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균 Jan 07. 2016

나는 누구인가

나의 소중한 성장 이야기 - 1편  질풍노도의 시기까지

역경을 딛고 피어난 꽃이 가장 아름다운 거란다. _영화『뮬란』중에서


[1편  ~ 질풍노도의 시기까지]


사람이 철이 들이 간다는 것이 혹은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지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나름 이 글에서 밝혀보려고 한다.


’시도’ 여기서 이 말은 실험이라는 말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살아온 궤적을 분석하기 보단 스스로 거울 앞에 서, 알몸으로 내면과의 교신을 해본다. 그 과정에서 얻어내고자 하는 ‘모색’ 이자 ‘탐색’이다. 이 주제를 두고 내면의 나와 다투는 내 성찰은 타인과는 상관없다.


내가 처음부터 다루고자 했던 물음. 앞으로 좀 더 나은 인간으로 살고자하는 바램, 그리고 일생생활의 소중함, 나아가 궁극적으로 마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를 여태껏 읽고 느낀것을 토대로 책과 함께 기술해본다. 대단한 지식을 기대한 다면 읽고 실망을 금치 못하리라. 그저 스스로 생각한 생각의 발로일 뿐이다.


따라서 지나온 나의 삶의 궤적을 다룬 글이 의미 있는지, 무의미한지, 또는 가치 있는지 아니면 무가치한 지의 판단은 읽는 이의 몫이다. 여기서 어떤게 진리인지 최종판단을 내리는 제3자의 심판자를 불러올 수도 없지 않은가. 감히 청언 하건데 글을 읽는 동안 속내를 드러내 나와 더불어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청춘은 청춘에 맞게, 중년은 중년답게, 노년은 노년답게 그 리듬에 맞는 시절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변함없는 나의 생각이다. 중년에 들어 떼돈을 벌지 못해 ‘귀족과 같은 우아한 체념’ 이라든지 ‘중년의 지혜’ 라는 말 따위로 치장해 위로하는 것은 굴욕적인 기만이라 생각한다. 스스로 싸구려 위로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젊은 시절 내내 가졌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런 개인적인 면모와 경험을 가감 없이 밝히는 두려움은 더욱 크기만 하다.



김태균


인간은 어찌 보면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이야기하려고 생각한다. 기억은 언제나 자작극에서 출발한다는 심리학자 김정운의 말이다. 사실관계 유무보단 내 자신만의 의미부여가 기억을 조작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나는 1971년 대구시 동인동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는 동인동에서 멀지 않는 효목동에서 보냈다. 우리 가족은 2층 양옥집에 살면서 거실에는 5인용 소파와 그 소파를 지탱하는 카펫이 있었고 출입문 쪽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아버지 생각엔, 이만하면 자신의 삶이 성공했음을, 내가 돈이 있음을, 스스로 위안 삼았을 거라 여겨진다. 지금의 40평 이상의 아 파트에 사는 것처럼.


나의 아버지도 어쩌면 그런 맥락에서 상류층의 대열에 속하고 싶었고 그래서 2층 집을 샀는지도 모르겠다. 내 머릿속에 한 장의 흑백사진이 있다. 누나는 피아노를 치고 소파에는 엄마와 내가 나란히 앉아 누나의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이것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복하게 보낸 초등학교 생활의 전부다. 그 이후 중학교 시절부터는 수치심과 절망감으로 점철된 연애사의 출발이었다. 힘겨운 연애사를 노골적으로 그리고 가혹한 어조로 기록해 본다. 이것이 아픈 과거의 기억으로 표현되는 콤플렉스인지, 그렇지않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인지는 읽는 이의 판단에 맡긴다. 허나 나에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스스로 특수하다고 느낄 뿐이기에 비록 부끄럽지만 철없던 시절의 일화 몇 가지를 적어본다.


중학교 2학년



그 무렵, 아버지는 부동산관련업을 하셨다. 외삼촌과 외할아버지에게 자금을 끌어다 사채겸 부동산투자를 하셨는데, 아마도 그것이 부도가 난듯하다. 그렇게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빚쟁이들을 피해 자식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형제들은 영문도 모른체 고모네 집으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형의 나이는 갓 스무 살이 된듯한데 서둘러 군대를 자원하였고, 나는 작은 고모네 집으로, 누이는 큰 고모네 집으로 이사를 했다. 돌이켜보건데, 나보단 내 누이의 처지가 더 한탄스러웠으리라. 꽃 같은 열일곱의 나이에 공부는커녕 남의 집 눈칫밥을 먹으며 사춘기를 보낸 누이의 시절역시 회한과 아픈 기억의 상처가 뼈속깊이 있을 터이다.


