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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범 Jul 23. 2019

#93. 좋아요

“좋아요”

얼마 전 페북 친구 중 한 분이, 친하게 지내던 사람의 조문을 다녀온 후 자신의 심정을 피력한 글을 읽었다.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페북을 터치하는 순간 ‘아뿔싸’ 좋아요 버튼이 눌려진 것이다. 사실은 위로의 댓글을 올리려던 것이었는데… 순간 얼마나 당황했는지… ‘좋아요’ 버튼을 지우고 싶어도지워지지 않는 페북을 원망하며 위로의 댓글을 올렸지만 결례를 범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던 경험이 있다.


“SNS”

‘Social Network Service’의 약자로, 인터넷을 통해 서로의 생각이나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해 주는 서비스를 말한다. 좋은 점은 다양한 경험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시간,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서로의 생각이나 정보를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사회적 관계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 정보가 악의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도용되거나, 거짓 정보, 사실과 다른 소문들이 양산 유포되는 치명적 위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은 SNS 관계망을 통해 자신의 일상은 물론 일과 관련한 갖가지 정보, 그리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들을 연결하고 나누는 공간으로 활용하는데 더없이 좋은 경험을 선사한다.


SNS를 하다 보면 페친의 친구가 필자의 친구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 보니 ‘좋아요’ 또는 댓글에 눈길이 가곤 한다. 어떤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는지, 또 어떤 댓글을 다는지, 댓글은 장문인지, 단문인지, 글을 올린 사람의 글을 잘 이해하고 쓴 댓글인지, 형식적인 걷치레 댓글인지… 심지어는 영향력이 있거나 사회적 관계가 있는 사람에게만 댓글을 다는 사람인지, 아닌지,… 본의 아니게 댓글의 여러 가지 패턴이 읽히기 시작한다.


<좋아요>가 많거나 <긍정적 댓글>이 많아지면 왠지 모를 즐거움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꼭 그런 것을 기대하고 올리는 것은 아니지만 한 편으론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정할 수도 없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글이나 그림을 올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에른스트 게마허 교수(Eranst Genhmacher)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최소 4명에서 12명 이하의 가족이나 친구들 사이에서, ‘전폭적 신뢰’, ‘든든한 도움’을 받을 때 사회적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최소 15명 이상의 잘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 사회적 조직 안에서 친밀하고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할 때, 강한 소속감을 느낀다. 이를 최적의 사회적 자산(optimal social capital)이라 한다”


현대인은 과거에 비해 더 많은 외로움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과거를 살아보지 않아서 답은 알 수 없지만 상상만으로 해보는 추측이다. 속도의 시대가 되다 보니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정보를 나누지 않으면 스스로 고립되거나 사회적 관계 형성에서 뒤처진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무엇을(?) SNS를 통해  분출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자신의 욕망이거나 자랑일 수도 있지만, 간절함이나 순수함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자신의 존재감을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으로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바람이 있다면 개인의 생각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SNS에 올라온 글이나 그림이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과 다를 수 있음에도 이를 “틀린 것”으로 규정하여 질책하거나, 정도를 넘어선 욕설적 댓글을 단다면 이는 SNS 가 추구하는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SNS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일 게다. 댓글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주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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