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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균 Feb 12. 2017

나의 사십 대

마흔여섯을 넘어 마흔일곱을 시작하며

40대 에 들어서


불혹(不惑)을 지나 지천명(知天命)을 향해 달리는 '나'를 관찰의 대상으로 삼아 사유를 자유롭게 실험하고 정리해 보려고 한다.


몇 권의 책을 통해 억지로 인생의 교훈을 얻었다거나 몇 편의 영화를 통해 삶의 진정성을 깨달았다는 실없는 소리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지상낙원은 현재에 있던지 아니면 없다'


라는 문구를 격하게 공감하는 한 줄을 깨닫는 데에는 삶의 주름살만큼이나 꽤나 많은 관찰과 사유의 힘이 필요했다.


갓 사십 대 중반을 넘었다.

이제 사십이라는 나이를 스스로 알아갈 수 있을까?


사실 불혹이던 지천명이든 숫자가 주는 부담감 보단


'어떻게 하면 내면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라는 삶에 대한 강렬한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 때라서 숫자에 묵이 매였는지도 모르겠다.

교과서에 나오는 행복은 나의 행복이 아니다.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행복이 나의 행복이고 나만의 행복이다.


행복이란 강가의 부드러운 물결에 기분 좋게 흔들리는 배와 같다.


내면 깊은 곳의 가볍고 즐거운 리듬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살랑살랑 부는 내 행복도 두둥실

나만의 리듬으로 걸어가는 게 중요한데 난 여태껏 남의 발걸음에 맞추다 보니 늘 걸려 넘어지려고 했다.

서둘러 어른이 되는 것보다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이 중요함을 더없이 느낀 마흔 이였다.


세상이 뒤집히는 엄청난 재미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런 재미는 오히려 삶의 리듬을 망가뜨릴 뿐이다.


다가올 내일의 작은 변화에 대한 기대로 오늘의 삶에 잔잔한 리듬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이 같은 기분 좋은 마음의 리듬을 난 '설렘'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작은 설렘으로 뭉쳐진 삶.


그리고 단조롭지만 단조로움 속에 질서가 정연한 행복은 철저하게 음악적이다.


나에게 40대의 키워드를 뽑아내라고 한다면 난

"불안", "늙음", “새로운 도전-창업", “내면의 관찰" 그리고 마지막으로 "풍요로운 삶"이다.

이 5가지 단어를 호주머니에서 건질 수 있었다.


'불안' 그것은 인문적 숙성과정을 거쳐 성장의 도약이라는 얄팍한 믿음으로 내면의 불안을 어쨌든 극복하려는 순간의 연속들 이였다.


그 과정에서 창업이라는 과제를 수행했던 것.

돌이켜보면 큰 모험이었고 만약 그때 결심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엄두도 못 낼 일임은 자명한 듯하다.


[새로운 도전]


'창업'이라는 결심을 하게 된 용기는 다름 아닌 두려움과 내면의 나약함 이였다. 조급함을 하나 더 더하라고 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탈이 날까 두려운 실력에 대한 공포감도 있다.


"앞으로 나이가 들어 이 회사에서 임원이 될 수 있을까?”
"회사에 앞으로 10년 동안 더 다닐 수 있을까?"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물음이었다.


우산을 들고 걸아가다 빗물이 속살을 살며시 스며들여 나도 모르게 옷이 젖는 것처럼 생각의 끝은 내가 나 스스로도 모르게 빗물이 속살을 파고드는 것처럼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은 나를 힘들게 했다.


나이의 비린내를 풍기기도 싫고 가난의 대물림 만큼은 추호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나에겐 '나이 듦' 이란 참으로 무거운 단어였다.

비 오는 어느 날 우산을 들고 걸아가다 빗물이 속살을 살며시 스며들여 나도 모르게 옷이 젖는 것처럼 나이도 그렇게 살며시 스며드는 그런 것이 아닐까?


단순 명료한 질문이자 명확한 답이 필요했다.


그리고 실제 나이가 들수록 체력과 자신감은 떨어지고 꿈도 작아지기 때문에 늦쳐선 안된다는 긴장감이 늘 생활 속에 자리 잡고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마흔을 불혹이 아닌 부록이라 부르든 , 두 번째 스무 살이라고 하든. 말 가지고 장난치는 듯한 느낌 보단 실제로 다가오는 피로감과 두려움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인생의 전반전을 어떻게든 잘 이끌어왔다면 더욱 중요한 건 인생의 후반전을 어떻게 보낼 것이냐도 더욱 중요한 문제였다.


