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강가의 부드러운 물결에 기분 좋게 흔들리는 배와 같다.
내면 깊은 곳의 가볍고 즐거운 리듬을 느낄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뒤집히는 엄청난 재미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런 재미는 오히려 삶의 리듬을 망가뜨릴 뿐이다. 다가올 내일의 작은 변화에 대한 기대로 오늘의 삶에 잔잔한 리듬을 유지할수 있어야 한다.이 같은 기분좋은 마음의 리듬을 '설렘' 이라고 한다. 설렘으로 경험되는 행복은 철저하게 음악적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내용인것 같다.내면 깊은 곳의 가볍고 즐거운 리듬...그리고 읽는 내내 전반적으로 흐르는 기운은 한 번밖에 없는 인생 더 외로워야 덜 외롭다는 작가의 역설적 주장이다. 그리고 작가의 솔직함을 대하는 태도 ? 태도가 곧 실력이다. 참 중요한것 같다.그의 말중 "내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것은 용감해서가 아니라 비겁하고 겁이 많아서 미리 도망친 것이다. 그리고 난 교수 체질도 아니다.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싫어한다. 사기 치는 기분이었다." 는 이야기는 내면의 솔직함을 형용사나 부사의 수식어구 없이 표현한다. 그래서 난 이 작가가 좋다.
가끔은 정말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우리 모두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여린 마음을 가지고 수 십년 동안험난한 세월을 겨우 버텨왔습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내 몸과 마음이 정상일 거라는 그 '터무니 없는 믿음'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스스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망가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성공한 사람들은 거의 다 만나봤습니다. 대부분 정상이 아닙니다. 본인만 모름니다.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 위치까지 가려고 도대체 얼마나 미친듯 살았겠습니까? 얼마나 이를 꽉 물고 벼텼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경쟁자들을 밞고 그 자리까지 갔겠습니까? 그런데도 자신의 몸과 마음이 형편없이 망가져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주위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가 가진 돈과 권력때문에 아무 말 하지 않을 따름입니다. 그러다가 다들 '한 방' 에 훅 가는 겁니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들 삽니다. 그렇게 사는게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꾸 모임을 만듭니다. 착각입니다. 절대 그런거 아닙니다. 바쁠수록 마음은 공허해집니다.
형편없이 망가진 내 자신을 마주 대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자꾸 그러는 겁니다. 아무리 먹고 살기 바빠도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놓치면 안 됩니다.트위트의 RT 나 페이스의 좋아요와 같은 값싼 인정에 굶주려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타인의 관심을 통해 내면의 깊은 상처를 잊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상처는 그런 식으로 절대 치유되지 않습니다. 먹고 살 돈이 있다고 내 외로움이 치유되지 않습니다. 취미활동, 가족과의 연대, 사회보장제도로 견딜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은퇴한 후에도 30~40년은 더 살아야 합니다.소외감 느끼지 않고, 우울해하지 않고 긑까지 잘 버틸 자신 있나요?
' 인간은 어쩔수 없이 외로운 존재'임을 깨닫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무서워 외로운 시간을 피하려 합니다. 외로움은 거져 견디는 것입니다. 외로워야 성찰이 가능합니다. 고독에 익숙해져야 타인과의 진정한 상호작용이 가능합니다. '나 자신과의 대화인 성찰' 과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가지는 심리학적 구조가 같기 때문입니다.외로움에 익숙해져야 외롭지 않게 되는 겁니다. 외로움의 역설입니다.
책 전반에 걸쳐 처움부터 끝까지 위의 논리로 치고 나간다. 외로움에 익숙해지고 고독을 두려워 하지말고 타인에게 미움받을 용기가 생기고 난 후에 이젠 외로워질 용기까지 가지라고 말한다. 삶이 팍팍해져 간다는 생각은 지울수 없다. 이제 미움받을 용기가 생길려고 하는데...에휴..
