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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균 Jan 10. 2016

나는 누구인가

2편 스무살...

2편 - 스무살...

대학시절!


대학 선택과정을 잠시 언급한다면, 내 친구 대관이네 집에서 전날 폭탄주 세레머니를 이유도 없이 마셔댔다. 숙취해소는 부르주아의 사치이며, 약간 몽롱한 상태를 건달과 양아치의 특기인줄 알고 새벽을 맞이하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 '뽕(히로뽕)'맞은 마냥 두뇌는 뇌사상태 즈음에서 헤매였고, 우린 그날 아침 "어느 대학에 어떻게 갈 것인가?" 하는 친구들끼리의 담론을 시작하고 있었다.


변치않는 생각 중 하나는 삶이 경직된다 싶으면, 그냥 두지 말고 소주 한잔으로 그때그때 풀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번잡한 사연을 떠나, 살면서 뭉치고 맺힌 게 있으면 풀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삶의 응어리를 푸는 데 소주만한 처방이 또 어디 있으랴? 허나 당시엔 삶의 응어리가 채 뭉치기도 전에 매일매일 마시는게 일이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취기에 하루를 시작한다. 때마침 대관이의 어머니께서 "라면 다 됐으니 와서 묵고 놀아라" 말씀 하신다.


우리시대 진정한 어머니였다. 아들의 내신성적보단 인간 됨됨이에 목숨을 거신 분이였다. 우린 늘 대관이의 어머니를 보면 90도 인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밥 값 한번 못드린것이 참으로 후회스럽다. 대관이의 어머니는 2012년 치매와 합병증으로 돌아가셨고 난 그 때  울었다.


당시 나와 매우친했던  영권이는 내가 아무생각이 없다는걸 눈치를 챈 것인지 나에게 이런저런 훈수를 둔다.
 '전산과(당시 전자계산학과 지금은 컴퓨터공학과) 어때?'


나는 전자계산학과가 무엇을 하는 학과였는지도 몰랐고 그저 머리 좋은 친구가 가라고 하니 그곳에 원서를 쓰게 된다. 그 무릅 홍콩 느와르 영화가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을 즈음이니 감수성 쩌는 시기에, 성냥개비 하나물고 있는 주윤발을 흉내 내며 흔쾌히 '그러지 머' 하며 쿨하게 답을 했다.


다른 친구 대관이와 경석이는 대학을 가지 못하면 가난의 대물림이 내 후대에도 연장된다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가오’ 하나로 이 험난한 세상 살아가겠다는 '무대포' 뿐이었다. 그래서 난 친구의 한마디 말에 , 대구에서 가장 공부 못 하는 전문대인 경북실업전문대라는 곳에 야간으로 입학하게 된다. 원서만 내면 대한민국 국민 누구든 이유 불문하고 다 들어가는 곳이었으며 학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곳이였다고 난 기억한다. 그러니 내가 제도권교육에 대해 좋은생각을 할수는 없었다.



대학을 가서도 내 가치관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잘 나간다고 생까는 놈 있으면 찾아가서 박살로 응징해야 하고, 어설프게 힘이 없는 아이들을 괴롭히면 똑같이 응징해준다" 그것이 사전에 정의된 '남자의정의'로 생각하며 낭만적 연애만을 꿈꾼다. 야간이니 더욱 그러했다.


어쨌든 공부란, 해야 하는 것인 줄은 알았지만, 나는 해도 안 되는 줄 알았다. 제도권내의 공부는 나에겐 의미가 없었다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사실 열정과 노력을 하지도 않고 내 스스로 만들어낸 괴변에 불과했다.


더불어 부모의 부를 대물림하지 못한 불운한 이들은 어느 세대에 속하든 사회 밑바닥에서 평생 힘겨운 삶을 살아갈 각오를 해야했다. 그러니 공부보단 차라리 몸을 쓰는게 낫다고 생각한 건 어쩌면 당연한 생각의 결과일 수 있다. 그런데 비록 수준미달 볼품없는 전문대였지만 첫 사랑의 소박한 시작을 이루게 해 준 곳이었고, 대학생활의 낭만을 알려준 곳이었다.


