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헌터에게 헌팅 당하던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요사이 모르는 번호 대부분은 택배기사나 홍보 상담원이다. 귀찮은 마음에 받지 않고 보고 있던 홈쇼핑 채널을 돌렸다.
‘띠링’ 연이어 문자가 왔다.
‘별거 아니겠지’ 하고 확인하는 순간 살짝 당황했다. ‘상무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OO 헤드헌터 기업, OOO 대표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전화드렸습니다. 상황이 허락하시면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문자 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헤드헌터? 무슨 일이지?’ 곧바로 리모컨을 던지고 답장을 했다. ‘네. 안녕하세요? 제가 다른 용무 중이라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지금 통화 가능합니다.’
통화의 내용은 이러했다. 모 대기업에서 운영 중인 대형 카테고리 킬러의 실적이 지지부진해서 오너가 대대적인 컨셉 변경을 지시하였고, 이에 맞는 적임자를 찾던 중 내가 최종 3인의 물망에 올라 그 기업으로부터 나를 컨택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것이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공손하게 말하는 헤드헌터와 통화를 하니 지난날 생각이 났다. 한창 잘 나가는 직장인 시절에는 모두가 나에게 이렇게 행동했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모두 받아 적었고, 내 시선이 가는 곳은 모두가 주목했다. 이미 1년이 지났기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나를 발견했다.
“며칠 생각해보아도 될까요?” 짧게 대답한 후 깊은 생각에 들어갔다. 분명 새로운 제안을 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과거의 나였다면 이를 나에 대한 인정이라 생각하고, 그 제의에 응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우쭐대며 떠벌렸을 것이다. 하지만 두려운 생각이 앞섰다.
우선 나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최근 몇 달을 심한 불면증으로 시달리고 있어 늘 무기력하고 피곤했다. 밤마다 잠이 오지 않아 끝도 없는 공상을 하다 보니 정신이 피폐해져 있었고, 정신은 육체까지 지배하여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였다. 신규 사업을 추진력 있게 리드할 만한 몸 상태가 아니었다. 언제든 과로로 인해 쓰러질 수 있는 최악의 상태였다.
그리고 또다시 맞이할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조건이 맞아 근무하게 되어도 끝은 분명 있을 것이다. 몇 년이 지나 퇴사를 할 때 지난 1년간 느꼈던 고통이 반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이제 겨우 편안한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는데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한 번의 고통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이 내민 손을 붙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직할 때 더 이상 취업은 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었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노라 마음먹었었다. 그러한 마음은 결별당하지 않기 위해 먼저 헤어짐을 고하는 자의 다짐과 같은 것이었을까. 어느새 헤드헌터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네. 해보겠습니다. 이력서 양식, 메일로 보내주세요.’
이력서 제출 마감은 3일 뒤였다. 나는 모든 크고 작은 할 일을 미루고 이력서 작성에 들어갔다. 과거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상대편의 선택을 받기 위해 머리를 짜내었다. 지금까지의 어떤 이력서보다 더욱 꼼꼼히 그리고 정성스럽게 내용을 채워갔다.
선택 장애가 오는 것 같았다. 그간의 이력을 최대한 생각해내어 A4용지 석 장 분량을 채웠건만 그중 무엇을 최종 기록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새로운 회사가 선호하는 역량에 맞추어 나를 최대한 부각하는 것이 필요한데, 지나치게 신중히 생각하다 보니 오히려 결정이 어려웠다. 그런 나를 보며 어떻게든 기회를 잡으려고 하는 처절함이 느껴졌다.
이력서를 제출하고 나니 입장이 바뀌는 것 같았다. 내가 취업 의사가 없다고 하였을 때 적극적으로 설득했던 헤드헌터는 이력서 제출 후에는 연락이 없었다. 내가 가장 유력한 대상이고 다시없을 기회라 했던 초반의 태도가 무색했다. 이후에는 몇 차례 경과를 묻는 이도 나였고, 사업 자체를 재검토하게 되어 인원 선발이 백지화되었다는 답도 나의 연락에서 비롯되었다.
어쩌면 헤드헌터는 클라이언트에게 섭외력을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이력서를 요청한 기업의 인사담당자는 오너에게 적당한 인물을 취합하여 보고하는 것이 필요했을 수 있다. 결국 나는 그들을 위한 전시장의 상품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순간의 달콤한 유혹을 이기지 못해 다시 직장인의 삶으로 돌아가려 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과거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다며 잠시 들떴던 내가 한심하게 생각되었다. 그 정도 했으면 되었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다독이던 의지는 어디 갔을까. 뒤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나의 재취업 도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더는 직장인이 되기 위한 이력서는 쓰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선택을 바라며 다시 진열장에 오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직장인의 결말은 고통이고 좌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