오십중반 아저씨의 찌질하고 음탕한 생각을 글과 그림으로 구구절절 늘어놓았다고 뭐라 하시면 많이 슬퍼 집니다 나처름 생각하는 아저씨들은 여러분의 형제, 아버지, 삼촌,남편,직장상사의 모습으로 주변에 아주 흔합니다. 대한민국이 구질구질한 이유는 바로 이 아저씨 때문입니다. 내 책을 통해 그분들과의 소통에서 느꼇던 황당함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난 김정운 작가의 탁월한 논리가 이러한 문장에서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참으로 잘 먹힌다. 더군다나 한국사회에서 자신을 낮추고 망가지면서 위트를 내내 잃지않는 그의 논리는 참으로 정교하다.
팔 굽혀 펴기 15번이면 다 해결된다.
일본에서 고독은 아주 자연스럽다. '고독 순응 사회'다 고독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사회 구석구석에서 느껴진다. 일찌감치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서구 대부분의 나라도 그렇다. 오래 사는 나라에서 고독은 당연한 거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의 고령화 속도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고독'은 아직 낮선 단어다. 고독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에서 고독은 실패한 인생의 특징일 따름이다. 그래서 아직 건강할때 그렇게들 죽어라고 남들 경조사에 쫒아다니는 거다. 내 경조사에 외로워 보이면 절대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토록 바쁜 이유는 고독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고독 저항 사회' 인 까닭이다. 쉬어야 하는 주말조차 각종 경조사로 길거리가 미어터지는 이 한국적 현상을 달리 설명할 수 있을까?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살게 된 개인은 그에 상응하는 혹독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바로 '고독' 이다.
수 백년에 걸친 서구의 근대화를 불과 수 십면만에 해치운 압축성장과정에서 우리는 고독할 틈도 없었다. 고독은 사치였다. 그러나 평균수명 100세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고독은 존재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고독 저항 사회'에서 고립된 삶은 '호환 마마' 보다 무섭다. 고독에 대처하는 어떠한 문법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금만 보장되면 다 해결되는 줄 안다. 다들 외로워서 어쩔줄 모르면서, 그야말로 고독에 몸부림 치면서도 그게 자기 운명인 줄 모른다는 이야기다.
고독한 개인의 구원은 역설적으로 개인 내면에 대한 더 깊은 성찰로 가능하다.고독할수록 더 고독해야 한다는 말이다. 팔굽혀 펴기를 하면 중년의 허접스러운 성욕도 깨끗이 사라지고 정신도 아주 맑아진다고 한다.
아무튼 난 아무 맑은 샘물같은 영혼을 가졌다. 팔굽혀펴기 20번정도를 하니
폴리가미
'일부다처재' 또는 '일부다부처' 를 뜻한다. '모노가미(Monogamy- 일부일처제)의 반대말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모노가미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수 천년 동안 폴리가미(Polygamy)는 보편적인 가족형태였다.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축첩제도가 존재했다. 유럽은 그리스도교가 지배한 중세부터 폴리가미가 금지됐지만, 이슬람 사회에서는 여전히 합법이다. 폴리가미와 비슷한 개념으로 폴리아모리(Ployamory)가 있다. '두 사람 이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폴리가미가 일대다의 결혼제도라면, 폴리아모리는 일대다의 연애 형태라고 할수 있다. '한 사람이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도 문화의 산물이다.
고령화 사회가 되면 일부일처제와 같은 결혼제도도 분명 큰 변화를 겪을 것이다. 일부일처제의 형태는 유지되겠지만 평생 오직 한 번만 결혼하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 될 것이다. 언젠가 부터 농담삼아 하던 '세 번 결혼해야 한다.'는 가설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될수도 있다.
미국 사회학자 어빙고프먼 이 이야기했다. 인간에게는 '여러 자아'가 제각기 다르게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이때 무대 위의 여러 자아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상대화 할 수 있는 무대 뒤의 공간이 필수적이다. 즉 분장을 하고 분장을 지우는 '배후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무대 뒤나 무대 위의 어느 한쪽만 진짜 삶이라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해서는 안 된다. 무대 위가 다양한 역활이 실제하는 삶이듯 무대 뒤의 삶도 진짜라는 것이다. 한국 남자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회적 역활을 떨어내고 차분히 앉아 생각할 수 있는 배후 공간이다. 권력관계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는 무대 위의 삶만 진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무지 숨을 곳이 없는 한국 남자들의 찌질한 반항이 뒤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앞으로만 달리기도 두려운 이 땅의 사내들은 매일 밤 지하로 내려간다.그곳에는 화장을 수시로 고치는 여인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룸살롬이 죄다 지하에 있는 거다. 흠 조금 슬프지 않은가?
