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은 늘 부족한 것 같다. 갖고 있어도 또 갖고 싶고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옷에 대한 욕망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생각해보면 학생 때인 것 같다.
난 학생 때 교복을 입어서 굳이 사복이 필요하진 않았지만 그 당시 갖고 싶던 티셔츠가 있었다.
당시 지마켓에서 팔던 평범한 티셔츠였는데 디자인은 생각나지 않지만 빨간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엄마에게 사달라고 하자 거절당했다. 20살이 되면 취향도 바뀔 거고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으니 구입하지 말라는 이유였다.
너무 맞는 말이라 수긍했지만 지금 내 옷장 속에 빨간색 맨투맨이 있는 걸로 보아 취향의 큰 틀은 변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20살.
학생 때 자주 듣던 마법의 단어.
"20살만 되면.."
그렇게 20살이 됐다.
자, 그렇다면 20살이 되고 갖고 싶은 옷을 맘껏 살 수 있었느냐 하면 아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터무니없이 좁은 옷장이 주어졌다.
4인실이었고 2층 침대가 들어오고 책상까지 있으니 옷장의 크기가 그만큼 밖에 안 나왔겠지만 목욕탕 캐비닛 크기의 옷장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작은 사이즈지만 그 당시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 옷장은 여유 있었다.
룸메이트들의 옷장은 미어터졌지만.
20살만 되면 옷을 마음껏 살 수 있고, 채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텅 비어있었다.
왜일까?
돈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옷은 많이 갖고 싶은데 돈은 없으니까 싸구려 옷들을 사들였고 세탁 후 줄어들어 못 입게 되거나 몇 번 입으니 보풀이 일어나 못 입는 등
그렇게 구매한 옷들은 한 계절을 이기지도 못하고 떠나갔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직 어리고 돈도 없으니 좋은 퀄리티의 옷을 사기 힘든 거고 나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선 이런 시행착오쯤은 겪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친구의 기숙사에 놀러 가 그녀의 옷장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여러 가지 컬러의 다양한 디자인의 옷이 미어터지던 친구의 옷장을 보고 결심했다.
나도 이렇게 되리라..
그 후 돈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바로 옷을 샀다.
여러 가지 옷들을 구입했다. 내가 절대 생각해보지 않던 컬러, 디자인의 옷들도 저렴한 가격이면 무조건 샀고 가격대가 조금 나가면 지금 이 나이에 입어보지 언제 입어보겠어?라는 합리화를 하며 구입했다.
그런 과정에서 내가 좋아하는 컬러이나 나에게 절대 안 어울리는 컬러도 알게 되고 내 취향의 컬러는 아닌데 어울리는 컬러를 알아가기도 했다.
학생 땐 아무 생각 없이 샀던 옷들이 나이가 들면서 꼭 갖고 있어야 할 옷, 격식을 차릴 때 입을 옷, 일하는 환경에 따라 입는 옷들의 디자인들이 변하기 시작했고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손이 자주 가는 아이템, 좋아하는 디자인의 옷들이 확고해졌다.
점점 나만의 스타일이 생기면서 옷장에 옷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러니까 내게 옷은 내가 갖고 싶은 나의 스타일 즉 나의 정체성이었다.
나를 대변해주는 내가 나라는 사람을 소개하기 전에 가장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자기소개인 거다.
많은 옷이 필요했던 건 내 내면이 텅 비었기에 눈에 보이는 거로 메꾸려 했던 것이었고
나쁜 소비를 되풀이한 것 = 외로운 내 마음을 채울 방법을 몰랐던 것이었다.
뭐라도 사서 집에 가져와서 옷장에 채워 넣으면 그 행위만으로도 내 내면도 채워질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음을 안다.
의미 없는 소비보단 차라리 맛있는 한 끼를 먹거나 소중한 사람들과 차를 한잔 마시는 게 더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된 거다.
그래서 지금 옷장에 옷은 많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해본다면
답변은 그렇다.
오랜 시간 시행착오도 겪고 고집한 부분들도 있는 나의 기록으로 옷들은 내 옷장에 남아 20살의 내 옷장에 비하면 미어터질 정도로 옷들이 많다.
이젠 나에게 맞는 스타일이 점점 확고해지다 보니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들에 무리해서 손을 대지 않고 어떤 아이템을 사야 하는지도 알게 됐다.
옷장 앞에서 그날의 착장을 고민하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나에게 어울리는 아이템들이 있는 옷장이라 손에 잡히는 대로 입어도 어색하지 않다.
20살의 내가 지금의 내 옷장을 보면 무슨 말을 할까
갑자기 20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썩 부러워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를 돌이켜보고 한 해가 끝나가는 지금 이 시점에서 올해를 돌아보면 아쉬운 부분들도 있지만 20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부끄럽진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정도면, 내 인생도 나쁘지 않게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