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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균 Jun 29. 2017

너무 행복해서 이젠 더 이상 행복을 묻지 않는다

나 만을 위한 맞춤 행복

영웅이란 모름지기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매일 아침 위풍당당한 권법을 날려 밀려오는 불안과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행복한 사람들도 아침에 이불을 박차고 나오기가 힘들며 그들역시 자신의 내면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음을 잊지말자.


나는 무엇을 겪었으며 어떻게 고난을 이겨냈으며 그러한 과정속에서 내 몸의 습속과 욕망 그리고 행복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하나씩 집어 본다.그리고 탁월한 조언들을 등불삼아 따라가며 그들이 알려준 방식으로 내 삶을 조용히 밀어 넣는다. 그리고 나는 단 하나의 명령을 받는다.


“살아 있으라! 그리고 행복하라!”


행복하기 살기가 존재의 유일한 명령이다. 그런데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연구를 해야 한다. 무엇이 행복인지,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를.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수 있는지, 상품으로 주입된 행복의 이미지를 버리고 돈이 행복의 전부라는 고루한 노예의 행복을 버리고 자기구원으로서의 행복을 찾는것이 지혜의 출발이라고 했다.  내면의 성찰을 통한 자기혁신을 이룰 준비는 되었다. 이제 그 여행의 끝을 보려고 한다.


깨달음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듯 하다. 난 행복에 관한 네 가지 책을 정독하고 정리해 보았다. 먼저 동양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행복에 대한 담론 과 , 두 번째 티벳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전해주는 내적 평화 방법, 세 번째는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심리학적 방법. 그리고 네 번째는 치가 떨리게 분석적인 독일 인문학자의 행복에 대한 담론이다.  네 권의 책을 통해  난 나 만의 맞춤 행복지도를 완성해 나가고 있다



한 가지 고백을 한다면 난 가장 이기적인 방법으로 내 마음을 진정시키는 법을 깨우치고 싶다. 타인의 말에는 관심이 없다. 간접 경험을 통해 집중력과 창의력을 개선시키고  정신적 그리고 감정적 흐름을 점점 더 명확하게 인식하는것.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자신감과 자존감으로 나아가는 것. 앞으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에 대한 더욱 낙관적 태도와 회복력을 강화시킬려면 단 하나 "펼치면 팔만대장경이요 접으면 마음 하나다." 이 하나의 문구가 왜 그렇게 가슴 깊숙히 박히는지 이젠 알것 같다. 


먼저 행복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자.

행복(幸福)의 정의 :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 _ 네이버국어사전_또 다른 정의를 해본 다면 무지개 끝에 있는 보물상자를 발견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 내 안에서 평화와 만족을 찾는것 또는 내가 될수 있는 최고가 되는 것. 등등.
불행(不幸)의 정의 : 행복하지 아니한 일 또는 그런 운수.
비애(悲哀)의 정의 : 슬퍼하고 서러워함. 또는 그런 것.
분노(憤怒)의 정의 : 분개하여 몹시 성을 냄. 또는 그렇게 내는 성.

사전적 정의가 확  와닿지 않는다. 행복이란 '지극히 건강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깊은 혼쾌한 충만감.단순한 쾌감이나 순간적인 감정,기분이 아니라 최적의 존재상태' 라고 정의하고 싶다. 다시말해 마음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깊이 이해함으로써 유지되는 감각적 균형 (동양적으로는 중용,평상심 등) 이라고 말이다. 


동양적 사상에 기반한 행복과 관련한 경구들은 살펴보자. 길어봐야 세  줄을 넘어가지 않는다.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


사과가 떨어진걸 기어이 만유인력 때문이라고 기어이 과학적으로 밝혀내고야 마는 것은 서양의 장점이다.그리고 동양의 장점은 때가 되어서 떨어지는 걸 “왜 안달복달 난리들이야” 하며 자연을 아우르는 철학이다. 지식으로 보지 않고 가슴으로 읽어야만 이해가 된다.  


하나 더 만나보자.

인간은 기본적으로 입과 항문이다.   
나머지는 다 부속기관이다.   
낙원은 일상속에 있든지 아니면 없다.


순간순간 행복을 찾고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발견하고 그런 행복이 삶을 풍요롭게 할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삶의 풍요는 감상의 폭이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일상에서 행복을 어떻게 찾으라는 것인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 것인가?


