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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균 Jan 20. 2016

나의 성장기

아버지 이야기

누구나 그러하듯 나에게도 아버지가 있다. 

자신의 성공적 삶을 통해 아버진 자식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수치심과 절망감으로 노년의  많은 시간을 회한으로 보내게 되었다.



이제 시작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나의 부탁에 의해 아버지 삶의 성공이야기가 아닌 성장의 이야기를 써 달라고 난 부탁했다. 당신의 삶의 궤적을 깊이 들여다 보시라고 난 권하였고 아버진 내 의사를 수긍해 주셨다. 그러한 과정에서 귀하게 얻은 아버지의 목소리다. 


이 글들을 통해 내가 느낀 건, 현명함 이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큰 임무는 좌절감을 감내하며 그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보살펴보고, 성찰하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의 첫번째 편지] 

나는 일본 오사카에서 5남매중 막냉이로 태어났다 

형은 워낙 공부를 잘해서 대학까지 장학생으로 졸업을 했는데 형 다음에 누나가 3명이 태어났으니 어머님이 나를 극진히도 사랑 했었다. 7살 되었을때 양 무릎 관절염을 알케 되었는데 일년동안 병원을 아무리 다녀도 고치지를 못했었다.그러다가 해방이 되어 한국에 오게 되었는데 연락선을 타고 오든중 나는 무릎이 퉁퉁부어 아프다고 칭칭 대니까 형이 나를 바다에 던져 버리라고 한것을 어머님이 그럴수 없다하고 한국에 온것이다 3년동안 한약과 침으로 다리를 완치 했었다.


한국에 와서보니 우리 집은 선산여관으로 2층 집이였고 주위에는 난민촌으로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어느날 하루는 여관 투숙객중에 한사람이 나에게 사탕을 많이주어 동내에 나가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곤했었는데 우리집도 크고 먹을께 많으니 동내 아이들의 선망 대상이되어 5년동안 그렇게 자라왔으니 나는 "선택된 인간이다" 라는 자부심이 장년이 될때까지 몸속에자리 잡고 있었든 것이다. 국민 학교때는 공부도 물론 전체 학생들 앞에서 독창을 하곤 했었다. 물론 공부도 잘해서 경북 중학교에 합격을 하여 입학하게 된 것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가정이 몰락하여 제2편에 다루고저한다. 



[두 번째 편지]

나의 불행은 국민학교 5학년 때 부터 시작이 되었다  형님이 돌아가시고 한 달후에 아버지 돌아 가시니 이층집 큰 여관을 운영 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가난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 가는 것인지 깨우치지 못하고 철부지 하게 중학 시절을 보냈다. 앞에서 말한 ,선택된 인간,이란 잠재의식 속에서 고등학교를 사범 고등학교를 지원하지 않고 인문계인 경북고등 학교를 지원한것이 큰 실수 였다.

차라리 공업고등 학교를 가서 졸업하고 취직을 했으면 오늘 처름 가난을 면하지 않았겠나 하고 뉘우쳐 본다


내 귀가 난청인 것을 먼 훗날 알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태어난 운명인가 보다. 수업시간에 강의를 들어도 말을 못알아 들으니 어찌 서울 대학에 합격 할수 있었겠느냐 차라리 대학에 영문학과를 택하지 않고 건축공학과를 택 했으면 알바이트를 하기 쉬워서 졸업을 했을 것이다

모두가 다 내 못난 탓이다마는  내마음속에는 ,나는 선택된 인간이다, 라는 허구한 자부심 때문에

내 인생이 허물어져 갔든 것이다


어즈께 은미(나의 누이)가 이틀동안 왔다 갔다

내 온 신경을 쏟아서 은미와 못다한 부모의 정을 쏟아 부었으나 변한 것이란 찾아 볼수가 없어서 어릴때에 가르쳐 주지 못한죄 가슴을 여미는 구나. 그러나 현재로선 즐겁게 살고 있다니 고맙기만 하다

저마다 사는 길이 다른데 자기가 만족해 하면서 산다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지 않느냐



[세 번째 편지]

세상은 정답이 없다는 너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또한 고독을 아는자만이 가장 행복한 인간이다 라는 속담은 자기를 속이는결과 밖에 되지 않는다고 본다.  나의 조그마한 변명 같지만 너희들에게 가난을 물려 준것이 가슴을 여민다. 경영 대학원에 입한한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가슴이 뿌듯하구나

무사히 졸업하여 사회의 엘리트가 되기를 기원한다. 과거를 돌아 보기엔 현실이 너무 바쁘고 현실은 끝없는 투쟁이다. 나는 이제 나이가 들면서 생각 하는 것이 싫어지고 있다. 그저 단순하고 가벼운 생활이 좋아지는 구나


따사로운 햇빛이 온 누리에 펴지는 묘즈음 봄 날씨에  나는 요즈믐 조그마한 밭을 가꾸기 위해 마냥 바뿐 시간을 보내고 있단다. 긴 도랑을 치고 우거진 잡초들을 불에 태우고 고추나 감자를 심기위해 딱딱한 흙을 일구어