난 일주일 가량을 고민을 하고 또 고민을 했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각인된 처절한 나의 가족사가 트라우마처럼 내 온몸을 휘감고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가난으로부터 탈출 욕망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틀림없는 진심이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하고 나서는 국내 포털사이트의 금융 업무담당자들과의 인연이 가장 밑바닥의 성장동력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나를 믿어주었고 그랬기에 난 직원을 고용하여 회사를 운영할 수 있었다.


난 젊은 시절에는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운칠기삼”이라는 말을 믿는다.


7년이라는 사업을 하는 동안 몇 번의 어려운 시절이 찾아왔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알라딘의 마법 램프가 마법처럼 열리든 어머니가 절에서 부처님에게 올린 수돗물 공덕의 덕인지 둘 중 하나가 방어막을 형성하여 다른 계약의 수주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떼돈을 버는 그런 엄청난 비즈니스 기회가 아니라 기존의 사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활로가 열렸다는 것이다.


그것을 무슨 수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운도 실력이라서?


우리 사회에서 빠지지 않은 공통 잠언이 하나 있다면  바로 '겸손하라' 다.


폼 잡고 싶어 그렇게 고생했는데 이젠 또 겸손하라고 한다면 환장할 노릇이지만 우리나라 사회는 다른 사람의 시기심을 자극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기심을 자극하는 순간 바로 '아웃'이다.


난 그걸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업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현재 완료 진행형이다.


[사랑과 연애]

Copylight DANIEL DEL ORFANO


결혼해 두 아이를 키우고 불혹(不惑)을 지나 지천명(知天命)을 향해 달리는 아내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낸다면 그저 '풋!' 하고 웃을 것이다.


아직도 사랑의 정체를 찾아 헤매는 이 남자를 어찌해야 하나 싶을 뿐.

당신의 그 씨잘데기 없는 낭만주의적 생각 말고 내 삶도 충분히 고단하고 불편하고 치열한데 이 놈의 남편은 여전히 철들지 않는다고 짜증을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철든 사람들은 사랑을 넘어 무엇을 하고 사나?"라는 질문에 당신은 무어라 답을 할 텐가?


사랑은 두 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농담이 편한 사이의 이성을 만나는 것과 더 이상 아내가 여자로 보이지 않을 때 중년의 허접스러운 성욕을 해결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 수도 없이 많은 돈을 지하세계로 흘려보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이다.  


사십 중 반 아저씨의 지질하고 음탕한 생각을 글로서 구구절절 늘어놓았다고 뭐라고 한다면 참으로 슬프다.

나처럼 생각하는 아저씨들은 보기보다 그냥 많은 게 아니다. 엄청나게 많다.


형제, 아버지, 삼촌, 다른 남편, 직장상사의 모습으로 주변에 아주 아주 흔하다. 대한민국이 구질구질한 이유는 바로 나와 비슷한 동질류의 인간들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본다면 삼삼오오 모여 남자들끼리 한다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거기서 그 기다.

대부분의 중년 남자가 느끼는 이 음흉함과 일탈에 대한 기대는 늘 변함없는 처음의 주제이자 마지막의 주제 이기도 하다. 이것은 역사이래 아주 오래된 질문이자 늘 품어온 남자들의 질문 이기도 하다.


난 그 해결책을 '혹성탈출'을 통해 '걸리버 여행기' 처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내 특별한 중년의 불안을 해결하는 신통한 해결책은 없는 듯하다.


우리는 이미 '고독 순응 사회'로 접어들었고 고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사회 구석구석에서 느껴진다. 신문에서 이야기하는 한국의 고령화 속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서 아니 내 주변에서 '고독'은 아직 낯선 단어다.


그 고독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바람을 통해서?

아니다.


내가 작년에 느낀 건 바로 "양립할 수밖에 없는 욕망"을 조절하는 사랑의 기술이다.


모험과 안전이 양립할 수 있을까?



여태껏 애써 만들어놓은 사랑이 넘치는 나의 가정과 그리고 소중한 아이들.


그런데 자신의 자연스러운 성욕을 죽이지 못하고 외도를 통해 평생을 함께할 서약인 결혼을 버린다면, 모험과 가정의 평화라는 두 패러다임이 아무리 둘 다 낭만적이고 매력적이라고 해도 두 가지 동시에 만족할 순 없다.

그 어느 쪽의 손실도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양립할 순 없다는 사실을 난 마흔이 지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순구 화백의 그림들.



[무위와 고독의 기쁨]


난 여태껏 고독에 대처하는 어떠한 문법도 배우지 못했다.


연금만 보장되면 다 해결되는 줄 안다. 다시 말해 호주머니에 돈만 좀 있으면 고독들이 다 해결되는가?

