중학생끼리, 노숙자는 노숙자끼리 싸우게 된다. 이는 주위 사람이 적이 되기 쉽다는 말도 된다. 주위 사람이 동료이면서 언제든 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해관계가 겹칠 때 더욱 적이 되기 쉽다는 말이다”


이는 협력과 대립의 반복을 뜻한다. 서로의 이익이 필요할 땐 전략적 협력을 택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과 동일한 것 또는 그 이상을 취하려는 상대가 나타나면, 목숨을 건 사투도 불사한다. 상대를 제거하거나 밀어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칼을 휘두를 땐 용서와 자비를 생각지 않는다.


문제는 조정될 수 없는 이해관계가 발생할 때이다. 이는 협력할 것인지 대립할 것인지 결정하게 만든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상대를 제압할 것인지, 상대에게 고개를 숙이더라도 강자의 그늘에서 숨 쉴 수 있는 여지를 만들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이 같은 현상은 생명체의 세계에선 법칙과도 같은 일이다.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군사력은 물론 경제력에서 강자의 위치에 있는 국가들은 상대국이 자국의 통제 범위에 들어오지 않거나 반항할 경우,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용하여 저항 국가의 정권을 교체하거나, 자국 사람을 통한 수렴 정치를 구사했다. 즉 자국의 입에 맞는 정권을 세움으로써 자국의 이익에 협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은 강자의 위치에 있는 국가들에 의해 수 없이 자행된 것이 사실이다.


최근 각종 매체를 통해 보도되고 있는 한, 일간 반도체 소재 분쟁의 이면을 보면 섬뜩한 표현이 등장한다. 아베는 한국의 정권을 교체시키기 위해 이번 분쟁을 저질렀다는 시각이 그것이다. 현 정권을 상대로는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도체 소재 분쟁을 시작으로 한국 내 자중지란을 만들고 그 여파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는 일본 극우파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순 없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본은 한국을 친구가 아니라 적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극단적 선택도 불사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의 역사를 보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반도를 침략했던 사례가 넘쳐난다. 크고 작았던 수 없이 많은 도발은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을 뿐 아니라, 헌법을 개정하여 전쟁할 수 있는 국가를 천명하고 있기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기 어렵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들에겐 뼈 속 깊이 한국민에 대한 열등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겉으론 한국을 하대 하듯 무시하면서 속으론 한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두려움이 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거꾸로 한국은 왜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먼저 회초리를 들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항상 수비적인 스텐스를 취하는 것이 신중하기 때문일까? 국내에선 치고받고, 욕설은 물론이고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여든 야든 정권을 잡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미, 중, , 일과의 대화나 협상은 수세적이고, 여, 야는 합심하여 난국을 타개하기보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 옛날 당파 싸움을 연상시키는 책임공방부터 시작하는 이유가 뭘까? 오늘의 그들 강대국이기 때문에 사대주의적 사고를 유지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대한민국 정치세력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과거의 역사를 보더라도 서로의 이익을 공평히 주고받을 수 있을 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 쏠림이 발생하면 어제의 친구도 오늘의 적으로 돌변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우매한 질문을 하고 싶다. 우리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을까? 거꾸로 그들은 대한민국을 친구로 인식하고 있을까? 자국의 이익에 따라 앞에선 웃고 뒤에선 총을 겨누고 있는 합종연행은, 옛날 중국의 소진과 장의를 무색게 할 만큼 하나도 변함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은 시각일 게다.

우스개 소리로 이 글을 맺을까 한다.

일본은 “하이”라는 말과 함께 연신 허리를 굽히며 인사한다. 몇 번째 허리 굽힘이 진심일까? 아니  인사에 진심이 담겨 있기는 할까? G20에서 아베는 의장국의 수장으로 만천하에 공정한 자유무역을 외쳤다. 그런데 잉크도 마르기 전에 한국을 상대로 무역 보복을 자행하는 뻔뻔한 민낯을 보면서, 세계는 현재의 일본을 신뢰할 수 있을까? 왜 이런 편협한 생각이 꼬리 물 듯 일어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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