졸업전 까지 학점은 그야말로 하향평준화로 일관했고 공부엔 원래 관심이 없었지만, 더욱 격렬하게 관심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대학생이 아닌가, 스스로 학생증에 취했다. 스스로 주문을 외우고 다녔다.합법적 미팅이 이루어지고 미팅의 연속된 나날이라고 해도 누가 머라고 할 사람이 없던 시기. 사실 그 전의 미팅이나 이성의 만남은 엄연한 범법행위로 규정되곤 했다.그렇게 나의 전문대 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실 다른 곳에 있었다.


돈이 없었다. 학비가...



가난의 대물림이 나에게 준 선물은 지독한 고생. 그 고생 끝에 신분상승 기회라는 건 대한민국 자본주의 사회에선 일찌 감치 사라진 한 마디로 "개천에서 용나는 시기" 는 이미 물 건너 간 단어였다. 단지 의식주가 해결되고 찌질한 애욕의 욕구만 해결 된다면 그리 나쁜 청춘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학비는 스스로 마련해야 했고, 잠잘 곳 까지도 더불어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최악이지만 그땐 참 아무생각없었기에 극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자리하고 있는 대구 수성구 사거리의 가스 충전 주유소에서 난 숙식을 하며 야간 대학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정신적 지주였던 형의친구 원기형을 통해 난 가스충전소에서 일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래서 새녁 4시부터 아침 8시 까지 일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학비를 충당하기 시작했고 학교에서 나의 첫 사랑을 만나게 된다.


일 년을 따라 다녔다.


당시 그녀의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끊임없는 나의 구애에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그렇게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다. 함께 밤도 지세우고 가난한 부모욕을 함께 해댔지만,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건 절대로 가난을 벗어나는 희망을 포기하진 않았다.


난 그곳에서 내 자신의 처지와 싸우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사회를 조금씩 알기 시작한것 같다. 나의 현실에 대해 정확히 알아보니 밤에는 참으로  많이도 울었다.그 때쓴 일기는 어디갔는지 찾을 수가 없지만,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를 다니며, 그 때 배운 컴퓨터 코딩실력으로 서른넘어 까지 생계를 유지하게 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등록금을 내고 나니 밥 사먹을 돈이 없었다. 더군다나 반찬도 없다. 그냥 우유에 밥을 말아 먹으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구나" 라는 걸 또 느낀다. 돌이켜 보면 아마 그때부터 나의 진짜 삶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비록 눈물로 시작했지만 그 눈물이 오늘을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그 시간 이후 단 하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내면이 강해지는 일. 그것이 전부였다.


[군대]


스무살, 1학년 한 학기를 마칠 무렵 영장이 나왔다. 군대를 가야만 했다. 시력이 좋치않아 방위로 판정 받았지만 난 군 의관에게 사정했다.


"집안 사정상 출퇴근이 안 됩니다. 그냥 입대시켜 주십시오." 그러자 군의관은 “이 새끼 미쳤구나 야! 그냥 집에가. 집에 돌려보내줘도 지랄이네~" 그 말을 듣는 순간 화가 났다.


“누구는 출퇴근 하고 싶지 않냐?"


