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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아로운 생각 Jul 19. 2024

서울에만 살던 퇴직자가 지방에 가지 못하는 이유

부디 저만 그러기를 바랍니다


새벽에 일찍 눈을 떴다. 오전에 춘천 인근에서 약속이 있어 서둘러야 했다. 창밖을 보니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하늘이 뻥 뚫린 것 같았다.    

 

휴대폰으로 약속장소를 다시 검색했다. '2시간 16분'. 집에서 2시간 16분 전에만 나가면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었다. 찾아뵙기로 한 분이 한참 어르신이라 절대로 늦으면 안 되었다. 혹시 비 때문에 차질이 있을 수도 있으니 3시간 전에 문밖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상봉역까지는 잘 갔다. 상봉역에서 경춘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그때부터 헷갈리기 시작했다. 춘천 가는 기차표를 어디서 사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표를 사려면 일단 개찰구를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둘러봐도 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무작정 나가면 애꿎은 푯값만 들 수 있을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을 서성댔다. 

     

안 되겠다 싶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시뻘겋게 눈이 충혈된 군인이었다. “춘천 가는 기차표 어디서 사요?” 그 청년은 내 질문에 잠시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다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표 안 사요. 교통카드로 다 돼요” 그랬다. 표는 다시 안 사도 되었다. 지하철 탈 때 카드를 태그 했으면 그대로 갔다가 내릴 때 찍으면 자동 계산되는 방식이었다. 대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춘천 갔을 때는 분명 표를 샀었는데 이제는 살 필요가 없어졌나 보았다. 살짝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지도 앱이 가르쳐준 대로 굴봉산역까지는 다행히 잘 갔다. 그곳에서 버스로 갈아타면 끝이었다. 굴봉산 역에 서 바라본 주변 풍경은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코끝에서 느껴지는 초록색 공기도 참 좋았다. 룰루랄라,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각까지는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정신줄을 놓으면 안 되었다. 버스를 탈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었다.     


역시나 역 밖을 나오자 또 난감해졌다. 확실히 맞게 찾아온 것 같은데 그곳이 정류장인지 정류장이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작은 표지판이 있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소심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푯말에는 내가 타야 하는 버스 번호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길가에 주차된 여러 대 차들도 모두 시동이 꺼진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반드시 오리라는 믿음으로 버스 시간표를 검색해 봤다. '헉!!!' 순간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나란 사람은 대체 왜 이 모양이람. 내가 탈 버스는 하루에 딱 두 번만 다니는 노선이었다. 그걸 그제서야 확인한 나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황도 잠시, 이후로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대체 지도 앱이 가르쳐준 2시간 16분이란 시간은 무얼 근거로 했을까. 모든 상황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을 때의 시간이란 말인가.    

  


쿵쾅쿵쾅. 그때부터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천운이 아니고서야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중 한 대가 지금 딱 내 눈앞에 나타날 리는 없었다. 부리나케 콜택시 회사에 전화했지만, 배차가 안 된다는 답변밖에 들을 수 없었다. 이쯤 되면 늘상 쓰는 택시 호출 앱도 무용지물일 게 뻔했다.     


이후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약속장소에 가기는 갔다. 하지만 한 시간 가까이 늦게 도착을 했다. 모두 뵙기로 한 분이 다음 기차역인 강촌역까지 직접 마중을 나와주셔서 가능한 일이었다. 초면에 결례란 결례는 다 드리고 말았다. 백발 어르신께서 운전하시는 차를 타려니 여러모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다음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는 기억도 없다.     


원래 나는 길을 잘 못 찾아다닌다. 퇴직한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마찬가지다. 지하철 노선은 왜 그리 많고, 새로 생긴 역명은 또 왜 그토록 많은지, 처음 듣는 동네 이름도 수두룩하다. 최근에는 좌석이 중앙으로 모여있는 전철을 탔다가 다시 내린 적도 있었다. 왜 내렸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냥 잘못 탔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몸이 먼저 반응했다. 회사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곧 익숙해질 줄 알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헤매는 중이고 그러다 큰 실수를 하게 되었다.   

    

물론 배운 점도 있다. 무리한 승차는 끼임 사고의 원인이라는 점, 출입문이 닫힐 때는 뒤로 물러서야 한다는 점, 또한 이메일 열기 전 3초만 살피면 사이버 공격을 막을 수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굴봉산역에서 강촌역으로 가기 위해 열차를 기다렸던 시간이 40분, 그동안 역내 전광판을 바라보다 모두 머릿속에 박아 버렸다.

     


무엇보다 큰 깨달음은 따로 있다. 결국, 새로운 곳에 가기 위해서는 꼼꼼한 준비가 필요했다. 시행착오를 줄이려면 사전에 최대한 큰 노력을 들여야 했다. 준비된 조금 늦은 출발이 준비되지 않은 빠른 출발보다 훨씬 나았다. 나의 지난날 실패가 이 때문임을 체험했으면서도 여전히 결정적인 시점에서는 놓치게 된다.   

   

언젠가 나도 서울을 떠나서 살게 되는 날이 올까? 그때는 체질이 되어버린 편견부터 걷어내야겠다. 내가 아는 것, 해본 것을 뒤로하고 백지부터 시작해야겠다. 과거의 지혜와 경험이 항상 유익하고 유용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요사이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유튜브 퇴직학교의 문은 늘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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