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다시는 내 언어를 잃지 않기로

by 이정은




나는 한 번의 계약 해지와 한번의 계약 파기를 한 적이 있다.


계약 해지는 첫 작품 <다정의 온도> 였다.


당시 출간 경험이 없어 모든 게 불안하고 두려웠던 나는 담당자님을 절대적 존재로 믿고 따랐다.

교정 과정에서 수정을 권하는 부분을 과도하게 수용했고, 그 결과 작품은 누더기가 되었다.


전적으로 내 패착이었다.


리뷰를 취사선택하고 때로 작품의 일관성을 위해 버리기도 해야한다는 걸 알지 못했던 탓이었다.


작품이 출간되고, 독자들의 리뷰를 차근차근 읽어내려 가면서 깨달았다.


내가 무지했다는 걸.


그때는 전문가의 말을 전적으로 따르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이후 나는 첫 작품을 회수하고 다른 출판사와 계약해서 무료연재 플랫폼에서 연재했던 원본 그대로를 살려 재출간했다.


물론 교정 전 초고라고 해서 완벽한 작품은 아니다.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독자님들의 의견이 존재하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을 과도하게 수용한 결과물과, 부족하지만 내 의도대로 출간한 작품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랐다.


내 선택은 오로지 나의 책임이기 때문에 비판도 겸허히 수용할 수 있었다.



*



이후 나는 또 한 번의 계약 파기를 경험하게 된다.


BL에서 현대로맨스로 장르를 변경한 네 번째 작품을 집필하고 있을 때였다.


현대로맨스는 무료연재보다 미공개 런칭작으로 출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출판사 투고는 거를 수 없는 관문이었다.


새로운 장르에서 나는 완벽한 신인이었다.


타 장르에서 출간한 이력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심해서 한곳과 계약했다.

얼마지 않아 담당자가 배정되었고, 피드백을 위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흔쾌히 수락했고, 전화가 걸려 왔다.



*이하 내용은 당시 통화 음성 녹음의 대화를 가능한 그대로 재현했다.


담당자: 저희도 이거 매열무-매일 열시 무료라는 네이버 시리즈 프로모션-가면 좋죠. 갈만한 소재라고도 생각을 하고, 그래서 수정해서 좋게 되면 최대한 프로모션 잘 해보고 싶어요. 다만, 수정 사항이(웃음?) 반영이 됐으면 하는 부분이 있어요.

담당자: 남주 대사 같은 경우에는... 그쵸... 그... 친구랑 대화를 할 때 조금 더 말이 짧았으면 하는 디테일 있잖아요. 요런 종류의 디테일 있잖아요. 남주가 매력적이려고 하면, 아이, 잘 쓰셨는데 심사 통과가 한 번에 되면 좋으니까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담당자: 이건 수치 플레이 아니에요.


나: ...네?


담당자: 들어주세요.


나: 저를 수치 플레이(?) 하신다고요? 무슨 뜻이에요?


담당자는 내 말을 무시하고 작품의 남자주인공 대사를 읽기 시작했다.


담당자: ‘내가 왜 윤설희 걱정을 해. 남의 애를 어떻게 키우든 알게 뭐야. 알아서 잘 살겠지. 몰라 제길.’ 이렇게 하는게 아니라, 사실 이 정도면 ‘알게 뭐야. 제길’ (웃음?) 이렇게.


담당자: 그리고 남주의 주변 환경에 대한 묘사. 네이버 독자들 특성상 개연성에 되게 예민하잖아요? 쓰읍, 그러다 보니까...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될까...


(중략)


담당자: 저희가 피드백을 이렇게 구두로 드리는 것 보다는 문장으로 드리는 게 서로 훨씬 알기 쉬울 것 같아요. 한 수요일, 목요일쯤 정리를 해서.


나: 수요일은 내일이네요?


담당자: 네. 그쵸.


나: 그럼 오늘 전화는 왜 주신 거예요?


담당자: 담당이 바뀌었다. 그리고 즐겁게 읽었으며, 수정은 필수다.

담당자: 캐릭터를 살리실래요? 줄거리를 살리실래요?


담당자: 이거는 솔직히 말씀 드리면 (매열무)탈락 각이긴 해요. 왜냐면 이거 지금 0000(타 플랫폼 언급)...

나: ...올드 하다는 말씀이세요?


담당자: 음... 더, 형태가 세련되야 된다. 라는 느낌이 있어요. 더 공을 들여야된다.



*



이제와 생각해 보면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작가에게 수치플, 수정은 필수다, 줄거리를 살리실래요? 캐릭터를 살리실래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탈락각이다. 라는 말을 하는 무례한 담당자를 난 이전에도 이후에도 만나본 적이 없다.


결론만 말해서 난 계약 해지를 요청했다.


도저히, 말 그대로 저런 수치플을 일삼는 담당자와 잘 해나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 글이 내 글이 아니게 두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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