어렵다. 이해는 가지만 공감은 쉽지 않다.


그럼 달라이 라마가 전하는 행복의 길은 어떠한가. 우선 그가 생각하는 행복의 정의에 대해 알아보자.


삶의 목표는 행복에 있다. 종교를 믿든 안 믿든, 또는 어떤 종교를 믿든 우리 모두는 언제나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 산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근본적으로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그 행복은 각자의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믿음 이다.


결국 각자의 마음안에 행복이 있다고 정의를 내린다. 마음안에 어떻게 행복을 넣을수 있을까? 그의 책에는 구체적인 수련방법이 있을까? 우선 그의 책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자.


우리는 수행을 통해 삶의 자세와 시각, 그리고 삶을 살아나가는 방식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마음의 수행에는 물론 많은 내용과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마음의 수행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들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들을 구별하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의 수행을 통해 사람들은 차츰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들을 버리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들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러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기 위해선 그가 제시하는 방법은  삶을 살아나가는 방식을 바꿀 수 있을때만가능 하다고 한다.그가 제시하는 마음의 수양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마음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명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어떠한가 에 따라서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영적수행은 두번째 문제라고 쳐도 세속의 관점에서 날마다 행복을 느끼기를 원한다면 당신의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울수록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누릴 가능성은 더욱 커집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에 대해 말할때 우리는 그것을 무감각하고 냉정한 마음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갖는 다는 것은 마음이 완전히 텅비어 버리는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평화롭고 고요한 마음은 사랑과 자비심에 뿌리를 두고있습니다. 다시말해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내면의 수행이 뒤따르지 않는 한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편안한 환경속에서 지내더라도 당신은 자신이 바라는 기쁨과 행복을 절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달라이 라마가 제시하는 마음수행의 다섯가지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행복의 첫번째 단계는 '배움'입니다. 우리는 먼저 부정적인 감정이나 행동이 우리에게 얼마나 해로운가를그리고 긍정적인 감정은 얼마나 이로운가를 배워야 합니다. 배움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순간 확신으로 이어지고, 변화에 대한 확신은 다시 결단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결단은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변화를 위해선 노력이라는 마지막 요소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진정한 변화는 긴 시간동안 서서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고통의 원인을 파악하는 일 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세 가지 독약' 중 그 첫번째가 고통입니다. 고통의 근본원인은 무지와 욕망과 미움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서의 무지란 어떤 정보를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실에 나타나는 형상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다는 것이며 사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고 욕망과 미움같은 고통스런 마음을 제거하는 것 만이 우리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듭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마음 상태에 대해 이해 하는 일 입니다.


즉 미움 시기 분노 같은 것은 우리가 가져갈 행복과 정반대에 있기에 이것을 다스려야합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향해 나쁜마음을 먹거나 미움의 감정을 갖는다면 그 순간 미움이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수 차례 당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말해 당신의 내면에서 미움이 생기는 순간, 당신이 누렸던 마음의 평화를 순식간에 깨뜨립니다. 당신의 평온했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이렇듯 강한 분노와 미움이 생길때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훌륭한 능력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따라서 분노와 미움은 당신이 가진 문제와 어려움을 더욱 악화실킬 뿐입니다.
따라서 분노와 미움은 불만스런 마음을 갖고서 괴로워 하는데 생겨납니다. 내면의 만족을 느끼고, 친절한 마음과 자비심을 키우기 위해 꾸준히 노력함으로써 당신은 그 상황에 미리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노력은 마음의 평화를 가져와 당신이 순식간에 분노를 터뜨리는 것을 막아줄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면의 자제력을 가지고 노력하면서, 교정수단을 통해 그런 감정에 적극적으로 싸워나가야 합니다. 다시말해 인내와 관용의 정신으로 그 부정적인 감정에 맞서야 하는 것입니다.  분노와 미움이 가져오는 파괴적인 영향은 돈으로도 막을수가 없습니다.누구를 위해서?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막지 못하면 그 결과 더 큰 두려움 시기 질투 억압 그리고 불안감이 찾아옵니다. 이 모든 부정적인 느낌들은 미움 때문에 생겨납니다. 따라서 그러한 감정들이 나를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해주는가 아닌가를 판단해야 합니다. 인내와 관용의 정신은 한결같은 마음을 갖는 능력과 불리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그것에 압도당하지 않는 능력에서 생기는 정신입니다.  바로 평상심(平常心)입니다. 이것은 흔들림 없는 마음을 지키는 강한 능력에서 비롯된 강인함의 표시로 봐야 합니다.어려운 상황에 분노와 미움을 갖고 대응하는 대신 인내와 관대한 마음으로 반응하려면 강한 자제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자제력은 절제된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면서 그는 두 가지 마음상태에 대해서 다시 한번 바르게 정의한다.