 출퇴근할 집도 여력도 없는데 나 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심장이 쫄깃해지고 눈물이 수돗 물처럼 튀어나왔다. 눈물을 뒤로 한 채 나는 다시 애원했다. “그냥 보내 주십시오. 지원하겠습니다" 그렇게 신검을 통과하고 군대 갈 날을 기다렸다. 군대 가기 전 문득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들었다. 그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있다.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때가 슴 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허나 난 아쉬움 따위는 없었다. 당시 아버지는 사업실패 후 현재의 주거지에서 그리 멀지않은 경남 양산의 어느 허름한 양계장에서 닭똥을 치워가며 생계를 유지하고 계셨다. 그곳에 들러 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뒤로한체 그렇게 현실을 도망치듯 군대를 갔다. 신병교육대에서 3개월가량 훈련을 마치고 나면 부모님을 모시고 퇴소식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맹호부대 교육대는 사단 교육대가 따로 있을 정도로 부대규모는 제법 큰 편이다. 신병교육대를 졸업하기 한 달 전 부모님께 편지를 쓰라고 조교가 지시 한다. 예외는 없다. 무조건 써야 한다. 안 써도 이유가 분명해야 하며 타당치도 않은 이유를 거들먹거리면 구타만 더 늘어날 뿐이다. 허나 편지를 쓰려니 한숨부터 나왔다. 부모님이 올 형편이 못된다는 걸 알고 있으니. 모두들 오는 신병교육퇴소식에 나만 못 오신다고 생각을 하니 나의 처지가 처량했다. 자유시간이 되어서 밖에 혼자 나가서 울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서러워서, 이 삶이.


왜 난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야하는지 왜 이런 환경에서 태어 났는지 그저 슬플뿐이였다. 눈물밖엔 나지 않았다. 어느덧 퇴소식은 순식간에 다가왔고 식이 마치고 부모님과 함께 점심 먹는 시간이 다가왔다. 나와 친하게 지낸 목포 친구가 나를 부른다.


“울 엄마가 인삼에 꿀 재온게 있는데 후딱 와서 같이 묵자" 순간 그 엄마를 보니 엄마가 아니라 할머니 인 것 같았다. 그 녀석의 배려에 어느 곳에 있어야 할지 모르는 난, 그남아 자리에 앉을 수가 있었고 그렇게 자리에 앉아 인삼이든 꿀통에 숟가락을 넣고 한줌 들어 올려서 먹는다. 고마움과 서글픔이 교차한다. 또 눈물이 난다. 울고 있으니 그 친구는 자리를 말없이 비켜준다.


그렇게 신병교육대를 수료하고 자대배치 받아 그 곳에서 난 평생의 선배로 지내는 두 명의 선배를 만나게 된다. 20년 동안이나 친형제보다도 더 가까이 지낸...


군에 있는 동안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하나는 군대월급을 모아서 어머니의 시계 선물을 산 것. 여태껏 잊을 수가 없는 것이 꼬깃꼬깃 모은 코뭇은 돈을 PX(군 대내 편의점)에서 최고급 시계를 어머니에게 선물해 줬던 기억은 잊혀지질 않는다.그리고 또 하나는 비로소 조금씩 철이 들기 시작한다.


난 병장 휴가 때 모은 월급으로 어머니에게 시계를 선물하고, 군대에서 처음으로 책을 접하게 된다. 그 전에는 문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설이며 에세이며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자 세상이 다시 보이게 되었고 군대를 제대 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금씩 감을 잡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독서의 후폭풍은 만만치 않았다. 처절한 자기반성과 후회가 동반될줄 몰랐다. 밤에는 뒤척이는 날들이 자연스레 많아졌다.



친구의 임신



쿠퍼액이라는 것이 있다. 난 이것을 사십이 넘어 알게 되었지만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이것은 남자가 성적으로 흥분할 때 고추에서 분비되는 소량의 액체인데 이 소량의 액채만 으로도 여자가 임신을 할 수 있다. 기이한 일이지만 사실이다. 그 조그만 분비물에서도 올챙이들이 살아 숨 쉰다.


나 역시 두 딸을 키운다. 어른들이 가장 우려하는 건 성장기 소녀의 원치 않는 임신이다. 임신만 하지 않으면 섹스를 하건 어쩌면 개의치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스스로 철저하게 피임을 하고 나름 응급처방약을 가지고 대응을 하더라도 남자와 오랫동안 사귀게 되면 남자가 콘돔 없이 섹스를 하는 날이 늘어간다. 심지어 생리 중에도 ‘허락’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이 남자다. 콘돔만큼 쉬운 피입법이 없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남자들이 세상에 꽤나 많다.


