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모 대기업에서 40년 가까이 근무했습니다. 올해 60대 중후반으로 회사 나온 지도 여러 해가 지났네요. 감사하게도 저는 회사에서 꽤 높은 직급까지 올랐습니다. 요즘 유튜브 보면 대기업 상무 출신들이 나와서 인터뷰 많이 하던데, 저는 그보다 더 높은 직급까지 올라갔지요.
과거에 제가 했던 일은 해외 영업이었습니다. 외국에 있는 기업체를 직접 방문해서 저희 회사가 작업할 오더를 따오는 거였습니다. 그때는 우리나라 경기도 나쁘지 않았고, 대한민국 하면 가격도 저렴하고 작업 품질도 훌륭하다는 평가가 있었던 터라 열심히 뛴 만큼 실적도 좋았습니다.
한마디로 승승장구했다고나 할까요. 워낙 일하기를 즐겼던 저는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을 낙으로 알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창때는 국내에 있는 것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부탄, 파키스탄, 인도 등 그 시절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던 국가들을 수없이 다녔습니다. 다시 돌아봐도 그때가 제 인생 최고의 황금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랬던 저도 회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초겨울 연말에 자연스럽게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지요. 제가 다녔던 회사는 고직급 임원들한테는 사전에 언질을 주었습니다. 며칠 뒤에 임원인사가 있는데 그때 계약해지 대상자라고요. 언뜻 들어보면 배려 같지만 겪어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먼저 아나 나중에 아나 어차피 짐 싸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모두에게 알려지는 그 며칠이 정말 괴로우니까요.
저는 요즘 모 요양원에서 경비로 일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회사 나오자마자 개인 사무실을 내기도 했고, 작은 회사에 컨설팅 이사로 들어가기도 했었는데 결국 요양원에 터를 잡았습니다.
말이 경비지 하는 일은 데스크 안내입니다. 요양원 정직원들이 퇴근하고 난 다음에 정문을 지키는 일이 저의 주된 업무이지요. 오가는 사람들이 뭔가 물어보면 답변해 드리고, 방문자들이 주차 확인해 달라고 하면 도장 찍어드리고, 요양원에서 주문한 물품이 오면 대신 받고, 주로 그런 일들을 합니다.
육체적으로 큰 부담은 없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모든 것을 컴퓨터나 말로 하면 되니까요. 평일 오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주말 오후 1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해서 받는 돈은 월 3백 가까이 됩니다. 아무래도 야간에 근무하는 일이다 보니 일반 최저시급보다는 좀 나은 편입니다.
좋은 점은 밤 10시부터는 제시간이라는 거예요. 그때는 취침해도 된다고 아예 요양원에게 약조를 받았습니다. 여기 어르신들은 다들 일찍 주무시기 때문에 밤에 특별히 할 일이 없어요. 방별로 요양보호사들이 함께 숙식을 하기 때문에 다른 일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거지요. 숙직실을 쓰는 사람도 저밖에 없어서 어떨 때는 제 방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있다가 다음 날 아침 직원들이 출근하면 저는 퇴근을 합니다. 밥은 나가면서 기사 식당에서 국밥 한 그릇으로 때웁니다. 지금은 버젓한 단골이 되었는지 식당 이모님이 가끔씩 저에게만 달걀 프라이를 해주십니다. 제가 심야 근무하는 것을 아신 뒤로는 후하게 상을 차려주시는데,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요.
일하면서 힘든 점은 크게 없습니다. 있다면 가끔 무례한 고객이라고나 할까요. 대부분 보호자분들은 저희 직원들한테 깍듯하게 대하는 편입니다. 함부로 했다가 본인들 부모님들한테 해가 될까 봐 그러는 거겠지요. 그런데 어디를 가나 튀는 사람이 있듯, 요양원에도 갑질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르신들한테 개별적으로 돈을 받고 나라에서도 보조금을 별도로 받을 텐데 케어가 왜 이 모양이냐고 따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르신이 잘못해서 몸에 멍이 난 것을 저희 탓으로 돌리는 거지요. 세심하게 돌보지 않았다거나 더 심하게는 학대를 한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노인분들은 회복력이 빠르지 않아 한번 멍이 들면 오래가는 것을 전적으로 요양원 탓으로 돌리더라고요. 그래서 직원들은 어르신 몸에 멍이라도 들면 곧바로 메모를 해둡니다.
어쨌든 그런 컴플레인이 있으면 저 혼자 있는 시간에는 제가 다 감당해야 합니다. 저는 내용도 모르는데 데스크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총알받이가 되어야 하지요. 혹시 저를 요양원 주인으로 아는 걸까요. 어떤 때는 한 시간 넘게 심한 욕설을 듣기도 합니다. 몇 시간 그러고 나면 진이, 진이, 그렇게 빠질 수가 없습니다.
저는 잡기에 능하지 못합니다. 당구도 못 치고, 골프도 못 치고, 공으로 하는 것은 예전부터 하나도 못 했습니다. 그렇다고 등산이나 낚시를 좋아하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평생 일만 하느라 그런 것에 취미를 붙이지 못했어요. 술도 소주 반 병이면 완전히 정신을 잃고, 그래서인지 퇴직하고 나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네요.
그래서 퇴직 후에도 여전히 밤낮 안 가리고 일만 하다 봅니다. 남들은 이제 좀 쉬라고 하는데, 저는 제가 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달리 쉬는 방법을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분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유튜브 '퇴직학교'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nzu0qyUXoF0?si=tQXzGQyjbecpKQZ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