내 특별한 중년의 불안을 해결하는 신통한 해결책은 없는 듯하다. 그래서 다시 원시적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마음에 빗살무늬를 긋는 방법이다. 마음이 푸근해 지고 혼자 견딜만한 사건과 이밴트를 찾는 거다.
외로우면 정말 불안할 것 같은데.
불안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부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을 공부하면 자신감이 생긴다. 몰입의 대상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 사람은 몰입할 때 재미를 느낀다. 관심의 대상이 있어야 재미가 있다. 공부의 주제, 즉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친구들 중에 ‘너는 네 맘대로 인생을 사는 게 부럽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너는 뭘 좋아하는데?’라고 물어보면 답을 못한다.
돈이 많고 적음의 문제도 아니다. 공부만큼 돈이 적게 드는 것도 없다. 지금 내가 행복한 것도 공부하는 것이 있어서다. 내적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나 만의 공부노트 나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난 이부분에 있어 작가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는다. 공부라는 건 각자의 해석에 달려있다고 본다.
담론에 보면 공부의 정의는 명쾌하다.인용해보고자 한다.
공부의 시작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오래된 인식틀을 바꾸는 탈문맥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 고 했습니다. 우리가 갇혀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공부입니다.
삶이 공부이고 공부가 삶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것이 실천이고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는 세계를 변화시키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가슴에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그래서 난 외로워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나 만의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공부 그리고 삶이 공부이고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긴 그런 공부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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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전문가의 의무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해주는 데 있다. 어려운 이야기를 어렵게 하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서양철학 전공자들은 직무를 유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이 다 알아듣는 이야기로 설명하면 '쪽팔린다'고 생각하는 전문가적 허세의 근원은 도대체 어디일까? 막연한 주변부 열등감을 이제 버려야 할 때가 됐다.
언제부터인가 중년사내들이 카카오톡으로 단체문자를 돌려 보기 시작했다. 대부분 지리멸렬한 내용이다. 문자는 대충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억지 감동인듯 해서 많이 민망해지는 이야기, 공감은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않은 우울환 회상 그리고 어슬픈 유머다. 물론 눈이 번쩍 뜨이는 흥미로운 자료도 아주 가끔있다. 누구누구 자료는 거의 예술로 승화된다.
세상사가 내 맘대로 안된다고 화 내는 것 자체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성공한' 이 땅의 중년 사내들은 자신을 둘러싼 일들이 맘대로 안 되면 불안해 어쩔 줄 모른다. 통제 강박이다. 자신의 성공을 불굴의 투지와 노력 덕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일수록 통제 강박에 시달린다. 그래서 자꾸 새벽에 깨는 것이다.
성공을 사회적 지위나 재화의 수준으로만 규정한다면, 성공은 순전히 '운' 이다. 아무리 열씨미 해도 안 되는 일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성공에는 노력이나 재능보다 성격이 더 중요하다. 일단 재능이 있어야 한다. 재능없는 학생이 '열씨미' 하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능력 없는 CEO가 '열씨미' 하는 것 만큼이나 환장하는 일이다. 나이 사십넘어 발견한 내 재능을 보면 더 그렇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름의 인생을 성공한 사람들은 "인생은 부정적인 과정을 얼마나 즐길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 난다" 는 간단하지만 중요한 논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성격도 매우 중요하다. 공부도 성격이다. 대개 성격 못됐고 집요한 아이들이 공부 잘한다. 나의 큰 딸은 성격이 좋다. 좋아도 너 무 좋다. 매일 똑같은, 에측 가능한 상황에서 어떤 새로운 기회가 생기겠는가? 물론 그 만큼의 실패도 감내할 수 있는 성격이여야 한다. 그러나 불확실성의 용기와 실패의 대담함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큰 틀에서 보자면 재능이나 성격도 다 운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다들 '열씨미' 노력해서 성공했다고 우긴다. 도대체 왜들 그럴까? 폼 나기 때문이다. 성공을 노력의 결과로 설명하는 인과론이 산업화 시대에는 아주 폼 나는 내러티브였다. 정신없고 불안한 시대일수록 어슬픈 '노력-성공' 의 인과론이 잘 먹힌다. 명확하기 간결하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대충 살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자신의 작은 성공을 '열씨미' 만으로 설명하지는 말자는 거다. '열씨미의 통제 강박 관념'에 빠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불안하지 않아야 성공한 삶이다. 잠 푹자고, 많이 웃는 삶이 진짜 성공이다.