겸허한 마음 은 저항할 능력이 있고, 원하기만 하면 복수할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신중하게 결심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자재력' 이란 다르게 행동할 수 있지만 다시 말해 더욱 공격적인 방법을 쓸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마음입니다. 나약한 마음과 너그러운 마음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네 번째는 자비심을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이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가를 깊이 명상합시다. 그 결과에 따라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순서대로 정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일으키고 다른사람을 해할려고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해 인간이 가진 선한 성격을 키워야 합니다. 그것은 따뜻하고 친절한 마음 그리고 자비심 같은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질때 우리의 삶은 더욱 의미있고 평화롭고 행복해 질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욕망의 종류를 파악하고 수련하는 방법입니다.


욕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긍정적인 욕망과 부정적인 욕망. 긍정적인 욕망!  이것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욕망들은 욕망이 이성을 잃는 순간 이상하게 됩니다.지나친 욕망은 결국엔 탐욕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탐욕이란 기대가 지나쳐 생긴 욕망입니다. 탐욕은 결국엔 좌절감과 실망을 안겨주고 많은 혼란과 문제를 일으킵니다. 탐욕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가지려는 욕망에서 탐욕이 생기지만, 그것을 가진다고 탐욕을 만족시킬 순 없다는 것입니다.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이라는 사실 하나를 깨닫는 일은 바로 평생의 일이라는걸 달라이 라마를 통해서 깨닫게 된다. 마지막으로 달라이 라마는 말한다.


행복한 삶은 평화롭고 안정된 마음의 바탕위에서 이루어진다고 것을 지적했습니다. 내면의 수양을 통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고 그것을 얻기 위해 명상이 포함될수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명상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자 이제 행복에 접근하는 방법 중 서양의 정신분석학자들의 생각은 어떠한지 알아보자. 먼저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쾌락 과 행복의 연관성을 다음과 같은 시각으로 정의 한다.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삶에서 쾌락이 갖는 의미를 정의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가 누리고 싶은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느정도의 희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심리를 움직이는 근본 동기는 내면의 긴장을 풀려는 소망에서 생긴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내면의 긴장은 충족되지 않은 본능적 욕구 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말해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려는 본능적인 충동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우리가 본능적으로 가지는 욕구가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느끼거나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우리는 삶에서 다양한 쾌락의 형태를 만난다. 남자 여자 술 도박 섹스 등등.. 우리가 이런  쾌락을 수용하지 못할때 그것을 마음의 고통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프로이드는 신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는 듯하다 라고 못박았다. 수많은 정신과 의사들은 줄곧 그런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마음의 고통을 평범한 불행으로 바꾸는 일' 이라는 잔인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또한 이것은 정신과 의사들이 하는 일 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그의 논리는 당연한듯 하다.


다음으로 2014년 서점계를 강타한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인 알프레드 아들러 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들러의 주장은 크게 네 가지로 압축된다. 그 중에서도 그의 핵심적 주장은 바로  ‘용기’다.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탓이 아니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 가 부족한 것 뿐이야. 말하자면 ‘행복해질 용기’ 가 부족한 거지,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 도 있어야 하네 그런 용기가 생겼을때 자네의 인간관계는 한 순간에 달라질 걸세.


용기를 터득하기 위해 그는 프로이트가 제시한 ‘트라우마’ 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을 주장한다.


살아가면서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라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 즉 트라우마 - 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라고 말 그대로 일세. ‘경험 그 자체’ 가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 에따라  자신을 결정한다는 말이지.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걸세 어떻게 사는가도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나는 부모에게 학대받아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라고 생각한다며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목적’ 이 있기 때문이지.  그 목적에 스스로의 원인으로 규정시키고 자신이 잘못되었경우 과거의 그런 이유로 책임을 돌리고싶은 마음. 다시말해 책임을 회피하고 싶기 때문이지.