나 역시도 그것이 자랑스러운 남성 성 인줄로만 알았다. 어쨋든 남자가 사귀는 여자에게 임신을 하면 책임을 지겠다고 말은 하지만 뭘 책임지겠다고 하는지는 사실 알 수 없다. ‘결혼’해서 아이의 양육비를 부담하는 것을 일부 ‘책임’의 범주로 생각한다. 만약 여자가 계획하지 않는 임신을 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는 남자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 밖이다. 어쨌든 여자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는 경우 임신3주차 정도가 되면 아기집이 보여야 되며 피검사 임신호르몬 수치 등을 점검해 봐야 한다.


여기서 경우의 수는 두 가지 있다. 임신이라고 해서 서둘러 결혼을 한다고 치자. 알고 보니 자궁외임신이거나 자연유산 이라도 되면 누가 그 인생을 책임질 것인가. 일단 아이를 지우고 나면 미안한 마음에 여자에게 더 잘해줄 지는 몰라도 별의별 소리를 다 들어야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다른 하나 낙태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임신중절을 한다고 해서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거나 책임감이 결여된 사람들이 아니다. 다만, 낳아서 키울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것뿐이다.


결혼한 남녀도 아기를 낳아서 키우는게 쉽지 않는 것이 세상이다. ‘워킹맘’ 이라는 단어는 있어도 ‘워킹파더’라는 단어는 없다. 여자에게 있어 임신과 피임에 관한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며,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여성도 임신중절을 한 여성도 모두 비난받지만, 그 비난은 남자에게 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사회의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임신과 피임은 무엇보다 여자 스스로 절실하게 생각해야 하는 문제 이며 남자역시 그 책임을 다 해야 하는 것도 알아야한다. 허나 그 당시에는 나는 몰랐다. 왜 그랬을까?


제대 후


그렇게 난 죄의식 속에 20대 중반을 보내게 된다. 그래서 였을까? 여태껏 난 내 안의 온갖 결핍과 불안을 정면으로 대면 하지 않았다. 지금의 생각이지만, 그때 난 내려갈 수 있는 최고의 밑바닥을 보길 원했고 그것을 느낀 후에는 서서히 비상을 준비 했던것 같다. 어찌되었건 난 20대에 '내 안의 별'  을 찾는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고 생계유지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한다.

이후 전문대라는 자격증만으론 내 열정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20대의 후반, 찌질한 청춘에 이별을 고하고자 나는 편입을 택하게 되었고 그렇게 난 4년제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인 나의 동반자를 만난다.


속도를 올려야 할 때는 언제인가. 


성공의 디딤돌이 되어준 실패의 경험은 무엇인가? 이십대의 경험은 훗날 나에게 어려움이 있더라도 극복할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을 심어준 것에있다. 사실 이 책을 쓴이유도 고통 뒤에 찬란한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고통을 사랑하라”


고통을 사랑하라는 말은 자신에게 가하는 채찍질이 아니다. 모든 성장에는 불편이 따른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메세지일 뿐이다. 우리는 힘겨울 때 돌이켜 보면 감당할만한 스트레스였음에도 피하려했다. 그럴 때, 자신에게 어떤 방식으로 말을 거느냐가 인생과 성공에 큰 도움이 된다.
따라서 강력하게 조언한다. “고통을 이 길수 없다면, 고통을 사랑하라”


고통은 필연이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다. 당신이 달리기를 하 면서 아픈 것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더 견딜지 말지 는 당신 자신에게 달려있다. 성공으로 가는 길은 나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에서 출발한다. _『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팀페리스』 중에서.




3편 나의 삼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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