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직장생활이 3초만에 끝나던 날

나는 그렇게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by 경아로운 생각


며칠 전 모 협력회사 상무님이 내 사무실로 방문을 하였다. 임원인사가 있는 10월 전·후면 임원들은 최대한 행동을 조심한다. 임원인사가 코앞이라 뜻하지 않은 실수에 발목을 잡히게 될까 봐, 또는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임원의 신분으로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생각 없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최대한 몸을 낮춘다.


"상무님, 왜 이렇게 사무실이 깨끗해요? 짐이 하나도 없네" 방문한 협력회사 상무님이 내 사무실에 앉자마자 말하였다. 평소에 농담을 서슴지 않는 사이라 나도 받아쳤다. "전화받으면 10분 안에 가려고요." 덕분에 서로만 아는 웃음을 주고받았다.


오전에 오래전부터 계획된 외부 회의 일정이 있었다. 본부의 모든 임원이 참석하는 자리였다. 집에서 차로 두 시간 가까이라 아침부터 분주히 준비하였다. 때가 때인지 서로를 대하는 표정이 어색하다. 이미 소문으로 누군가는 올해가 마지막이라 하고 누군가는 아직 윗분들이 고민 중이라 한다. 웃고 있어도 웃는 것이 아닌 것 같은, 업무에 대해 회의를 하고 있어도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년도에 진행될 오늘 회의 주제가 과연 이 자리에 있는 몇에게나 해당이 될지 의문이 들었다.


나의 순서가 되어 말을 하는데도 겸연쩍은 생각이 들었다. 각 부서가 발표한 내년 계획에 코멘트를 해주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내가 말하면서도 코미디 같다고 생각되었다. 어차피 내년에 나는 없을 텐데, 어쩌면 모두가 같은 생각일 텐데 정성스럽게 말하는 나나 진지하게 듣는 각 부서장들이나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이야기 내용도 겉돌았다. 별로 열정을 담고 싶지 않았다. 그 와중에 열심히 메모하는 몇몇 부서장들의 모습이 미안하게 느껴졌다.


회의가 끝나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전화가 왔다. 인사팀 번호였다. 순간 직감했다. 오늘이구나. 나구나.

"상무님, 어디세요?"

"저, 모처에서 미팅 중이에요"

"지금 본사로 들어오실 수 있으세요?"

"지금요?"

직감이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회사로 운전하고 있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끝을 예감하고 있었고, 어떻게 반응하리라는 이미지 트레이닝도 수천 번을 했건만 통화를 하는 나의 목소리는 분명 떨고 있었다.


한창 운전하고 있는데 또 전화가 왔다. 가장 가깝게 지내던 동기 상무였다.

"정 상무! 전화받았어?"

"무슨 전화요?"

"인사팀 전화~ 난 받았어~ 나 오늘까지 인가 봐~"

이미 소문으로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알고 있었던 동기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활기찼다. 순간 정신을 차렸다.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된다. 쫄면 안된다. 슬픈 모습 보이면 안 된다. 쿨하게 행동해야 한다.

"저도 받았어요~ 나가라는 건가 보네~ 같이 나가요~ 나가면 되지 뭐~"

애써 씩씩한 척했지만 전화를 끊는 순간 마음은 다시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안내받은 소그룹 회의실에 도착했다. 문을 들어서니 많은 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나를 향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여러 명이 앉아 있었다. 방금 전 통화했던 동기 임원도 눈에 띄었다. 그렇게 올해가 마지막인 임원들은 이 회의에 누가 참석하는지를 열리는 문을 통해 확인하며 다시 뒤집지 못하는 모래시계의 얼마 남지 않은 모래들을 떨구고 있었다.


그 누구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평상시 같으면 이미 여러 주제가 돌았을 상황이었다. 회의실 내 공기가 무거웠다. 조금 전 전화를 나눈 동기만이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씨익 웃었다. 다른 동기에 비해 나이가 많고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라 회사를 떠나게 되어도 어찌하겠느냐며 늘 호기롭게 말했던 사람이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동료 임원들은 그런 그의 모습에 부동산이며 현금이며 속칭 돈이 많은 사람은 다르다며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잠시 후 대표님께서 들어오셨다.

"여기 계신 분들은 올해가 마지막인 분들이십니다." 여느 때와 다른 표정으로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우려와 예상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모두의 표정이 변하였다. 누군가는 허공을 바라보고, 누군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누군가는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았다. 드러나는 모습은 달랐지만, 모두의 마음은 같았으리라. "그동안 애쓰셨습니다" 대표님께서 임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셨다.


나는 그렇게 30년 회사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30년 종지부를 찍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3초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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