이제 그가 주장 하는 세 가지 방법론으로 들어가 보자.

첫 번째는 ‘노력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격이 곧 운명이다. 라는 말이 있다. 더군다나 성격이 한 사람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만은 분명하다. 성격이 타고난 기질과 성장 과정에서 받은 교육 ,주변환경, 부모의 영향 이 결합되어 스스로 형성 되는 것이다.따라서 인간의 성격이나 기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자신에 대한 지식, 자신에 대한 존경, 자신에 대한 억제,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타인과 대화를 하는 기술 등.  


그렇다면 성격은 바꿀수가 없는가?

성격이 너무 거창하고 포괄적이라면 내가 사물을 바로보는 태도, 삶을 대하는 태도 ,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 등  일종의 삶의 태도 라고 할수 있는 생활 양식은 내가 선택하기 나름이다.  지금 까지의 인생에 무슨일이 있었던 앞으로의 내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과거의 경험을 내가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도 내가 결정하는 것이고, 어떻게 사는가도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따라서 부정적 시각으로 보면 부정적으로 가는 것이고 ,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긍정적으로 가는 것이다. 따라서 성격 혹은 삶을 대하는 태도는 바꿀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바꾸도록 노력하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 용기가 없다면 그렇게 살아야하고, 그 용기가 있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행복해질 용기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분노라는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이다.

앞서 이야기한 달라이 라마가 주장한 ‘인내와 관용의 정신으로 부정적인 마음들을 수정해 나갈때 우리는 분노를 극복'할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들러의 심리학은 좀더 깊이 들어가서 우리에게 속시원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분노란 어차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도구이다  먼저 이해해야 할것은 분노란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이고 아울러 화내지 않는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하다는 사실이네. 우리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나를 받아들이게 할 수 있네.  다시 말하지만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분노’ 라는 도구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참을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분노 이외의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걸세. 아무리 자신이 옮다고 여겨도 그것을 이유로 상대를 비난하지는 말게. 이것이 많은 사람이 빠지는 인간관계의 함정이지.


나는 옮다 즉 상대는 틀렸다. 그렇게 생각한 시점에서 논쟁의 초점은 ‘주장의 타당성’ 에서 ‘인간관계의 문제’ 로 옮겨가네 즉 ‘나는 옮다’ 는 확신이 ‘이 사람은 틀렸다’ 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그러니까 나는 이겨야 한다’며 승패를 다투게 된다네 이것은 완벽한 권력투쟁 일세 애초에 주장의 타당성은 승패와 관계가 없어 자네가 옳다고 믿는다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이야기는 거기서 마무리되어야 하네 .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곧 ‘패배를 인정하는 것’ 으로 여기게 되는 거라네 지고 싶지 않다는 일념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않고, 결과적으로 잘못된 길을 선택하는 것이지. 잘못을 인정하는 것, 사과하는 것, 권력투쟁에서 물러나는 것, 이런 것들이 전부 패배는 아니야 우월성 추구란 타인과 경쟁하는 것과는 상관없네


그렇다. 그가 이야기하는 우월성추구는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 획득하는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겠다는 생각도 일종의 권력투쟁일 뿐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인정욕구를 부정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가든 타인에 둘러싸여,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회적 '개인' 입니다. 어떻게 해도 인간관계의 단단한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따라서 우리의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고민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발생된 열등감,자기애 같은 감정들 말입니다’.


아들러가 정의하는 열등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열등감이란 자신에 대한 가치판단이다. 이는 판단하는 사람의 가치관이 개입되는 상당히 개인적인 판단이다. 타인과의비교 에 의해 다시말해 인간관계 를 통해 만드러낸 주관적인 감정이다.  그것은 객관적인 열등성이 아니라 주관적인 열등감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요컨데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 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키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내가 가진 키를 장점으로 볼 것인지 단점으로 볼 것인지 모두 주관에 달린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는 객관적 사실을 움직이지 못한다네. 하지만 주관적 해석은 얼마든지 움직일 수가 있지. 우리는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네.


아들러는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좋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것,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은 것, 이는 당연한 욕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다시말해 타인의 기대같은 건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유대교 교리를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 인생을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준단 말인가?”. 타인의 인정을 바라고 타인의 평가에만 신경을 기울이면 끝내는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인정받기를 바란 나머지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 는 타인의 기대를 따라 살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서 그의 핵심적인 주장인 미움받을 용기가 등장한다.