하나 더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겸손은 대부분 티 나는 억지 겸손이다. 타인의 질투심을 자극해 쓸데없이 해코지당하는 일을 피하려는 비겁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가짜인거 다 안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운명에는 진실로 겸허해야 한다. 모두 내가 다 노력해서 된 거라고 우기지 말아야한다. 그래야 새벽에 불안해 하며 깨지 않는다.
이 문구도 참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잠 푹자고 많이 웃는 삶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수 있나? 사실 쉬운일은 아니다. 그러나 작가의 말대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삶이 성공한 삶에 이의를 제기할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것인가? 현실은 그렇치 않다. 대부분의 셀러리맨들은 기본퇴근 시간이 9시다. 그런데 잠푹자고 많이 웃는다? 어떤이는 웃을수 있다. 그래도 이 말에 공감하는건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이지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남들이 자신을 알아봐주길 원한다. 남들이 알아봐주는것 자체가 권력이기 때문이다. 못 알아보는듯하면 바로 명함을 내민다. 자기 입으로 폼나게 설명하기 쑥스럽기 때문이다.
고령화 사회의 근본문제는 연금이 아니다. 은퇴한 이들의 '아이덴티티'다 자신의 사회적 존대를 확인할 방법을 상실한 이들에게 남겨진 30년의 시간은 불안 그 자체다.
불안은 원래 미래가 불확실한 젊은이들의 정서다. 경험과 경륜의 노인들이 불안해하는 젊은이들을 위로할 때 한 사회는 균형을 잡으려 건강하게 버틸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오늘날 아무런 대책없이 수십 션을 견뎌야 하는 '젊은 노인들'이 갈수록 늘어난다.문제는 불안하면 세상을 자꾸 좁혀서 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은퇴하는 순간 모든 인간관계는 끝난다. 내가 누구인지 더 이상 확인할 방법이 없다. 청소년 시기에 던졋던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된다. 더 이상 새로운 발달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때 사람은 소외감과 우울함을 호소하며 심리적으로 급격히 위축된다. 한국 남자 대부분은 그런 상태로 30년을 더 살아야 한다.
이 가을 통속하거나 외롭거나
이용의 시월의 마지막 밤은 촌스러운 피아노 솔로로 시작하는 그 의 노래는 아무리 거지같이 끝난 인연이라도 코끝 찡한 기억이 되게 한다. 참 착한 노래다.
이용의 노래와 함께 가을이 되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되는 시구가 있다. "인생은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름 통속하거늘...." 고등학교 때 처음 읽은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다.
시인이 한 잔의 술을 마시면 반드시 이야기해야 한다는 그 '버지니아 울프'
이문세의 노래 옛사랑 급한 호흡으로 이어지는 시구를 따라 읽다 보면 막연한 그리움에 진짜 숨이 막혀온다. 그저 폼 잡기에 급급한 사람처름 심장이 쫄깃해져 온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같이 무어라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그러나 마음 따뜻해지는 이런 종류의 기억을 심리학에서는 '노스텔지어' 라고 한다. 한국어 로는 향수 혹은 그리움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노스텔지어는 좀더 복잡한 심리상태다.