부드럽게 만들고 있단다. 네가 어릴적에 가족을 대리고 부곡 온천을 몇번 다녀오고  진해 벗꽃 구경도 갔다 왔었지. 친한 친구인 수의사인 이상윤 건축사인 이흥노 판사인 김헌무 송진훈 보험회사의 김진섭 약사인 김태랑 이민간 허흡 이 모두가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였지만 지금은 모두를 멀리하고 있으니 나 또한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이제 남은 인생을 마음 편하게 살련다 그리고 즐겁게 살려고 노력 할 것이다



[네 번째 편지]

내벗이 몇이냐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귀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내가 좋아하는 도산 윤선도의 시조다. 누구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각각의 지표가 있을 것이다. 국민학교 4학년 때에 아버지와 형님을 잃어 버리고 그 이후에 대학에 대학에 다닐때 까지 찌든 가난속에 살아 왔는데 너도 경험 했으리라 본다마는 가난의 서러움을 많이 겪었으리라 본다.


장년이 되어 사회에 첫발을 디딘것이 경찰관이 었다. 나는 천성이 예술 계통에 나가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온갖 고통을 참고 인내하는 마음이 남보다 적은것 같다. 인내하는 습관이 부족한 것을 뼈 저리게 느낀다


노래를 부르면 마음이 정화 된다고 한다 . 고등학교 때에 집에만 오면  동내 떠나 갈듯이 성학 공부를 하였다  

귀중한 고등학교 시절을 공부 아니면 성악을 했든 것이다. 고등학교 학생 성악 대회에 나가서 우승도 했는데 그때 불렀든 곡이  "돌아 오라 쏘렌트로" 였단다


대학 2학년때에 임옥식이가 경영하는 삼덕 학원이 있었는데 거기서 영어를 가르칙고 있다가 일년이 지나쓸 때에  내 대학 에 대의원이 였는데 그당시 남북 학생 통일연맹에 나도 모르게 통일 위원장에 당선되어 회의에 나와 달라고 하기에 나가 보니까 약 50명이 모여 있었다. 두세번 회의에 참석하다가 난데없이 중앙 정부 직원이 와서 나를 앞산에 끌려가서 용공단체로  문초를 받았다. 그당시 남북 학생 통일 연맹 의 서울 대생과 연세대생이 이북으로 넘어가다가 붙들린것이 탈이 였다.  군에 자원 입대한것이 그것 때문이 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이야기가있다


그 당시 전국에 남북 학생 통일 연맹이 각 대학에 존재해 있었는데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통제 위원장에 임명되어 그회의에 두번 참석을 했었단다 중앙 정부에 끌려가서야 그 연맹이 용공 단체임을 알게 되었는데.  하루 밤새도록 심문을 받았는데 몽두리를 다섯대 먼저 맞고 취조를 하드라. 그 다음날 경주에서 지원병 모집이 있어서 학원 강사도 그만두고  도피겸 경주에 갔든 것이다




[아버지의 마지막 편지]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기쁜 일인것 같으면서도 슬픈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쟁이 있으면 평화가 그리운 법이고  파괴가 있으면 그 다음엔 건설이 꼭찾아오니 이 또한 인간사에 필요한 것이 아니겠느냐


대학 시절 !  꿈많은 계절이 였지. 

학원 강사 시절에 그 학원의 원장딸이  대구대학 약학과에 다녔었는데 약  일년간 로맨스도 있었는데  남북 학생 통일 연맹 때문에 군에 입대 하는 바람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단다


중앙 정보부에 끌려가서야 그것이 용공단체이며  서울대생과 연대생 5명이 이북으로 월북하려 다가 붙들려서 유치장에 갔고 우리 영남대 학생2'30명이 취조를 받았는데 몇명이 감방 생활을 하고 있다고 인편에 들었었다

왜 내가 거기에 가입되었는지  오리무중이다 단지 그것은 용공단체 임에는 틀림없다. 군에 들어가서는 논산 훈련소에서 전 훈련병을 모아놓고서 시험을 쳤는데  그중 50명을 뽑아서 병참 보급반에 갔었는데  거기서 졸업후에 부평에 있는 제55병참창 미군 카츄사에 6개월간 근무를 하다가 원주에 있는 일군 사령부에 배속이 되었었다

너는 군에가서 고생을 많이 한걸로 기억하고 있다.


재대후 사회에 나와보니  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 가는것이 급선무 였다. 의식주를 해결 하는데는 우선 급한되로 경찰관 모집이 있어서 지원하게 된것이다.


여기에서 나의 망국론이 시작 된다고 본다

경찰관 생활이 도저히 내 성격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서 근근히 이어졌다. 하늘이 나를 돕지 않는것이다 후회도 많이 했었지.... 어느 철학자가 말 했었다. 인생에 비극은 없다고.




난 내 스스로 존경받아야 할 부모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바란다고 해서 되는것이 아니다. 난 많은 것을 소유하진 않았지만, 최소한 이력서의 덕목보다 조문弔問 에 들어갈 조문의 덕목을 더 중요하게 만들어 가고 싶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건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최소한 난 나의 아이들에게 그것 만큼은 면죄부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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