타인의 인정을 통해 내 가치를 실현하고 느낄려고 하는 천박한 감정의 소산이라는 것을 스스로 느끼는 것.

바로 인정욕구는 그야말로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며, 더불어  내가 판단해 달라고 구걸한다고 얻어질수 있는것도 아니라는 사실, 이것은 백 프로 타인의 과제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내가 할수 있는 일은 나의 주관적인 감정. 내가 남에게 공헌했다는 감정을 가지는 것 그것만 가지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욕구를 거절하고 때로는 미움받을 용기가 생겼을때 , 우리의 인간관계는 한순간에 달라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바꿀수 없는 것 과 바꿀수 없는 것에 주목할 것을 당부한다.


자기긍정이란 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할수 있다' '나는 강하다' 라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것이고, 자기수용이란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적을 받았는데 60점짜리 자신에게 이번엔 운이 없었어 다음엔 100점을 받을거야 라는 말을 들려주는 것이 자기긍정이고 60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100점에 가까워지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자기수용 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기수용을  긍정적 포기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 에대해서는 바꿀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은 바꿀수 있습니다.


'바꿀수 없는것' 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수 있는 것' 에 주목할것.

이것 역시 능력이 부족해서 못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꿀려고 하는 의지 나 용기의 문제이다. 긍정적 포기는 왠지 모르게 비관적인 뉘앙스가 아니다. '명확하게 보다' 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명확하게 본 적이 있는가? 세탁기 속에 통돌이같이 바쁘게 돌아가는 삶속에서 나와 세탁기 안을 들여다 본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문구임에는 틀림없다.



세번째로 독일 인문학자인 빌헬름 슈미트의 ‘살면서 한 번은 행복에 대해 물어라’ 라는 책으로 들어가 보자.그는 먼저 우리가 잊고 있던 행복에 대하여 다시 한번 정의를 내린다.


'행복을 추구 할수록 불행을 더욱 느끼게 되는 현실'.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더욱 불행을 초래하는 현실'.

이 세상에 행복에 대해 구속력있고 통일된 정의는 없다는 것.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 행복을 정의 해야 한다는 것이다.엄밀히 말하면 커스터마이징. 나에게 행복은 무엇을 뜻하는가? 스스로의 답을 찾는데 철학이 도움이 되어줄 것입니다.


그는 먼저 “행복이 저절로 우리를 찾아주지 않는다면?”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는 답합니다.


우리는 소소한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 에게만 맞는 행복의 성분을 알아내어 화학적 조제를 이뤄 낸다면 기분좋게 조제할 수 있다. 행복은 뇌 속에 화학적 작용이 맞아떨어질 때 생긴다는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다.

온전히 나만의 행복을 적어보자.

향기 그윽하고 맛있는 커피를 먹을 때.

혼자 몰래 멋진 영화를 한 편 즐길 때

친한친구와 친밀한 대화에 푹 빠질 때

나 혼자 사우나를 즐길 때.

넘어야 할 도전, 새로운 지식, 새 경험, 낮선 환경 에 도전하거나 맞이할 때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이나 갈망을 느낄 때.


그리고 그는 쾌락은 결코 지속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음식, 음주, 섹스의 쾌락은 기분좋은 순간이며 엄청난 환희와 진한 행복감을 맛보게 하지만 영원하지는 않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쾌락의 본질이다. 본질을 이해했다면 쾌락 이후의 순간은? 쾌락과 또 다른 쾌락 사이의 비어있는 시간은? 행복한 순간 과 또 다른 행복한 순간 사이의 비어있는 시간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어있는 시간”, “침체의 시간” 이 있다는 사실에 준비되어 있지 않다. 이 침체기를 우리는 우울하고 씁쓸한 시간 이라고 생각하며 버거워한다. 그러나 사실 이 시간 속에서 쾌락은 휴식을 취하게 된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비어 있는 시간들과 교류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그런 시간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술을 익힐수 있도록 그 시간들의 고유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만족을 추구하는 행복에서 가장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아쉽게도 우리들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중요한 전제 조건을 망각하고 있다.