어떻게 보면 노스텔지어는 심리적 기능을 세 가지로 정의한다. 긍정적 기분, 의미 부여, 관계 형성 뒤집어 설명하면, 기분이 나쁠 때나 우울할 때 혹은 외로울 때, 아름답고 따뜻했던 시절의 노스텔지어가 작동해 삶을 의미 있고 즐거운 것으로 되돌려놓은다는 것이다. 이 가을에 작동해야할 노스텔지어가 결핍된 이들은 그래서 더 우울하고 더 외롭고 더 기분 나빠진다. 그러니까 며칠 후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일에 자꾸 핏대를 세우는 거다.
이 찬란한 가을에 좁은 방 안에 틀여박혀 각종 신문의 정치면, 사회면만 들여다보며 매번 뻔한 이야기에 열받지 말자는 이야기다 도대체 몇 명이나 '좋아요'를 눌러주나 하면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에 온종일 머리쳐 박지도 말자는 거다.
떨어지는 낙엽에 늙어가는 것을 슬퍼할 일이 아니다. 이 가을에는 아름답고 기분 좋은 것들만 기억해야 한다. 또 먼 훗날 즐겁고 가슴찡하게 기억할 만한 것들을 죽어라 만들어놓아야 한다. 앞으로도 오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라고 낙엽도 지고 단풍도 드는 거다.
버지니아 울프와 의식의 흐름 기법
영국의 대표적인 여류 소설가. 출항, 밤과 낮, 댈러웨이 부인등의 소설이 유명하다. 1929년에 발표된 그녀의 에세이 자기만의방은 페미니즘의 교과서로 여겨질 정도로 큰 방향을 얻었다. 가부장제와 성적 불평등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소설 딜러웨이 부인은 '의식의 흐름기법'을 사용해서 유명해졌다. 일반적으로 소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된다. 반면 의식의 흐름기법은 화자의 생각을 떠오르는 대로 서술하는 방식이다.
사실 이 기법은 '자유연상법' 이라는 심리학 방법론 을 소설에 차용한 것이다. 초기 심리학은 인간 내면을 파헤치기 위한 방법론이 매우 빈약했다. 프로이트 제자였던 칼 구스타브 융은 '자유 연상기법'을 변형한 '단어 연상기법'을 제안해 프로이트의 후계자로 인정받게 된다. 후에 융의 급격한 성장을 두려한 나머지 프로이트는 그를 정신분석학과에서 제명한다. 단어연상기법이란 환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나열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떠오르는 대로 나열되 단어들이야말로 무의식에 접근하는 통로라는 것이다.
남들에 의해 바뀌면 참 힘들다.
지난 추석에도 우리 엄마는 진지하게 또그랬다.
"너 진짜 겸손해야 한다. "
이유는 매번 분명했다.
"넌 생긴 것 자체가 남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해서 그래"
아내는 웃음을 참지못해 결국 돌아 앉는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자식에게는 엄마가 있는 거다.
슬쩍 건들기만 해도 발끈하는 약한 부위가 누구에게나 있다. 물론 나도 있다. '실력없는 가벼운 심리학자' 라는 말을 들을 때다.그러나 십수년간 음숩한 곳에서 공부하느라 머리카락이 빠지고 우울증 비슷한 증상까지 경험했던 나다. 나도 '한 방' 이 있다. 이 한방이면 다 죽는다. 그러나 콧방귀만 주변에서 낀다면 난 분노로 혼수상태가 된다. 다시말해 속이 바닥부터 뒤집어 진다.
심리학자 브렘은 "금지할수록 욕망한다"는 심리학적 반발이론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뤄지지 않은 사랑이 그토록 아름답고, 부모가 반대할 수록 내 사랑이 더 고귀한 것이 된다. (금지를 이겨낸 결혼일수록 이혼율이 높다. 더 이상 금지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 뿐만 아니라 문화도 그렇다. "금지의 나라"일수록 하위문화가 강력하고 화끈하다. 그래서 독일과 일본의 하드코어는 그토록 강렬한 것이다. 나중에는 외적 금지가 없어도 스스로 금지하고 체념하는 '학습된 무기력' 에 빠지게 된다. 금지를 내면화 하고 채념하는 것처름 무서운 질병은 세상에 없다.
