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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범 Apr 23. 2020

#113.  인생 후반, 삶의 지도를 바꾼 작가 도전기

저는 말쟁이입니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글 쓰는 재미에 푹 빠져 삽니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했던가요?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면서 인생 후반부 삶의 지도가 달라지기 시작했거든요.


글 쓰기엔 관심도 없었습니다.

2015년까지 글 쓰기 경험이라고 해봐야 교내 백일장, 연애편지, 방학숙제로 써야 했던 일기가 전부였을 만큼, 글 쓰기는 제 삶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지만 자칭 시인이었던 시절은 있었습니다. 연애편지를 쓸 때만큼은 누구나 시인이 되지 않나요? 저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이 콩 밭에 가 있어서 그런지, 되지도 않는 예쁜 말을 요리조리 조합했던 기억이 납니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편지 봉투도 직접 만들어 보낼 만큼 순수했다고 말하면 이상할까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의 극치가 따로 없을 만큼 웃음 지을 일이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물여덟, 결혼과 함께 어설픈 시인 노릇을 끝냈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글 쓰고 싶은 마음조차 갖지 못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6형제의 맏이로서 가정을 꾸리고, 홀 아버지와 여동생을 건사하면서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때문에 앞 만 보고 직진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가장의 책임을 다하던 중년의 어느 날, 매우 중요한 선택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임금 피크를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퇴직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었죠. 제가 근무하는 곳엔 임금피크 경험자가 없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제가 최초가 된 거죠. 사내엔 상의할 사람도 없고, 다음 대상자는 7년 후에 해당하기 때문에, 실질적 고민을 주고받을 만한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결국은 아내의 뜻대로 임금 피크제를 수용했습니다. 인사 총무 담당자가 내민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오는데,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이십여 년 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프리를 선언하는 게 옳은 선택 아닐까? 도장을 찍고도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오락가락 갈팡질팡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제게 그런 말을 하더군요. 남은 5년은 콘텐츠를 가다듬고 인맥을 확대하면서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이죠. 뻔한 이야기지만 뻔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한 가지 미션을 주더군요.


“잘 헤어지는 방법을 고민해 보세요. 시작보다 끝이 좋아야 하니까, 그래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잖아요”



2016년 초 가을 어느 날, 평소처럼 브런치에 올라온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눈길을 붙잡는 문장이 보이더군요. 브런치 작가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날따라 무슨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쉽게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브런치에서 작가의 꿈을 펼치실 분들은 언제든 작가로 지원해 주세요”

 

이 문장은 제 시선을 붙들고 쉽게 놓아줄 마음이 없었나 봅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만큼 묘한 느낌을 자극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제 인생의 변곡점이 된 선택 문장을 만난 셈이죠.


"나도 작가가 될 수 있을까?"

"글쓰기는 배운 적도 없는데 작가라는 이름표를 소유할 수 있을까?"


평소 같으면 어림 반푼 어치도 없을 일인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작가도 아니면서 이미 김칫국 한 모금쯤 마신 상태였으니까요. 왜 그랬는지 지금도 이해할 순 없지만, 제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이 요구된 순간인 것은 분명합니다. 결국엔 브런치가 안내한 데로 따라갔습니다. 누가 보아도 무모한 도전이지만 당시엔 돌파구가 필요했던 상황이었거든요. 브런치 작가가 된다면 조금 더 의미 있는 퇴직이 가능하지 않을까? 막연하지만 그런 생각이 저를 행동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막상 결정하고 나니까 마음이 급해지더군요. 어떤 글을 쓰면 좋을까, 고민하는 시간도 길어졌습니다. 장고란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지만 고민 끝에 노년에 관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제법 나이도 있고, 또 은퇴 준비를 하고 있는 만큼 조금 더 진솔한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오랜 시간을 투여해서 쓴 첫 글을 브런치 팀에 보냈습니다. 5일 이내에 회신을 준다고 한 탓인지 매일같이 메일함을 열었던 것 같습니다. 며칠 후, 기다리던 메일 한 통이 도착했습니다. 무슨 비밀 상자를 여는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리데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 후 조심스럽게 메일을 열었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여러분도 예측하셨겠지만 브런치 작가로 모실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니까요.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많은 건 알지만, 그래도 기회의 여신이 내게 와 주길 기대했거든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그런 게 바로 도둑 심보라고 말이죠.

인생은 삼세판이라는 말도 있는데 달랑 한 번으로 끝낼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글을 보냈죠. 브런치 작가들의 글을 보면서 분석한 것을 토대로, 1차 때 보다 많은 시간을 투여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글에 대한 애착심도 컸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두 번째 답장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약간의 기대를 안고 메일을 열었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진다죠, 그날은 그랬습니다. 멍해지면서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허탈했습니다


“이게 아닌가?”, “그렇지, 나는 글 쓰기엔 소질이 없는 거지?” ,


자책과 갈등이 이어지는 동안 계속해야 하나 멈춰야 하나, 하루에도 수차례씩 엎었다가 뒤 집기를 반복했습니다. 이쯤에서 접기엔 좀 그렇고, 계속하자니 자신감은 바닥이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교차하던 어느 날, 스치는 생각 하나를 붙잡았습니다.


