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임원인 며느리는 시아버님을 이렇게 불렀다
‘청주 다녀오겠음’ 늦은 오후 남편의 문자가 왔다.
‘OO’ 짧은 답장을 보냈다. 직장 생활하던 시절의 줄여 대답하는 습관이 잘 고쳐지지 않는다.
최근 몇 년 사이 시부모님의 건강이 부쩍 나빠지셨다. 아흔이 넘는 연세로 크고 작은 병환은 물론, 쉬이 넘어지기도 하셔서 남편 남매들이 순번을 정해 돌봐드리는 중이었다. 이번엔 남편 차례인 듯했다. 더는 묻지도 않는 짧은 대화 속에 우리만 아는 걱정과 피로가 담겨 있었다.
나는 1남 4녀 중 외아들과 결혼하였다. 시누이가 많으면 힘들다는 말을 듣고 살았던 터라 결혼 전부터 근심이 되었다. 누나 셋과 나이 많은 시누이 하나가 얼마나 나를 힘들게 할까, 그럴 때 어떻게 대응을 할까,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였다.
그런 나를 특별히 아껴주신 분이 시아버님이셨다. 워낙 유순하시고 따뜻하신 성품이시라 많은 사람들이 아버님을 따랐다. 가끔 시댁에 갔을 때 식탁 위 정리되지 않은 검은 비닐봉지가 있어 여쭈면, 동네 조카들이며 친구분들이 사 온 먹거리라 하셨다. 아버님의 사랑 덕에 처음 걱정과는 달리 나는 별 어려움 없이 시댁 식구들과 잘 지낼 수 있었다.
좋으신 아버님과는 반대로 나는 좋은 며느리가 아니었다.
죄송하게도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다. 결혼 초 명절과 생신, 겨우 1년에 서너 번 찾아뵈었던 것도 해를 거듭할수록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특히, 부장 시절에는 명절 당일에도 출근을 해야 하는 지점장 업무를 맡았던 터라 더욱 그러하였다. 시댁을 방문하시는 손님들께 대접하고도 남을 만한 양의 음식 재료와 용돈을 보내드리는 것으로 죄송한 마음을 대신하였다. 이뿐 아니었다.
수년 전 간만에 찾아뵙고 저녁상을 차려 드린 적이 있었다. 저녁상을 차린다고 해봐야 시누이들이 만들어 놓고 간 밑반찬들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그릇에 담는 정도였다. 나는 밥이 되지 않게 밥솥 물의 양만 잘 맞추면 되었다. 준비를 마치고 시부모님과 남편이 계시는 안방으로 갔다. 그런데, 식사하시라는 말씀을 드리기가 무섭게 남편이 나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뭐라는 거야?”
“할아버지, 식사하세요”
내가 아버님을 할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이었다. 어쩌다 시댁에 가게 되면 나는 처음 한두 번은 아버님을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자주 뵙지 못해 아버님이란 말이 입에 붙지 않은 탓에 연로하신 외모만 보고 무의식적인 실수를 했던 것이었다. 이런 며느리가 또 있을까, 말하기조차 부끄럽다.
아버님께 나는 성공한 며느리였다. 처음 뵙는 분들께 나를 소개하실 때마다 서울에서 큰 회사에 다니는 높은 사람이라고 하시며 자랑스러워하셨다. 간혹 경로당에 과일 상자를 보내드리면 며칠을 신이 나서 다니셨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회사 일만 좋아하는 며느리를 만나, 해마다 손수 명절 장을 보시고 시어머님을 도우시는 집안일을 하셨어도 싫은 내색조차 없으셨다. 내겐 너무 과분한 분이셨다.
그런 아버님의 건강이 이 삼 년 새 급속도로 더 안 좋아지셨다. 특히, 기억력이 많이 떨어지셔서 방금 하신 식사를 기억 못 하시거나, 외출 후 길을 잃으시는 경우도 잦아 경찰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여러 번이었다.
몇 달 전 찾아뵈었을 때는 나를 알아보시지 못하셨을 정도였다. 남편이 나를 가리키며 누구인지 아시느냐 여쭈면 딸인지 손녀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셨다.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이유인지, 아버님을 할아버지라 불렀던 탓인지, 아버님의 머릿속에 며느리란 존재는 없으신 것처럼 보였다. 서운함보다는 죄송함으로 가슴이 울컥했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음을 직감하며 자주 뵐 것을 다짐했었다. 그러나,
닷 새전...
시아버님께서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주신 사랑을 갚기는커녕, 받은 사랑에 감사하다는 말씀조차 드리지 못했는데 먼 곳으로 떠나셨다. 내가 욕심을 내며 앞만 보고 달리는 사이 시아버님께서는 점점 쇠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아버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실까.
눈 감으시는 순간 자식들을 생각하셨다면 그 안에 며느리란 존재는 있었을까.
아버님 소식을 듣자마자 그런 생각을 하며 펑펑 울었다.
“아버님, 저 며느리예요. 아버님 같은 시아버님 만나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어요”
아버님의 마지막 모습 앞에서 나는 이렇게 인사를 드렸다. 짧은 인사말 속에 나를 며느리로 기억해주시길 바라는 소원을 담았다.
편히 모시고 돌아오는 길의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11월 중순임에도 따뜻한 공기로 외투가 필요 없었다.
그 하늘과 그 공기에서 아버님의 사랑이 느껴졌다.
부디 이 땅에서보다 더 편안히 쉬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