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나의 삽십대
삶은 성공이 아닌 성장의 이야기다. - 『인간의 품격/데이비드 브룩스』
난 마흔의 나이에 들어가기 전, "성공은 곧 돈" 이라는 일차방정식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나머지 주변에 붙는 수식 어구는 내 사전에 의미도 없거니와, 그 만큼 돈을 벌지 못해 애써 꾸며낸 궁색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보다 사회적 성공이 우선이라고 믿고 있지만, 진실은 가족과 함께하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집보다 일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집에 일찍 들어가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내 생각에 때때로 동의해주지 않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분명하다.
가족이 더 중요 하다는 것.
그렇게 나름의 답을 정의한 이유는 삶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할 이들이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다름 아닌 가족의 행복이 아니던가. 그리고 두 번째는 ‘대부분의 사람 들은 사회적 권위가 정해준 안정적인 길을 성공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성공하는 삶이라고 믿지만, 진실은 권위에 의해서 만들어진 경쟁에 삶을 허비하기 보다는 나 자신의 전인미답 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 성공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나이 드는 재미를 솔솔찮게 느껴가는 즈음에 나 스스로의 결점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남과의 비교가 아닌 오로지 나 자신의 삶의 궤적 안에서 정의할 수 있는 결점과 과오들을 찾아보고자 시도했다.
이제 삽십대 이야기를 시작한다.
30대 초반에 나는 상당히 거칠고 사나웠다. 그 내면에는 인정욕구가 가득했고 더 깊은 안쪽에는 불안과 슬픔이 혼재 되어 있었다. 그래서일까. 늘 마음속엔 학창시절엔 잘나가서 모두들 알아서 기어 줬는데 여긴 내가 가장 초라해 보이기 시작한 곳이었다. 미치도록 대기업을 가고 싶었다. 그것이 모든 것으로부터 인정받는 유일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만이 ‘지금 내가 당신들 보다 못한 이유’를 최대한 말 없이 멋지게 꾸밀 수 있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내가 나온 대학의 수준으론 대기업에 취업하기 힘들었고, 진짜 나의 실력은 나와 한 시간 일 해봐도 실력이 들 통 나기 마련이다. 내가 가고 싶은 허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만큼 난 자주 추락했다. 그럴 때마다 자괴감과 우울감에 허덕였고 내 몸을 괴롭히거나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곤 했다.
세상이 왜 날 알아주지 않는가에 대해 원통해하고 절망했던 시기였다. 누군가의 인정과 사회적인 지위와 명함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존감을 발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들의 시선과 그들의 칭찬과 군데군데 떨어진 말 조각들을 통해 나를 지탱하려고 했던 것이다. 나의 상처, 나의 빈틈까지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그것이 나를 더 높이는 힘이라고 생각 하지 못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타인의 칭찬과 인정을 갈구했던 시기였다.
누구나 인정 욕구가 있다. 하지만 돌이켜 보건데 문제는 칭찬을 바라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인정받지 못했을 때 어떤 행동을 스스로에게 하느냐이다. 그것이 삽십대 나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점이였다.
30대 초반 결혼을 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임심을 했다. 비록 팍팍한 살림살이 였지만 남들만큼 열심히 살려고 발악과 노력을 겸하고 있었다. 아내가 임신 후 6개월 정도가 지났을까? "푸른 색 계통의 옷을 준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라는 의사의 이야기에 사내아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경남 양산에 계신 부모님에게도 이 사실을 전했다.그리고 난 아내 몰래 모종의 계획을 준비했다.
첫 아이에 대 한 예비아빠로서의 준비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말없이 조용히 흘러갔다. 출산일 즈음에 아내는 갑작스런 하혈로 다니던 병원으로 급하게 달려가게 되었고 난 당시 업무를 하고 있는 중이어서 저녁에 가겠다고 말을 해 놓았던 터였다. 옆에 장모님이 계시니 별문제는 없을 것이라 는 안이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급하게 오라는 전갈을 받았고 난 급히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폭풍우에 대해선 그 어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간호사가 나를 부른다. 문득 TV 에서 본 모습이 재현된다. 의사는 간호사를 나가라고 말하고 미안 한 듯한 표정과 목소리로 나에게 말한다.
"제왕절개로 아이를 출산시킨 후 아이가 엄마의 태변을 먹은 것 같습니다. 너무 많은 양을 먹어 기도가 막혀 지금 인큐베이터 안에 있습니다. 최대한 조치를 취하고 있고 위급한 상황인 만큼 대기실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난 그때 까지도 "충분히 그럴 수 있구나. 나아지겠지" 라고 생각했다. 정말 무슨 눈치라도 챘어야 하는 건데, 난 어리석게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렇게 병원에서 기다리는 2-3일 동안 병실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는 아내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당신이 좀 알아봐서 나한테 이야기 좀 해줘" ... 라고 말한다.
난 할 말이 없었고 아직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내에게 현재의 상황을 설명 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인것 같다. 서서히 심장이 쫄깃해져 오고 있었다. 심장의 두근거림과 계속되는 한숨들. 혹 지난날 나의 과오로 신은 나 에게 응당한 댓가를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했다. 난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마음속 기도를 외쳤다. 그리고 용서를 구했다. 과거 나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 한 번도 종교를 가져 본 적 없는 신에게...