"그래 이 참에 실험이라도 해보자. 몇 번이나 떨어지면 작가가 될 수 있는지"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좋은 생각을 붙잡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바로 글을 보냈습니다. 오기 때문인지 글 쓰는 속도도 빨라졌죠. 그렇게 떨어지길 반복하던 어느 날, 드디어 기다리던 메일 한 통이 도착했습니다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싶더군요. 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은 나를 두고 한 말인가 싶을 만큼 설렜습니다. 신기한 일이기도 했고요. 그때부터 약 4년에 걸쳐 10개의 매거진을 통해 400여 편의 글을 발행했습니다. 졸필이긴 하지만 브런치 덕분에 부크크(POD 출판)에서 2권, 사내에서 1권의 책에 저자로 등재될 수 있었습니다.

개똥철학인지 모르지만 떨어질 바엔 많이 떨어지는 것이 울림 있는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자기 합리화 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브런치 작가가 될 때까지 도전하자고 마음먹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되었던 것 같습니다(5전 6기) 한 편으론 좋았지만 또 한 편으론 섭섭한 마음도 있었어요. 더 이상 도전할 수 없으니까요. 아마도 브런치 작가를 희망하는 분들이 이 글을 본다면 끌끌 혀를 찰 지도 모르겠습니다.



EBS <나도 작가다> 공모전을 통해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두드림의 가치>입니다. 누구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되면 빨리 이루어지길 기대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저처럼 김칫국을 마신다고 할까요. 창피한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갈 땐 연합고사를 거쳐야 했습니다. 대학처럼 원서를 쓰고 시험을 보아야 했죠. 상업 고등학고를 지망했는데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좋은 학교가 아니어서 무난히 합격할 걸로 생각했거든요. 대입 재수도 아니고 고입 재수를 해야 할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하늘이 노랗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 알았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었죠. 친구들은 교복 입고 학교에 갈 판인데 저는 고입 재수를 해야 하니 부모님께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외통에 걸린 쥐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망연자실하고 있던 어느 날, 성남에 소재한 모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저에겐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이 보다 기쁜 소식은 없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원서를 썼습니다. 전국에서  공고, 상고를 지원했다가 떨어진 학생들이 대거 몰리면서 경쟁률이 높아졌지만 운 좋게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떤 시험이 되었건 한 번에 합격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대입도 그렇고 사회생활 중에 자격증을 따는 것도 마찬가지였죠. 적어도 2016년까지는 그랬습니다. 시험을 볼 때면 주눅이 들고 한 번엔 안된다는 생각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으니까요. 브런치 작가가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였고요.


세상엔 실패자를 시상대에 세우는 법이 없지만, 실패의 경험은 시상대에 설 수 있는 보약 같은 역할을 합니다. 브런치와의 인연을 계기로 사외 출판 욕심이 생기더군요. 물론 자비 부담이라면 얼마든지 출판할 수 있는 길이 많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출판사를 검색한 후 원고를 보내기 시작했죠. 하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습니다. 역시 출판사의 문턱은 높았습니다. 한 번은 출판사로 보내야 할 원고를 작가에게 보낸 적도 있습니다. 출판사 메일인지, 작가 메일인지 구분도 못 하고 보냈다면 말 다한 거죠. 이런 걸 허당이라고 하지 않나요? 다행히 그 작가님이 회신을 주셨습니다. 출판사로 보내야 한다고 말이죠. 작가님의 회신이 없었다면 저는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다고 믿었을 겁니다. 회신도 안 해주는 출판사라고 투덜 되면서 말이죠.

아직 시중 서점 가판대에 오른 책은 없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닌 거겠죠. 하지만 그런 날은 반드시 올 거라고 믿습니다. 누군가의 눈에 긍정적으로 들키는 그날 말입니다.


두 번째는 앞서 살짝 언급한 <들킴의 가치>입니다.