아베의 철없는 민족주의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일본 지식인 사회를 보면 더욱 가슴아파진다.
먹고살 만해진 한국 사회가 경계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집단적으로 학습된 무기력이다. 절대빈곤 시대, 분단 상황을 견뎌오며 너무나 많은 금지를 겪여왔다.
세월호의 사건 그리고 국정원의 선거개입사건 누가 죽어도 내 살림살이가 너무 팍팍하고 회사에서 자리보존하는것도 힘겨운 대한민국에서 지식인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고 있는지는 아닌지. 일본을 뭐라할 이유는 없다. 나 부터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도대체 한국 처름 안되는 것 투성이의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있었던가 그래도 저항하고 소리 지르며 부딪쳤기에 여기 까지 올수 있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순 "개 뻥" 이다.
학습된 무기력
사람은 자신이 환경을 통제하지 못하거나, 미래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 반복되면 무기력해진다. 이 같은 무기력도 학습된다는 것이 셀리그만의 주장이다.
2000년대 들어 셀리그만은 학습된 무기력의 반대 개념인 '학습된 낙관주의'를 주장한다. 무기력이 학습되듯이 낙관주의도 같은 긍정적 세계관도 학습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개념을 통해 셀리그만은 몰입 개념으로 유명한 칙센트미하이 교수와 더불어 '긍정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 있다. 긍정심리학은 불안, 우울, 스트레스와 같은 부정적 측면에만 집중된 심리학의 주제를 좀 더 다 변화하고 인간 심리의 긍정적 측면과 가능성을 강조하려는 시도다.
'환자 만들기'에 급급해 '불안 산업'이 되어버린 현대 산업사회에서 자기비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사기 사회다.
시기심은 나 같은 철없는 사내만 느끼는 미성숙한 감정이 아니다. 시기심 따위와는 상관없어 보이는 사람일수록 (예를 들어 지식인, 종교인, 문화예술인) 시기심은 더 적나라하고 치밀하다. 내가 아는 한, 교수들의 시기심이 가장 심하다.
대한민국은 아주 특별한 시기사회다 대한민국을 표현하는 정언적 표현이 참 다양하다. 위험사회, 격차사회, 피로사회, 불안사회 등 그러나 시기사회처름 한국 사회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표현도 없다. 운도 실력이라고 우긴다. 젠장 이런 현실에서 하루하루가 숨찬 보통사람들이 시기심마저 느끼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째야 하나?
어떤 문화권이든 빠지지 않은 공통 잠언이 하나 있다 바로 '겸손하라'다. 폼 잡고 싶어 그렇게 고생했는데 이젠 또 겸손하라고 한다. 환장한다. 도대체 왜 인간은 겸손해야만 하는 걸까?
간단하다.
다른 사람의 시기심을 자극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기심을 자극하는 순간 바로 '아웃' 이다. 시기 사회의 근본문제는 자신의 시기심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잡다한 사디즘이 도덕적으로 타당하고 이념적으로 옳은 것처름 주장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품격 있는 사회란 시기심의 세련된 관리를 의미한다. 분노와 적개심이 치밀 때마다 이 분노의 근원이 과연 정당한 시기심인가에 관해 성찰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시기와 질투와 문화 심리학
인간 문명은 시기 혹은 질투의 역사다. 성경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한국 사람의 시기와 질투는 유난히 강하다.압축성장 때문이다. 경제적 풍요가 서서히 이뤄진 서구 사회의 경우에 질투관리 체계, 즉 문화가 세련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신분의 차이나 빈부격차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풍요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잇었던 한국 사회는 질투관리에 소홀했다. 경제적 풍요도 정당한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정경유착과 같은 비정상적인 수단이나 감작스러운 땅값 상승과 같은 운의 결과로 여겨졌다. 실제로도 그랬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시기와 질투는 아주 쉽게 정당화된다. 문제는 시기와 질투의 정당화가 분노와 결합할 때다. 한 사회의 미래가 불분명해지는 이유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한국사회에서 질투 관리는 상당 기간 아주 어려운 과제가 될듯하다.
시사인에서 인터뷰한 아래의 기사도 한번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