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이것이다
‘아, 뭐 입지?’
아무리 옷장을 뒤적거려도 마땅한 것이 없었다. 온통 짙은 색 정장뿐이었다. 여러 번 거울을 오가며 입고 벗기를 반복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간만의 모임인데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동료 임원들과의 송년회가 있는 날이었다. 누군가는 퇴직했고 누군가는 현직에 있지만, 함께 임원 시절을 보냈던 끈끈함으로 모임을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각자의 상황이 녹록지 않은 탓에 단톡방에서 만나는 일이 더 많아졌음에도 여전히 서로 의지하는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연말이라 그런지 약속 장소의 로비가 북적거렸다. 한껏 멋을 낸 사람들로 가득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에 황금빛 크리스마스트리가 12월 분위기를 물씬 자아냈다. 고민 끝에 골라 입었던 나의 모직 재킷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살짝 주눅이 들었다. 빨리 테이블에 앉아 식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셨어요?” “잘 지내셨습니까?”
예약된 룸으로 누군가 들어올 때마다 모두들 밝게 인사하였다.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들이라 반가웠다. 그사이 동료들의 모습은 꽤나 변해 있었다. 특히 퇴직 임원들이 그랬다. 임원 시절의 긴장감 있고 각 잡힌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젠가 먼저 퇴직한 선배 임원을 사석에서 만났을 때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등산복 차림의 모습에 당황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데 누군가가 들어왔다. “회의가 늦게 끝나서요”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며 들어온 사람은 몇 달 전 모 기업 임원으로 이직한 K 상무였다. 본 지 가장 오래된 사람이라 다들 반갑게 맞으며 근황을 물었다. “새로운 회사는 어때?” K 상무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제가 가자마자 프로젝트를 기획했는데 대박 쳤습니다” K 상무는 새로운 회사에서 본인이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지부터 이야기하였다. “우여곡절이 많았는데요, 성공하고 나니 정말 뿌듯하더라고요” 묻지 않았으면 큰일이었다 싶을 정도였다. “중간에 엎어질 뻔했는데….” 이야기가 쉼 없이 이어지자 식사를 멈추고 K 상무에게 집중했던 동료들이 하나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역시 K 상무라며 추켜세운 뒤에도 끝나지 않자 나의 마음은 살짝 불편해졌다.
“그리고 저희 둘째가 작년에 로스쿨에 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이번에는 K 상무가 아이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졸업해서 공기업에 입사했고요”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본인 이야기를 한꺼번에 풀어놓으려는 것 같았다. 마음이 불편하다 못해 못마땅해지기 시작했다. 표정에 드러났는지 마주 앉은 친한 동료 임원이 입 모양만으로 어디 아프냐 물었다. 대답 대신 코를 찡긋거린 후 접시 위 생선회를 집어 들었다.
“자, 다 먹었으면 갑시다” 누군가의 말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일어섰다. 이미 배가 부른 데다 관심이 가지 않는 이야기에 모임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던 상황이었다.
지하철역까지 걸으며 하루를 돌아보았다. 간만의 외출인데 제대로 보내지 못한 것 같았다. 반가움은 잠시뿐 줄곧 음식 맛을 지적하고 뼈 있는 농담으로 대화하며 일상의 대화 주제에 대해 불쾌해했었다. 왜 그랬을까. 왜 모든 일에 예민하게 반응했을까.
퇴직 이후 내가 점점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특히 인내와 포용이 그렇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 내용에 집중하기보다 상대방과 비교하며 조급해하고, 그냥 지나칠 일도 대충 넘기는 법이 없어 주변을 힘들게 한다. 아마도 자신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온전치 못한 내 모습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색해지느니 차라리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남에도 자격이 필요하다면 내게는 그럴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걷다 보니 한 겨울 매서운 바람이 느껴졌다.
겨울이 그냥 가려나 했는데 어김없이 온 듯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겠지.
계절의 봄이 찾아올 때, 내게도 봄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