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잡았던 결정적 사건
간밤에 많은 비가 내렸다. 멀리 창가 너머로 보였던 낮은 도로가 보이지 않았다. 평상시 자주 가지도 않았으면서 며칠 갈 수 없어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메시지가 왔다.
가까운 동료였다. 나에 관한 작은 기사가 신문에 났다며 축하한다고 했다. 그러며 어지간하면 댓글은 읽지 말라고도 했다. 몇 줄 짧은 내용이 전부였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상황이 짐작되었다. 알겠다 답변하고 소파에 앉는데 오래전 회사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보기 싫으니 저 끝에 가서 먹어”
지점장 시절 고참 선배가 회식 자리에서 나에게 한 말이었다. 내가 공식 회식에 나오는 것까지는 말 못 하겠으나 내 모습 보기가 불편하니 본인 눈에 적게 띄는 자리에 앉으라는 거였다. 영문을 알 수는 없었지만 십여 명 지점장들 사이에서 가장 직급 낮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선배의 말처럼 문가 옆, 몇 개 붙여진 테이블 구석에 앉아 조용히 밥을 먹는 일뿐이었다. 그러다 그 선배가 나를 힐끗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면 더 고개를 숙였고 가끔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대체 그 선배는 왜 나만 보면 편치 않은 심기를 드러내는 걸까.
당시 나는 부장으로 진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주어진 책임 이상으로 잘하고 싶은 마음에 시키지도 않는 일을 해가며 열심을 다했다. 다행히 노력은 성과로 이어졌다. 새로 맡은 지점이 몇 년째 적자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회사의 큰 칭찬이 있었다. 신임 부장의 패기가 남다르다며 전 지점장들 앞에서 우수 사례를 발표하는 기회까지 만들어 주었다. 나로서도 자부심을 느낄만한 자리였지만 안타깝게도 그 일을 시작으로 나는 암흑 같은 회사생활을 해야만 했다.
나를 대하는 몇몇 선배 지점장들의 태도가 급격히 싸늘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사를 드리면 잘 받아주셨던 분들이었는데 사례 발표 후 나를 대하는 눈빛이 달라졌다. 처음 표정에서 나타났던 냉랭한 분위기는 곧바로 언어에서, 다시 행동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궁금했다. 발표 이후에 선배 지점장들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나에게 툭 던진 고참 지점장의 말을 듣고 어렴풋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있는 그대로는, 말로도 글로도 차마 옮기지 못할 고참 지점장의 표현에 따르면 나는 성공에 눈이 멀어 위계질서 무시하는 무례한 사람이었다.
전해 듣기로는 고참 지점장이 내 발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점의 개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내가 지나치게 난 척을 했다고 했다. 제일 막내 지점장이 층층시하 윗분들 앞에서 난 척을 했으면 얼마나 했을까. 오히려 지나치게 긴장하여 중간에 포기하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은 사람이 어떻게 난 척을 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참 지점장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내 잘못이려니 생각했다. 모든 게 처음인 신임 지점장인 내가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한 거라고 여겼다.
종일 지점장 회의가 있는 날이면 혼자 밥을 먹었다. 회의장에 가기 전 김밥을 준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함께 식사 가자 청할 사람도, 청하는 사람도 없어 점심은 늘 주차장에 세워진 내 차 안에서 먹었다. 앉은 자세에서 몸도 펴지 못하고 찬 김밥을 먹으려면 목이 메었다. 꼭 김밥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무언가도 함께 엉켜 제대로 삼킬 수 없었다. 그래도 고참 지점장과 마주쳐 날 선 공격을 받느니 그 편이 나았다.
급기야 퇴사까지 고민했다. 하루에도 몇 번 사직서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끝내 마음을 거둔 이유는 그렇게 떠밀리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떠난다면 결국 남는 것은 나의 패배감과 나를 몰아세웠던 고참 지점장의 우쭐거림일 텐데, 고참 지점장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는 동안 후회할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몇 개월, 길어야 몇 년일 이 고통을 불투명한 미래와 바꾸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피하기로 마음먹었다.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니면 가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최대한 줄였다. 그러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고참 지점장의 나에 대한 마음은 여전히 불편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보지 못해 알 수 없으니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함께 시간을 보낼 동료가 없으니 넘치는 것은 시간뿐, 그 시간에 일에 집중할수록 회사의 더 큰 칭찬이 있었고 자신감도 서서히 회복되었다.
그즈음부터 내가 들었던 말이 멘탈이 강하다는 말이었다. 내가 고참 선배 지점장의 공격에도 끄떡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 같았다. 여전히 다른 지점장들한테 깍듯이 인사하는 내가 비범해 보였나 보았다. 아랑곳하지 않고 일에 빠져 지내는 내가 프로처럼 보였던 것 같다. 실상은 두려워서 숨었던 건데 나에 대한 의외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러는 사이 서서히 나에 대한 공격이 사그라들었고 몇 년이 지나 나를 힘들게 하던 지점장은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그를 통해 깨달았다. 눈 한번 찔끔 감고 순간을 참아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차라리 그 에너지를 다른 곳에 쏟는 게 얼마나 필요한지.
동료가 말한 댓글이 어떤 내용인지 궁금은 하다. 하지만 애써 찾아보지 않을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대충 던진 한마디에 반응할 여유가 내게는 없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 관심이 사라지면 모두 해결될 일이다.
상무님은 왜 멘탈이 강하실까?
강한 것은 아니었다. 어찌어찌 강해 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