당시 나의 고모님들은 두 분 모두 대구 동성로에서 장사를 하시던 분들이었다. 당신들 자녀양육도 힘겨운데, 우리까지 숟가락을 무상으로 얻으니, 그야말로 미운 오리 새끼들이었다.


대구시내 중간이라, 늦게까지 학업을 하고 집으로 오는 교통편이 편리하기는 커녕, 늦은시간까지 친구들과 어울리며 이리저리 시간을 때우다 자정이 다 된 무렵에서야 들어가도 되는 교통의 편리함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공부보단 여학생들 꽁무니만 따라다니며 방황의 긴 터널로 들어간 무렵이 바로 이때쯤인듯하다. 그리고 잘 하지도 못하는 싸움을 마치 잘하는 마냥 거짓말로 정신적무장을 하고 다니기 시작한다



이 두 가지가 내 중.고등학교 시절의 지배적인 가치관이었다. 당시에는 많은수의 여자를 아는것이 친구들사이에선 잘나가는 것의 상징이었다. 당시 내가 공부보다 손쉽게 할 수 있었던 비슷한 처지의 여학우들을 만나는 것이었으며, 그들과 함께 신나는 밤을 보내 거나 역사를 만들어 학우들에게 자랑질 하는것이 학생들 사이에 인정받는 길이었다. "그렇게라도 인정을 받고 싶었다." 집에 가면 기다려 주는 사람도 없었으며 따뜻한 인사말을 건네주는 사람도 없다는 것을 핑계삼아 더욱 부모님의 기대와는 멀게 학창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 때만 해도, 말보다 주먹이 앞섰던 시절이었다. 화려한 싸움신으로 무용담을 남기는 일이 없으면 그 또한 슬프다. 대구 시내 나이트클럽과 음악다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담배를 피울수 있는 공간, 그리고 술을 먹을 수 있는 집을 알고 그 곳으로 친구를 데려가는 것도 능력의 일환이였다. 그런 알퍅한 힘을 알기에 그런 힘이 지배하는 또래들 사회에선 나의 가난이 그리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큰 키 덕분에 실력을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싸움을 잘하는 반열에 자동으로 올라가고, 그리곤 대지와의 탯줄을 끊지 않고 강력한 수컷의 향기를 뿜어대며 오로지 여자사냥 에만 집중했다.


성애의 집착은 순진한 학생을 꼬드김이 아니었고 원나잇 스탠드를 위한 관능적 여행으로 이어졌다. 돌이켜 보면 중학교 2, 3학년 학생이 입술엔 틴트를 바르고 짧은치마에 스타킹 그리고 하이힐을 신고나와 나름의 각선미를 뽐내려고 얘를 쓰는 학생들이었다. 얼굴엔 싸구려 파운데이션만 떡칠해서 이것이 화장술인지 변장술인지 구분할 수도 없다.


학문의 즐거움 따윈 '개소리'였고 , 오로지 '성에 대한 집착' 만이 청소년 시절의 지상 최대의 과제였다. 연일 대구시내에 있는 중앙도서관 앞에서 오후 5시만 되면 자신의 학업을 마치고 나오는 여학생에게 달려가서 "커피 한잔 할래요?"라고 추파를 던지는 게 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하나 만 걸려라"
하는 절실한 심정으로 매일매일 이삽십번의 시도 끝에 다음번 약속을 받아내는 일은 일주일에 한 두번 정도 있던 것 같 다. 왜 그랬을까? 정말이지 나도 모르겠다.



생애최초 연애.


중학교2학년이 되어 한 학년 위의 다른 여학생과 처음으로 연애를 했다. 길거리 헌팅으로 처음 만날 때부터 나이를 속였다. 우리는 학교수업이 끝나면 나의 중학교 근처에서 만나 이런저런 데이트를 했는데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허나 분식집에 가서 쫄면과 김밥을 자주 먹었던 것 같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기억에 남는 건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 앞에 삼류극장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는 한 번의 비용을 지불하면 두세 편의 영화를 볼 수 있었으며 더구나 영화의 종류는 애로물이 대부분 이였다. 나와 그 친구가 보러가기로 한 영 화는 ‘무릎과 무릎사이’ 였다.


영화를 보는 도중 내가 손을 잡아야 하는지 언제 어깨에 팔을 올려야 하는지 감을 잡을수 없었으며, 에로틱한 장면이 연출되는 순간 결국 내 손이 그녀의 허벅지위로 올라가 있었다. 나의 바지춤에 있는 그 녀석은 한없이 부풀어 있었고 중요한 부위까지 만질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러곤 저녁이 되길 기다렸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당구장을 하셨다. 그렇게 당구장에서 시간을 때우고 저녁의 노을이 점차 거리를 덮기 시작하고,. 우리는 거리로 나와 하염없이 거리를 걸으며 조금이라도 어슥한 곳이 있다면 자리에 앉아 첫 키스를 했다.