다들 외로워서 어쩔 줄 모르면서, 그야말로 고독에 몸부림치면서도 그게 나의 운명인 줄 몰랐다는 이야기다.  


고독한 개인의 구원은 역설적으로 개인 내면에 대한 더 깊은 성찰로 가능하다는 것이 현제로서의 결론이고 한 걸음 더 들어가 사무치는 외로움은 솟구치는 기쁨으로 승화될 때를 위해 난 여전히 더 고독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쯤이면 중년의 이 허접스러운 성욕도 깨끗이 사라지고 정신도 아주 맑아질까?

마음의 주름살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것은 역시 자연밖에 없다고도 문 든 문득 생각이 든다.

미친년 처음 목에 디스크가 생기도록 푸근한 보름달을 보는 것.  

스스로 고요한 상태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고요해야만 지혜가 생긴다.

라는 어느 불법의 마술처럼 난 달을 보며 오십을 기다린다.



[독서와 글쓰기의 즐거움]



'나는 왜 책을 읽는가?'의 질문을 던졌다. 마흔다섯에.


그에 대한 가장 짧은 답은 '풍요로운 삶'이다.


그리고 두 번째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
 근래에  던진 질문이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천천히' 읽을 것이다.


두 가지 질문은 늘 내 마음속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난 먼저 아랫사람 또는 직원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가를 찾아보기로 했다.


한 마디로 타인의 마음은 강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진리도 마찬가지다. 설득이란 상대의 나의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만드는 계기만을 줄 뿐이라는 것.

어떤 때는 화를 내면서 할 수도 있지만 결국 그것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책을 통한 깨달음에 대해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고자 한다.


진실.이라는 한 단어.


진실이란 참과 거짓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진리의 개념과는 다르다

진실은 마음속에 있는 견고한 믿음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하는 상호 소통과 신뢰 형성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산물이다. 결과이자 결과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과 진심들은 모두 소통과 신뢰를 향해가는 하나의 과정인 것들일 뿐이다.


그래서 진실이라는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된다.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와 아내는 비슷하지만 다른 교육관을 가지고 있다.

내가 True이고 아내가 False라고 가정해 보자. 내가 아내를 설득해서 내 생각을 주입시키는 것이 옳은 일인가?

물론 큰 줄기에서 그렇게 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지엽적인 문제일 때는 달라진다. 아이는 엄마와 더 많은 시간을 가정에서 보낸다. 진실은 아내가 맞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아내가 더욱 편안한 상태에서 아이를 양육하게 해주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



간혹 천천히 책을 읽을 무렵 무릎을 치는 한 줄의 문구가 내 감정을 격하게 잡을 때가 있다.


그 한 줄을 잡으려고 난 책을 읽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속에서 글에 내 감정을 밀어 넣어 보고, 화자의 상황에 나를 적극 대입시켜 보는 일. 그것이 내가 천천히 책을 읽으려고 하는 이유이다.   



때론 어떤 작가의 글을 천천히 읽다 보면 삶의 씨발스러움 을 이겨내고 바닥까지 아는 자의 냄새가 글 속에서는 느껴진다. 읽는 내내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가 없다.


장마의 지루함은 곧 가난의 질김이고, 흙탕물의 지저분함은 나이에서 오는 비린내를 이겨내리라는 처절한 노력의  흔적들 이였다.


성공이 아닌 성장을 하는 삶 속에서 그러한 과정을 거친 자만이 그런 글을 읽었을 때 느끼는 감정은 생생하다 못해 머리가 맑아지고 하얀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어떤 글은 능청과 해약이 버무려진 구수한 수다체의 느낌으로 글쟁이의 글이 아닌 노련한 아주머니의 먹물끼를 쏙뺀 구어체와도 같은 글도 있다. 바로 미원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양념 같은 글들..


그래서 난 읽는다.


읽었으면 느끼고

느꼈으면 행하자..

독서와 학습은 객관적인 앎일 뿐이다.

사색은 주관적은 깨달음이다.


바로 지혜보다 더 높은 것이 있다면 바로 느끼고 쓰며 깨닫는 것.


내가 오십에도 지향하는 가장 큰 삶의 줄기이다.


[나는 미치도록 상류층이 되고 싶다]



우리 사회에서 상류층이란 누구인가?


돈이 많은 사람일까?

아니면 권력은 잡은 이들일까?

혹은 저명한 학자나 교수들일까?

이에 관한 한 내 생각은 명확하다.


적어도 나는 돈, 권력, 지식을 지녔다는 것이 곧 상류층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첫째, 인간 이해의 천박함이 없어야 한다.

이는 다른 말로 타인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능력이다.