KAC 코칭 교육을 받으면서 몇 번 뵈었던 분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코칭 교육이 끝나고 서너 달 동안 뵌 적이 없었는데 느닷없이 전화를 주신 겁니다. 오랜만이라 반갑기도 하고, 워낙 경쾌한 성격을 가진 분이라서 그런지 기억 속에 남는 분이었거든요.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 간 끝에 제가 발행한 브런치 글을 잘 보고 있다면서, 경제지에 칼럼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묻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찌나 떨리던지 또 김치 국물 한 사발을 들이마시고 말았습니다. 이미 칼럼니스트가 된 것처럼 말이죠. 절차를 물었더니 어떤 교육이 있는데, 교육 이수 후 선별해서 칼럼니스트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거였어요. 물론 글을 못 쓰면 안 되는 거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마 약속했죠. 마침 필요한 교육이기도 했고요. 저는 코치님과 함께 교육을 이수했고, 약속대로 경제지에 샘플 글을 보냈습니다. 심사가 필요하니까요. 다행히 몇 차례 교정을 거치면서 유명 경제지에 <이종범의 제3의 나이>라는 주제로 약 50편 넘게 노년의 삶에 대한 칼럼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보통은 말로 하지만 예술가들은 조금 다르죠. 작곡가는 음표로, 성악가는 노래로, 미술가는 그림으로, 작가는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합니다. 저는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내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내용을 독자들과 공유했습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였던 이야기 속에서 코치님이 저의 바람이 무엇인지 발견하신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긍정적 들킴이 일어난 거죠.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코치 교육에서 세 번 정도 뵌 게 전부인 상황에서, 제 글을 읽어 준 것도 고마운데, 글 속에서 저의 바람을 알아채고 다리를 놓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또 다른 경제지에 칼럼을 쓸 수 있는 기회로 이어졌습니다. 글 쓰기의 확장이 일어난 거죠. 인터넷 신문사 대표님의 도움으로 한국경제 <이종범의 셀프 리더십>이란 칼럼을 쓰게 되었고, 지금까지 약 30여 편의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정말 고마운 것은 그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말 그대로 선한 영향력의 수혜를 입었다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감사한 일이 또 있을까요?


브런치에서 긍정적 들킴이 없었다면 아마추어긴 하지만 언감생심 칼럼니스트가 되는 수순을 밟지 못했을 겁니다. 세상엔 독불장군이 없는 것처럼, 혼자 고민하면서 해결하려 했다면 여기까지 오는 길은 더없이 험난했을 겁니다. 중도에 포기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브런치에 실린 글은 살아서 꿈틀거렸고, 코치님의 마음이 움직이면서 칼럼을 쓸 수 있는 기회의 문이 열린 것처럼, 간절한 마음을 들키면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린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기다림의 문제긴 하지만 제 마음을 알아주는 분이 나타날 테니까요


2022년에 퇴직합니다. 횟수로 약 3년의 시간이 남았습니다. 지난 4년간의 글 쓰기는 나를 발견하는데 더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브런치는 제 인생에 주어진 시간의 선물과도 같습니다. 이젠 글 쓰기를 통해 회사 밖에 있는 독자들과 튼튼하게 연결된 징검다리를 놓고 싶습니다. 늦은 나이에 글 쓰기를 시작했지만 “글 쓰면서 여행하는 산업 강사”의 꿈을 구체화하는 중이거든요. 브런치 작가를 시작으로 유명 경제지 두 곳과 보험 관련 신문사에 칼럼을 연재할 수 있었던 것도, 졸필이지만 몇 권의 책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인터넷 신문사에서 노년 전문기자로 활동하는 일도, 따지고 보면 <두드림>을 대하는 인식과 <들킴>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든 쉬운 일은 없습니다.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그것이 무엇이든 저지르지 않으면 어떤 기회도 잡지 못한 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크고 작음을 떠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채야 합니다. 그런 다음 널리 알려야겠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더 나은 내일을 상상한다면, 말 그대로 허상을 쫓고 있는 것 아닐까요?


"EBS <나도 작가다> 공모전에서 작가님을 기다립니다"


저는 오늘 또 하나의 도전을 시작합니다. 4년 전 브런치 작가의 문을 두드리게 만들었던 그 문장을 다시 접한 것 같아서요. 그때처럼 수많은 브런치 작가님들이 공모하겠죠. 다양한 경험적 감동으로 채워질 도전기가, 코로나 19로 신음하는 국민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다가왔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하지만 이 글이 누군가의 삶에 희망이 되는 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제가 희망하는 삶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으면 몰입하게 되고, 마음이 없으면 방황하게 되는 것처럼, 이 글을 쓰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몰입했거든요. 덤으로 내 안의 만다라트에 간직 중인 한 가지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나도 작가다> 공모전 글을 쓰는 내내 심장이 벌렁거리네요. 마치 중요한 시험을 치르는 사람처럼 말이죠. 이번 공모전이 지난날 경험했던 안 좋은 트라우마의 연장 일지, 브런치 작가처럼, 칼럼니스트가 될 때처럼, 새로운 기회의 시작일지 알 순 없지만, 공모전에 임하는 브런치 작가들과 아래 글에 적은 제 마음을 나누면서 새로운 기회를 꿈꾸렵니다.


“절박함에 기인한 힘을 끌어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천 길 낭떠러지에 매달린 것과, 상상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요불굴의 의지로 난관을 극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의 공통점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가는 사람들이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는 인디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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