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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범 Sep 06. 2019

#53. 멍청하게 퇴직하지 않기

지금은 도끼의 날을 세워야 할 때

"내 주위에 있는 50대 중반의 사람들의 70%는 지금 건달이 되었다. 나는 공부 못해서 지방대학 다녔지만 친구들은 공부 잘해서 소위 sky라는 명문대에 들어갔다. 스카이 나왔으니까 대기업과 큰 조직에 들어가는 것도 쉬웠는데 30년 가까이 월급쟁이 생활하다가 직장 그만두고 나오니 아무것도 할 일 없는 건달이 된 것이다. 조직이라는 울타리 밖에 나오니까 연못 밖 맨땅에 던져진 붕어 신세가 되었다. 이들에겐 두려움과 번민이 물밀듯 몰려온다. 직장과 조직이라는 것이 족쇄도 되지만 울타리도 된다. 조직 안에 있을 때는 그토록 자유를 옥죄는 쇠사슬이더니만, 막상 나오면 엄청나게 그리운 울타리로 여겨진다. 중년 건달의 심리상태는 족쇄가 사라진 게 아니라 울타리가 사라진 것이다"
-『조용헌의 인생 독법』中에서 -


예전에 서울의 4대 깡패 학교로 이름이 높았던 J고교가 있었다. 필자도 J고교와 더불어 4대 깡패 학교 중 하나인  K고교 재단의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심심치 않게 J고교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엔 삥을 뜯는 주먹들이 많았다. 하루는 J 고교생들에게 주먹들이 삥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J고교 하나가 난데없이 "J등학교 나와라" 하고 크게 소리쳤다. 소리치기 무섭게 어디서 나타났는지 순식간에 J고교생들이 떼거지로 몰려나오는 통에, 주먹들이 겁을 먹고 도망 같다는 이야기다.  

물론 직접 보지 않아서 사실 여부는 가릴 수 없지만, 주먹으로 서울에 있는 고교를 평정한 학교라 그런지 J고교 동문들은 삥 뜯길 일이 없겠구나 싶었다.

깡패 학교라는 오명을 쓴 학교에 다닐 때는 타인의 눈초리를 받는 게 싫지 않았을까. 공부는 안 하고 쌈질만 한다는 족쇄 같은 인식의 꼬리표가 붙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주먹 동문들이 든든한 울타리가 된다는 사실에 으쓱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당시의 4대 깡패 학교들이 서울 대학을 가장 많이 합격시키는 명문 고등학교로 변한 걸 보면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본업이 강사인지라 교육 관계자들과 식사할 기회가 많다. 하루는 선배 기업 강사로 활동 중인 ○○○ 대표와 식사를 하면서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 대기업 임원으로 퇴직하는 사람들이 문제예요
[필자]네~, 왜요
[○○○] 어깨의 힘을 빼고 나와야 하는데, 힘을 잔뜩 넣은 채 뺄 생각을 안 해요. 그러니 사회 적응이 쉽지 않죠.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많아요. 임원 되면 자가용 나오죠, 비서 있죠, 판공비 빵빵하죠. 얼마나 좋아요. 근데 그게 문제예요. 임원 놀이하느라, 그다음을 준비하지 못해요. 이 선생도 잘 알겠지만 임원이란 직책이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르잖아요. 퇴직 초반엔 시간이 많으니까 해외여행도 다니면서 그럭저럭 보내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요. 한 석 달쯤 지나면 사람이 멍해지죠"


하던 말을 잠시 멈추더니 물을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못다 한 말이 있는지 내게  던지듯 한마디 한다.


[○○○] 이 선생
[필자]
[○○○] 현직에 있을 때 준비하세요. 막상 나오면 망막합니다. 지금이 최적기예요. 그러니 마음 독하게 먹고 준비하세요"
[필자] 네,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다 하다 안되면 우리 사무실로 오세요. 저랑 같이합시다. 어차피 우린 강사 아닙니까"


2022년, 필자가 퇴직하는 해다. 프리랜서 강사로 뛸 생각이지만 의욕 만으론 어렵다.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언덕이 필요하다. 강사 직군도 부익부 빈익분이 뚜렷하다. 경기가 나빠지면 기업은 교육예산도 깎는다. 외부 강사를 내부 강사로 교체하는 일도 빈번하다. 설자리는 줄어들고 강사들은 넘쳐난다.


"퇴직 후, 지금 몸담고 있는 조직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을까?"


지금은 걱정하지 말라는 신호만 잡힌다. 이미 검증된 상태인데 무슨 걱정이냐고 되레 책망을 듣는다. 고마운 일이지만, 내일은 누구도 약속해 줄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쓸모 있는 새로운 도끼를 만드는 것이다. 사용했던 도끼의 날을 정교하게 다듬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다. 준비 없는 퇴직은 건달 소리를 듣는 꼰데의 지름길이다. 조직 내 같은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동년배가 없어서 외롭긴 하지만 그게 현실인 것을 어쩌랴. 오늘도 내일을 위한 콘텐츠를 다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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