그런데 키스라는 걸 어떻게 하는 것인지 배우지 못했다. 그저 몸만 뜨거웠을 뿐. 행위는 서툴렀고 당황한 그녀도 어찌할 줄 몰랐다. 그렇게 끝난 첫 키스의 해프닝을 뒤로한 체 우리는 다음에 만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허나 나는 다음번 만날었때에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체 그녀와의 키스를 망치고 만다.


내가 만약 격렬한 키스보다는 얕고 부드러운 키스, 처음에는 서로의 입술을 가볍게 물면서 하다가 웬만큼 무르익었을 때 부드럽게 혀를 넣어 입술 가까운 곳을 어루만지는 느낌으로 하는 정도의 키스를 알았다면 그녀가 떠났을까? 그보다 더 중요한건, 어리석은 키스는 기교가 부족한 키스가 아니라 나쁜 입냄새가 나는 키스였는데도 그것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중학시절을 보냈다. 그 외에는 기억이 없다. 너무이른 나이에 담배를 피워 당시의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가 사라진 것 같다. 대구에서 더 이상 살기 어려워진 시기는 바로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전학을 가야 할 상황이 발생했다. 사실 집안의 문제는 안중에도 없었다. 단지 내 고민은 어떻게 하면 전학 가는 학교에서 완력으로 친구들을 제압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다. 시선은 어디 두어야 하며, 어떻게 거들먹거리면서 걸어야하는지, 담배는 어떻게 피워야 하고, 누굴 제압해야 하는지가 고등학교 생활의 시작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의 기억


대구 정동고등학교 2학년초 부득이 하게 부산으로 전학을 갔다.전학을 가면 타 학생들에게 기가 죽지않을려고 어깨엔 힘이, 미간엔 주름을, 늘 달고 다닌다. 한 마디로 기가 죽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던 어느 날 쉬는 시간 화장실에서 짝꿍이랑 담배를 피우고 다시 수업에 들어갈 무렵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뛰어 들어갔는데 난 꽁초를 더 피우려고 늦게 나오고 말았다. 마침 지나가던 다른 선생님이 화장실로 들어와서 내 잎에서 담배 연기가 빠끔히 나온걸 보았다.


무섭기로 소문난 선생님이라 심장이 쫄깃했다. 한 시간 수업 후 교무실로 내려가 담임에게 택배인도 되듯이 인도되었다. 나의 담임선생은 은행원 출신 이였는데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몰라도 항간의 소문엔 은행에서 짤리고 오셨다는 소문이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후 이면지 한 장을 꺼내시더니,


“여기에 너 장점을 써봐”


이 큰 여백에 내 장점이라곤 솔직히 두 줄이면 충분했다. 주절주절 적었다. 말인지 된장인지 모르게..
한 참을 읽어보시더니 선생님은 “너 처럼 가능성이 있는 녀석이 그러면 안 된다” 하셨다. 그러곤 졸라게 맞았다.난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그 때 좋아졌고 그 표현은 “아직 널 믿는다. 는 말로 해석하고 싶었다. 그때는 몰랐다. 시간이 지나서 알았지만 사람 보는 ‘눈’ 이라는 건 상대의 단점을 들추는 능력이 아니라 장점을 발견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고등학교에서의 첫 싸움


대구에서 부산으로 전학을 간후 고등학교2년때였다. 마침 한 친구가 나에게 시비를건다.본인 스스로도 모험이였을텐데, 난 그 친구와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한 바탕 주먹다짐을 하였다. 운좋게 내가 그 친구를 순식간에 제압하고 말았다. 화장실 문을 박차고 멋지게 나서는 순간 , 순식간에 게임이 끝난 상황을 학생들이 눈치를 채고 내 뒤통수에다  수군거린다.


