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자들과의 브런치 모임 후 깨달은 점
퇴직자분들과 브런치 모임을 마쳤다. 처음으로 내 이름을 걸고 진행한 자리였다. 의외로 많은 분이 연락을 주셔서 살짝 놀랐다. 이미 퇴직하신 분도 계셨고 곧 퇴직을 앞두신 분들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심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손님이 오셨었어요” 사무실에 도착하니 환경 여사님이 말씀하셨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나보다 먼저 오셨다면 아마도 예정 시각보다 한 시간가량은 일찍 도착하신 듯했다. 순간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비도 추적추적 오는 데다 몇 군데 빵집을 들렀던 게 판단 착오였다. 오시면 대접하려고 미리 점찍어둔 빵이 있었는데 아직 만들어지기 전이라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다.
“지방에서 왔습니다” 일찍 오셨다는 그분은 저 멀리 지방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하셨다. 내가 쓴 책을 퇴직 전에 읽어서 그나마 멘탈 잡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얘기도 하셨다. 순간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분뿐 아니라 다른 일정을 조율하고 오셨다는 분도, 퇴직 후 제일 먼저 나를 찾으셨다는 분도 그저 황송할 따름이었다.
함께 하는 두 시간 동안 정말로 행복했다. 마치 막역한 인생 선후배를 만난 것 같았다. 퇴직이라는 공통된 고민을 가진 것만으로도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한 시간은 내 이야기, 한 시간은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는데 시간이 다소 모자란 느낌이었다. 한 분 한 분 개별적으로 해드리고 싶은 얘기도 있었고, 꼭 알려드려야 할 내용도 마무리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개인적으로 이번 만남을 통해서 그리고 여러가지 경험을 하면서 새롭게 깨닫게 된 사항이 있다. 퇴직에도 트렌드가 존재했다. 불과 몇 년 차이인데도 나는 이미 옛날 퇴직자가 되어 있었다. 다음에서 그 차이가 느껴졌다.
첫째, 퇴직의 시점이 달라졌다. 나는 연말 즈음에 회사를 떠났다. “누가 유력하다더라”, “누가 밀려날 거란다” 추석이 지나고 출처 불분명한 소문들이 몇 차례 돌고 난 뒤였다. 그 때문일까. 나는 아직도 추위가 찾아오면 괜스레 울적해진다. 회전문을 돌아 나와서 마주한 초겨울 칼바람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렇지만 이제 퇴직은 더 이상 연말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퇴직은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임원인사 시즌이라는 개념조차 희미해진 것 같았다. 희망퇴직, 명예퇴직 등 다양한 이름으로 직장인들은 회사를 떠나고 있었다. 언제 퇴직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었다.
둘째, 퇴직 나이가 달라졌다. 나는 쉰을 막 넘어서 회사를 떠났다. 그런 나에게 누군가는 너무 빠르다고 했다. 20대에 입사해서 30대에 과장, 40대에 부장이라는 공식이 자연스러웠으니 쉰이 되자마자 직장을 관둔 내가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내 나이대 동기들이 최근 들어서야 퇴직하기 시작하는 걸 보면 그렇게 말 한 입장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퇴직은 특정 연령대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하기야 대한민국 직장인의 평균 퇴직 나이가 49세. 통계적으로 정년까지 일하는 직장인이 10% 정도라 하니, 누군가는 평균보다 훨씬 앞서 회사를 떠난다는 계산이 나온다. 무엇보다 10년 전에 비해서 퇴직 연령이 4년이나 낮아졌다고 하는 걸 보면 변화가 있는 건 확실했다. 회사와 결별하는 이유도, 형편도 제각각일 테지만 분명한 건 퇴직은 나이를 봐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이번 모임에도 40대분들의 문의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 30대 후반 분도 연락을 주셨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접하니 느낌이 또 달랐다. 퇴사와 퇴직의 경계선에서 갈등하는 상태, 게다가 업무 외적으로 여전히 수많은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 그래서 그분들의 시름이 깊어 보였다. 저녁이나 주말 모임은 없느냐는 질문에서 조금은 가늠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퇴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나는 퇴직 후 숨기에 급급했다. 왠지 실패자가 된 기분이 들어 힘든 감정을 혼자 삭이기 바빴다. 회사에서 떠밀려 나왔다는 걸 인정하기가 싫었다. 자기소개가 필요한 자리는 일부러 피하며 현직에 있는 듯 행동했다. 덕분에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고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놓치기도 했다.
나와는 달리 요즘 퇴직자들은 당당했다. “퇴직했습니다.” “인생 2막을 시작합니다.” 이런 말들을 스스럼없이 하였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본인의 이야기를 SNS에 올렸다. 부끄러움 대신 용기를, 숨김 대신 공유를 택하는 모습이 참으로 멋지고 존경스러웠다. 그분들은 퇴직을 움직이지 못하는 거대한 산이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하나의 변곡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녹록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 돌파해야 할 허들쯤으로 여겼다. 분명 그 자세는 가면 갈수록 삶의 밀도를 높이게 만들리라.
“이런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어요.” 어느 한 분의 말씀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곁에서 지켜봐 주고 지지해 주는 존재가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부디 이번 모임에 참여한 분들이 원하시는 시점에 바라시는 바를 꼭 이루셨으면 좋겠다. 나 역시 그분들의 SNS 계정을 찾아보며 자신만의 걸작을 만들어가시는 과정을 응원해드리려 한다. 우리는 길을 찾는 이 시대의 같은 퇴직자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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