남이 고통받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고 오로지 정치권력을 쥘 수 있고, 사업만 잘 굴러갈 수 있으며, 자기 이름이 실린 논문만 세계적인 학술지에 실리면 된다.

뭐 이런 무심함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갑질’이다. 이런 사람들은 상류층이 아니라 상류층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다.


둘째, 과시하지 않는 마음자세이다.

타인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행동을 하면서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의와 선행을 과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또 다른 이익을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남을 위한 "생각"이고 "행동"이라고 말하면서 결국은 나의 이익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내가 생각하는 상류층 또는 ‘어른다운 어른’의 조건은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남을 위한 생각과 행동 그리고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타인에 대해서 무심하지 않기’,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이다.


난 그렇게 바랬던 상류층이 되지 못했다.


하나 최소한 나의 아이들에겐 상류층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

내가 생각하는 가정교육의 본질은 교양과 삶의 태도를 가르치는 전인교육이 되어야 한다.


12년의 기나긴 고생 끝에 대학에 입학한 이들에게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 세상이다. 대학 졸업 후 우리 아들 딸들의 직업 안정성은 해가 갈수록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다.이전 세대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직장의 든든함이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겐 쉽게 허락되지 않는 현실속에 우리와 젊은이들은 공존하고 있다.


무너지는 공교육과 낮은 직업 안정성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누가 아이들을 부모의 등골을 빼먹는 비싼 사교육의 전쟁터로 내몰고 있는가. 누가 젊은이들을 안정적인 직장에 뿌리내릴 수 없도록 하는가. 왜 이전 세대는 당연하게 누린 것을 이들에게는 사치스러운 꿈으로 만들었는가. 무엇이 이들의 소박한 희망을 망가뜨리는가.

암기 위주의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교육이 문제일까. 낮은 급여와 고된 업무 강도가 진짜 이유일까. 오래도록 이 의문에 답하고 싶었다. 이 순간 사회는  개인의 잘못된 부분은 자기자신이라고만 하다.정말 그런가? 결국 내가 찾아낸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가정에서 배워야 할 삶의 태도이다.

그것은 동의되지 않은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불합리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으로 그리고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으로 삶을 대할 수 있는 내면이 강한 사람으로 키운다면 나의 아이들은 분명 상류층이다.


나는 상류층으로 아이를 키우고 싶다.

비록 나는 그렇게 못되었지만.



[50대를 준비하며]

불안은 아이의 투정과 같은 복잡한 정신상태이다.

옷이 한 벌 밖에 없는 여성들이 매일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하지 않는 것처름, 꼭 필요한 음식만 절제하며 먹는 사람들은 내일 무얼 먹을까 고민하지 않는다.


만족감이 커질수록 욕구도 커진다는 법칙에 따라 당연히 가진 것이 많을수록 원하는 것도 많아지는 법이다.

일반적으로 오늘이 든든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 자식과 그 자식에게는 무얼 물려주어야 하는지 애꿎은 미래에 대한 걱정을 공연히 사서 한다.


나 자신의 삶을 확립한 사람은 지위나 역량 그리고 세련된 정도에 대한 근심을 품을 리 없다.


나에겐 내 몸에 꼭 맞는 내면의 법칙이 필요하다.


그것을 찾았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그 앞에 겸손해지면, 존중과 자발적인 복종을 통해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지리라.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외적 성장보다는 결함 많은 내면의 자아와 끊임없이 투쟁하며 성장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 이 라걸 알게 되었다.


살아보니 마음이라는 것이 온라인 강의나 수업시간에 배워서 되는 건 아니라는 것.

그건 가르쳐 줄 수도 이메일로도 전달받거나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알 수 없다.

오로지 내면의 목소리를 고요하게 들을 수 있을 때 그때 마음의 본모습을 볼 수 있음을 느꼈다.


오늘 내가 남에게 보이는 모습은 평생을 걸쳐 갈고닦은 나의 모습이며 그 모습은 그 사람의 평생에 걸쳐 노력으로 완성된 현재의 모습이다.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를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바로 겸손과 절재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고 살아간다면 내 오십 이후의 삶은 그리 나쁘지 않으리라.

나이 들어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누군가에게 모욕을 받아도 위엄을 잃지 않을 것이며 자극을 받아도 자제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오십이 된다면 내가 세상에 대고 그 어떤 것도 증명해 보일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성취한 삶의 금전적 업적보다 한 인간으로서 부족한 자신을 더 나은 자신으로 만들고자 하는 내적 노력의 결과를 부단히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며 사는 삶이 되기를 다시 한번 기원해 본다.  






잘 늙고 있는가?



나의 십 대 https://brunch.co.kr/@k01124955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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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십 대 https://brunch.co.kr/@k01124955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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