“야 대구에서 한 놈 왔네!", "하! 새끼 싸움 좀 하는 놈이네" 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의 주가는 순식간에 코스닥의 대박주처럼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고, 나에게 친하게 지내려는 친구들이 한 두명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기세등등했다. 그렇게 얻어 맞은 친구는 자기가 알고 있는 우리또래 보다 한 살 많지만 우리학교의 서열 3위인 친구에게 나를 혼내주라고 부탁을 한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나에게 학교뒤 야산으로 올라오라는 전보를 받고 난 무척이나 겁을 먹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내가 지면 어떡하지?
두려움이 상상을 초월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그렇다고 싸움을 피할 수도 없었고, 용기를 내보기로 마음먹고 그 날 싸움장소로 친구 한명을 데리고 올라갔다. 산 정상에 다다르니 먼저 그 친구가 와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 친구 얼굴엔 가벼운 미소가 흘렀다. 나를 얍잡아 보고있는 듯했다.그 순간 생각과는 다르게 그 친구가 먼저 "잘 지내자" 라는 말을 건넨다. 생각해 보면 그 친구 역시 쫄았거나, 이 싸움에 졌을 때 잃을 것이 더 많다고 판단한 것 같다. 표현하진 못했지만 심장이 다시 평상시의 맥박수로 회복은 되었지만 여전히 쿵쾅거리는 심장은 혼자만 감추고 있었다. 그 이후 나의고등학교의 생활은 굳이 언급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 사건이후 교내에서 학우들과의 관계는 어려움 없이 지낼수 있었지만 한참 성장기때 성애의 욕구는 더욱 집요해 져가고 있었다. 2학년말 즈음인듯하다. 허름한 동네 가발집 에서 당시에 오천원을 주고 산 가발을 머리에 둘러싸고 해운대에서 여자 꼬시던 모습이 고등학교 시절의 나의 모습이다. 추파와 퇴짜 그리고 성애의 집착이 버무려진 중고등 학교시절. 다른 기억이라곤 나지 않는다.



사실 중고등학생이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게 연애 밖에 더 있을까?

하루 종일 그 생각을 하지, 꿈에 대한 생각, 미래에 어떤 직업으로 성공하겠다는 생각을 하겠는가? 어른들이 물어 보니까 할 수 없이 적는 것 뿐이다. 꿈이 있다고 해야 안심을 하니까 부모님이 원하는 의사, 변호사, 판사, 회계사 등등 을 쓰는 것이다. 누가 그 나이에 “의사가 되어서 내가 어떻 게 성공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겠는가? 저 녀석을 어떻게 꼬실까? 아니면 “재랑 어떻게 재미를 볼까?” 이 생각만 하고 있는데, 이게 질풍노도시기의 자연스러운 일인데, 다 모두다 공부에 억압되어 있다. 겉다르고 속 다른 삶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이다. 결국 마음의 병이 되고. 그래서 우울증과 온갖 정체불명의 정신질환을 스스로 앓고 어디 가서 하소연 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된다. 성교육도 수준이 너무 낮다. 애들을 어린애 취급만 하고 사고 막기에 급급하다. 그저 임신만 하 지 않으면 사고만 치지 않으면 다행인줄 안다. 제대로 가르 쳐 주지도 않으면서 그런 상태로 우리는 삼십대가 된다.




내가 지금 40대 후반이 되었다는건 사나운 질풍노도의 시간을 체험하고 지나온 것이다. 이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아 무리 잘난 10대 20대라 해봐야 그건 인생에서 애송이 일뿐이다.


뭘 알겠는가?


아직 40,50대라는 여름의 마지막 열기를 겪어보지 않았는데. 아직 인생전체의 가을도 오지 않았는데 . 우리가 청춘을 멋지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많은 가능성을 실험하고 모색할 수 있다는 것에 방점이 있다. 여행을 하고 사랑에 좌절하고 친구에게 맞기도 하고 패배감도 느끼고 그러한 시행착오가 쌓이는 것들이다. 무엇을 하든 돈은 어차피 많이 벌지 못한다. 20,30대가 자기 힘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겠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바로 얼마나 많이 실패를 경험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핵심이다.


내가 그 동안 일이 술술 잘 풀렸다면, 그 시간 동안 얻은게 없을 것이다. 취직도 잘 되고 연애도 술술 풀리고 중년에 중산층에 무사히 편입한 분들이 청소년기의 방황을 이십대의 고뇌를 어떻게 알겠는가?


자기 스스로가 생성한 스토리가 없는 삶은 다른 풍파가 찾아왔을때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일찍이 경험했던 분노, 욕망, 좌절, 탐욕 같은 것 들은 우리는 이것을 트라우마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실패들이 나의 탐욕, 분노, 어리 석음을 훗날 덜어주는 것들이다. 그래서 실패가 자랑스러운 것이다. ‘나는 이런걸. 경험했어. 하는 스토리가 내 자신의 박물관이다. 자신의 박물관이 없는 삶은 초라하다. 그래서 자신이 겪은 실수와 고생을 성공이 아닌 성장으로서 자랑스러울 뿐이다.


젊은시절 나 스스로 삶은 불쌍했지만 혹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포근히 나를 안아주고 싶다.



2편 : 두 번째 이야기 나의 이십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