그렇게 가슴을 졸이며 아이의 인큐베이터안을 지켜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이해 할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잘못해서 신은 나에게 이러한 고통을 주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잘못을 했는지 꼼꼼히 따져 보았다. 누군가에게 사랑의 아픔을 한 번 준게 있는데 그것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질풍노도의 시기에 고고장 다니려고 코 묻은 돈 뺏들어서 유흥 비로 썼는데 그것이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 응당의 댓가인가. 하늘에 대고 목놓아 울면서 물었다. 메아리 없는 울림 속에 내 마음속으로 난 선을 하나 그었다.
신은 없다.
설사 신이 있다면 참으로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뚜렷이 새겼다. "난 당신과 관계가 없소."
그렇게 하늘로 아이를 보내고, 내 가슴으로 그 아이를 묻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 처음으로 이 글을 쓴다. 고통의 시간이 셀 수 없이 쌓이다 보니까 임계점(臨界點)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시작한다. 의식이 확장되는 순간이랄까. 지금은 모든 고통이 나를 공부시킨 거라고 받아들이는 지점. 한 인간으로 성숙하기 위한 여정이었다고. 원망을 내려놓았다. 아마 그런 풍파를 겪지못했다면 세상 잘난 체하며 얌체처럼 살았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내 어머니가 평생 새벽마다 부엌에서 대접에 찬물 떠 놓고 칠성 기도를 올리진 않았지만, 간혹 어머니의 말을 들어보면 한 달에 한번은 꼭 절에 가서 자식의 앞날에 대해 불공을 올렸다고한다.생각이 어릴때에는 "기도한다고될 일인가?" 라는 비아냥거리는 생각부터 때로는 "다른 사람들 기도 다 들어주고 내 차례가 올 즈음이면 벌써 늙었겠다" 라 는 소심한 생각도 들기도 했다. 허나 궁극에는 "인간으로서 저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며 사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으로 변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변치 않는 건 "신에 대한 간절한 마음 과 간절한 기도"를 아무리 애원해도 신께서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는게다.
힘겨운 일이였다. 그런데 당시에 난 돈에 대한 친절한 노예로서 내가 하는 일 이외에 부업으로 다른 회사의 소프트웨어 를 개발해 주고 있었다. 당시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 소프트웨어 개발납품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게 난 다시 일을 해야 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눈의 암" 이라고 하는 '포도막염' 이라는 것을 걸리게 된다.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에 바이러스는 자신의 몸중 가장 취약한 부분을 가차 없이 공격한다. 내 신체의 치명적 약점은 눈이었고 바이러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난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지만 사실 그땐 그렇게 신경을 쓰진 않았다. 바닥으로 몇 번을 내려가 보면 슬프기는 하겠으나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난 치료를 받으면서 소프트웨어 개발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게 된다. 낮에는 회사 일을하고 밤에 집에 돌아오면 다시 아르바이트 소프트웨어 개발을 새벽까지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한 쪽 눈만 뜨고 일을 했던 시기.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서 깊 이 있게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짧은 생애.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리고 한 가지 깨닫게 된다. 생명 자체의 연장은 나에겐 의미 없음을 느끼게 되었고 삶에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혹 자살을 하게 된다면, 부모님이 슬피우시는 모습이 상상이 되고 난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상상하며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한 것이 억울해서 안 되겠다 싶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게 된다. 그렇게 차츰 눈도 나아지고 솔솔찮은 아르바이트 비용 덕분으로 통잔의 잔고가 조금씩 쌓여 갔다.
여하튼 사람사는게 다 상처의 연속이다.
어렸을 때 마음은 깨끗하고 구김살이 없는 명주천 같다고 한다면, 나이가 들고 먹고 산다고 발버둥 치면서 마음이 걸레가 된다. 누더기 처럼 여기저기 터져 있고, 찢어져 있다. 이 누더기를 다시 원상태로 회복하는 방법이 바로 자기 자신과 의 깊이있는 내면과의 조우다.
가슴에 피멍이 들어 있는 사람의 색채는 여럿이다.
아픔을 당당히 이겨내고 순수한 사람도 있지만, 변질된 간첩도 간혹 있다. 병을 앓아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을 이해하듯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는 것은 힘들다. 그래서 난 아픔을 경험해 본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 삶의 궤적을 스스로 안는다. 그렇다고 현재의 내 모습이 "아! 진짜 고생을 많이 했구나."
그러한 노력의 대가로 "너의 오늘이 있는 것이구나." 이런 생각들과 싸구려 동정심이나 타인에게 구하려고 이런 글을 적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열씨미" 만으로 살아서 지금!! 잘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연과 어머니의 소박한 기도 그리고 아내의 내조, 자신의 노력 이러한 것들이 쓰리 쿠션으로 어우러져 결실이 된 것이지, 혼자만의 노력으로 지금의 자신이 있는 건 아닐 게다. 내 자신의 운명에는 진실로 겸허해야 하며 모두 다 내가 노력해서 된 거라고 우기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 일만 없더라면’ 정말 행복했을 텐데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살아가면서 여러 장애에 부딪히며 분개하기를 다수였다. 그러다 어느 날 삶, 그 자체가 장애물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장애물을 ‘받아들이는 실력을 향상’ 시키는 것이다. 분노나 좌절 대신 평온하고 신중한 반응을 찾고, 방해를, 문제 해결의 기회로 보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강력한 지혜를 얻게 된다. 이 같은 노력이 ‘인생의 탁월한 답’ 을 찾는 사람들의 공통점 이다. 물론 지금도 나는 종종 좌절한다. 하지만 이를 한 단계 더 올라설 기회라고 되새기면 대부분의 갈등은 지금껏 생각해 왔던 해결책을 시험할 기회로 재발견될 수 있다._제너 레 빈/컬럼비아 대학교수 컬럼 중에서.
다음 편 : 나의 사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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