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회사 부장으로 일했던 50대 중반의 고민
저는 수원에 사는 50대 중반입니다. 무역회사에서 부장으로 일하다가 1년 전에 퇴직했어요. 대학 졸업하자마자 들어간 곳이었는데 경영난으로 인한 구조조정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 직급에서 더 올라가기도 어려운 데다 회사 분위기상 정리를 할 수밖에 없었지요. 나와서는 그냥저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고민 하나가 생겼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못 하겠어요. 며칠 전 고등학교 동창회가 열린다는 메시지를 받고 망설이는 중이네요. 1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열리는 모임인데 작년에 갔다가 괜히 마음만 상해서 돌아왔거든요. 예전에는 빠지지 않고 갔었지만 이젠 나가기가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지난해 동창회 당일이었어요. 약속 장소인 강남에 있는 고깃집으로 향했습니다. 예정된 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는데 이미 대여섯 명이 와 있더군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테이블 한쪽 자리로 향했습니다. 앉자마자 옆에 앉은 친구가 따라주는 맥주 한잔을 마셨습니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습니다.
다들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고등학교 친구들과 만나면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그때 얘기로 시작하곤 합니다. 수학여행 갔다가 선생님 몰래 밤에 빠져나와 혼쭐난 얘기, 체육대회 때 우리 반이 1등 했던 얘기, 당시 담임 선생님 별명 얘기, 그런 대화들을 주고받으며 한참을 웃었습니다.
몇 잔 마시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요즘 사는 이야기로 주제가 바뀌었습니다. 한 친구가 승진 심사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고 먼저 얘기를 꺼냈어요. 중견기업에 다니는 친구였는데 올해는 꼭 임원이 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자신이 가장 유력한 후보였음에도 결과가 좋지 않아 실망이 컸다고 했습니다.
이를 다른 친구가 받아쳤습니다.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친구로, 자기는 올라갈 데가 없어서 속상하다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그러면서 요즘 일감이 많아서 정신없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경기가 어려워도 들고 나는 사람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더군요. 새로 디자인한 명함을 돌리며 주변에 인테리어 공사할 사람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저는 내내 듣고만 있었습니다. 딱히 할 말이 없었어요.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분위기만 맞추었습니다. 그러다 혼자서 술을 따르려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제 술잔을 툭 치며 말했습니다. "너희 회사는 어때? 요즘 수출 경기 예전 같지 않다면서?" 그러면서 또 한마디 했습니다. "너희는 희망퇴직 바람 안 부냐? 다들 난리던데."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이미 퇴직했다고 말하자니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 같았고, 그렇다고 거짓말하자니 양심에 걸렸습니다. 결국 애매하게 "글쎄, 모르지."라고만 답했습니다. 그러고는 태연한 척 술잔을 들이켰습니다. 다시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다행이야. 우리 회사는 아직 나가란 말은 없거든." 화장품 회사에 다니는 그 친구는 자기네 업계가 아직은 안정적이라고 자랑했습니다. 속이 쓰려왔습니다.
이후로도 대화는 계속 직장 이야기로 흘러갔습니다. 최근 어떤 직종이 뜬다더라, 요즘 아랫사람들 어떻다더라 하는 얘기들이었어요. 저는 계속 듣고만 있었습니다. 흥을 깰까 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는 게 전부였지요. 그러다 보니 점점 멍하니 그저 머릿수만 채우는 목석같이 돼버렸습니다.
술을 몇 잔 더 마시고 나자 한 친구가 2차 가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노래방 가자는 의견도 있었고 치킨집이 낫다는 목소리도 있었어요. 저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선약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아무 약속도 없었지만, 그냥 그 자리에 있기 싫었습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어요.
"아, 그래? 그러면 다음에 보자" 누군가 제게 한마디 하더군요. 딱히 저를 붙잡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또 왜 그리 서운한지. 친구들은 제가 진짜 사정이 생겨 어쩔 수 없이 가는 줄 알 텐데도 받아들이는 저는 혹시 나를 무시해서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제 표정이 굳어지는 걸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혼자 터덜터덜 전철역으로 걸어갔습니다. 화려한 밤 풍경을 보려니 기분이 더욱 침울해졌어요. 친구들은 곧바로 노래방이나 맥줏집으로 옮겨서 더 신나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걷는 내내 들리는 여기저기 식당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저를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집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솔직히 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제가 다른 친구들보다 낫다고 생각했어요. 공부도 잘했고, 대학도 더 좋은 곳에 갔으니까요. 말하기도 부끄러운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상념에 빠져 있는데 단톡방 알람이 울렸습니다. 한껏 취한 친구들의 사진이었어요. 확실히 1차 때보다 더 상기된 모습이더군요. 저는 곧바로 알람을 꺼버렸습니다.
이후 1년이 지났지만, 동창회라는 말을 들으면 하면 아직도 그 밤의 기분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때 당시에는 1년만 지나면 내 형편도 나아질 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네요. 새로운 곳에 취직해서 제가 퇴직했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려고 했었건만, 그럴 수가 없게 됐어요. 그것이 제가 동창회를 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이유입니다. 작년과 같은 씁쓸한 동창회는 한 번이면 충분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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