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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범 May 14. 2020

#114. 잠시 멈춰 서서

알라딘에 자주 간다.

새 책 보다 헌 책이 좋아진 때문이다. 반 값으로 구입할 수 있는 건 덤이다. 약간 누렇게 변색된 종이도 그렇고, 깨끗하진 않지만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던 흔적도 그렇고, 어린 시절 청계천 책방을 뒤지던 기억이 소환되는 기분이다. 그동안 떠나보냈던 익숙함을 다시 되찾는다고 할까, 요즘은 법정 스님의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를 통해 허했던 마음에 위로가 채워진다


어제저녁 퇴근길.

잠실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8호선 전철역 지하 통로에 있는 알라딘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기분처럼 약간의 설렘이 있다. 그 이유는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 때문이다.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잘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많아진다. 제목도 예사롭지 않다. 더군다나 지은이가 법정 스님이라 더 끌리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내 속에 묻힌 어떤 생각을 자극하게 될지 사뭇 궁금하다. 무엇보다 그분의 통찰을 접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알라딘에 들어섰다. 책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검색 컴퓨터로 직행, A열 72를 확인했다. 6권의 책이 있었다. 같은 책이지만 출간 연도와 책 상태에 따라 5,000원에서 6,900원까지 가격이 다양했다. 그중에서 108쇄 본으로 2009년 10월 28일 출간된 책을 선택했다.

귀한 책을 얻었다는 생각 때문일까, 퇴근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남한산성입구까지는 여덟 정거장,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빈자리가 없었다. 선채로 복정역에 도착했다. 환승역이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많다. 다행히 빈자리가 생겨서 앉을 수 있었다. 남한산성입구까지는 이제 두 정거장, 가방에 넣어둔 <아름다운 마무리>를 꺼냈다. 마음이 급한 탓이다. 표지를 넘기자마자 프롤로그 앞 간지 하단에 쓰인 글이 눈에 들어왔다. 단 두 정거장을 가면서 이 문장만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행복할 때는 행복에 매달리지 말라, 불행할 때는 피하려 하지 말고 받아들이라.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바라보라.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라”


남한산성 입구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아름다운 마무리> 단 하나의 문장을 읽었을 뿐인데…

근자에 들어선 내 마음이 어떻게 흐르는지 집중하는 시간이 유독 많아졌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어도 마음을 살피는 문장을 만나면 쉽게 넘어가지 못한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가듯 말이다




“아빠 뽀돌이는 내 거야”


우리 가족들과 15년간 함께 살고 있는 푸들 강아지를 보면서 딸아이가 하는 말이다. 어제저녁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 뽀돌이를 보면서 질투가 난 모양이다. 스물여덟이나 된 녀석이 강아지를 질투하는 게 재미있어서 몇 마디 물었다.


[나] 뽀돌이가 그렇게 좋으니

[딸] 그럼, 얘랑 있으면 마음도 편하고, 잠도 잘 와

[나] 근데, 잠 잘 때도 그렇고, TV 볼 때도 그렇고 항상 아빠 곁에 앉는 이유가 뭘까?

[딸] 그거야, 아빠가 자꾸 밥을 주니까 그렇지, 우리가 먹는 음식 자꾸 주면 안 돼, 특히 고기

[나] 예들도 먹고살아야지, 우리만 맛난 거 먹으면 되냐? 예들도 가족인데

[딸] 가족이니까 그렇지, 오래오래 같이 살려면, 우리가 먹는 음식 주면 안 돼, 아빤 그것도 몰라


역시 동물병원 수간호사다운 말이다. 뽀돌이와 미소를 보면 측은지심이 발동한다. 말 못 하는 강아지로 태어났다는 것도 그렇고, 사료 말고 맛있는 음식이 즐비한 상황에서 아이들 눈망울을 외면한 채 맛있는 음식을 먹는 내 마음이 불편해서 그런지, 딸아이 모르게 맛 난 음식을 한두 점씩 주곤 한다. 특히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뽀돌이를 대할 때면 애틋한 마음이 더 커진다. 그런 마음을 몰라주는 딸아이가 야속할 때도 있지만 뽀돌이와 미소를 사랑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다른 것엔 이견이 없다.


“이제 됐다. 그만 하면 됐다. 이제 당신에겐 오로지 당신 자신만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돌아가서 자신과 접촉하고, 스스로 어떤 감정 상태에 빠져 있는지 눈여겨볼 일이다. 몸의 속도를 늦추고, 오직 몸이 해 달라는 대로 다 들어주라”

-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상실 수업』 중에서 -


삶의 순간순간을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라는 것도, 스스로 어떤 감정 상태에 빠져 있는지 눈 겨 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지금 내 마음이 어떻게 흐르는지 살펴보라는 것일 게다.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산다면 주인을 잃어버린 육체 껍데기를 데리고 사는 것과 같지 않은가. 새삼 나이 듦이 느껴진다면 잠시 멈춰 서서 숨 고르는 시간을 가져보자. 인생 후반전을 아름답게 살 수 있는 쉼이 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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