다시한번 강조한다면 기쁨만을 추구하는 행복의 또 다른 문제는 고통을 극소화하려는 시도이다. 우리는 고통이 처음부터 생기지 않아야 하며 인간의 삶에서 사라져버리기를 바란다. 하지만 고통을 없애려 하면 쾌락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대조경험을 잃어버릴 수 있다.

우리들은 행복의 부재를 일종의 질병으로 생각한다. 병명은 쾌감상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치료하지 않으면 죽음.특히 사회적 죽음에 처해질 수 있다는 위협을 느낀다. 인간은 내적.외적으로만 병이 나는 것은 아니다. 삶을 너무 높은 잣대로 재는 바람에 오히려 좌절하게 만들수 있는 관념 때문에 병이 날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속가능한 행복을 생각한다.


지복(더없는 행복), 행복이란 편안하고 즐겁고 긍정적인 것만을 인정하고 그것만 강조하는 한 면으로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지속가능한 행복 과 더없는 행복은 다른면, 불편한 것,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우리가 처리해야 할 ‘부정적인 면’도 포함된 것이다.우리중 누구도 그 다른 면을 굳이 찾진 않지만 그렇다고 이 다른면을 제외시킬수도 없다. 완화시키는 것이 최선이며,이를 위한 최고의 전제 조건은 삶의 다른 면에도 권리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행운이나 기쁨만을 추구하는 행복은 개별적인 경험과 크고 작은 에피소드에 기인하기 때문에 우연히 일어나고 가끔 드러나는 순간적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군다나 오래 머물도록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그러나 이와 반대로 지복은 유보적인 행복이다. 시간을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지속적이며 획기적인 행복이다.이 행복에서 먼가 대단한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은 실망할 수 있다. 이 행복은 특별한 것이 없다.오히려 항상 특별하고 대단한 것을 찾기 때문에 도달하기 힘든 그런 행복이다. 따라서 어쩌면 인간의 삶 안에서 완전한 충만을 찾는 것은 지나친 욕심 이다. 왜냐하면 과잉은 권태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에게 행복이 남기는 것은 언제나 편린이며 행복의 조각 들뿐이다.


세 번째는 혼쾌함과 태연함을 가진 총체적 충만을 가질것을 당부한다.

인생이라는 전체 시간속에서 삶의 양극성이라는 권리를 보장해 주고 그 속에서 혼쾌한 태연함을 뽑아내는 기술.바로 삶을 살아내는 기술을 터득하는것. 마치 하루의 낮이 지나고 기습처름 밤이 다가 오는것, 들숨이 있으면 날숨이 오는것, 인생의 고점과 저점이 어느순간 부터 바뀌어 가는 것들처름 우린 이러한 모든 것들의 양극성에서 자신이 긴장감을 얻는 삶의 박자 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할 때  깨닫는다. 이쯤되면 왜 평상심이라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지 알게되었으리라. 이젠 선인들의 경구가 그냥 보이질 않는다.


네 번째 행복이 아니라 의미를 물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을 밝혀야 겠다. 그 오랜 세월동안 ‘행복’ 에 대한 질문들이 의도했던 것은 바로 ‘의미’ 이다. 행복은 의미의 대체 개념일 수 있다. 현대인을 점점 더 불안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의미에 대한 질문이다. 더불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의미를 아쉬워 한다. 일의 의미, 자기 삶의 의미, 삶이란 것 자체의 의미. 이 모든 것들이 각각 혹은 따로따로 개별적인 요소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말할수 있다. 의미는 연관성이며 따라서 무의미성은 무연관성이다. 다시말해 자신의 어떤 행위나 일이 무의미한 것이나 연관성을 만들어내 지 못할 때 무의미한 착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의미를 경험할 수 있는 곳에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지속적 행복인 경우 이러한 의미가 충만한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소소한 일상속에서 육감을 통한 신체적 감각이 가져다 주는 찰나의 검정과 행복감!

그 자체로서 삶의 의미가 될수 있다. 그것은 때로 기쁨을 최대화하고 행복한 순간에 해당한다. 특정한 음악을 듣고,좋아하는 풍경을 즐기고, 특별한 향기를 맡으며 음미하고, 맛있는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것, 친밀한 사람을 만지는 것, 설렘을 느끼는 것 이 모든것이 감각의 충만에서 시작된다.


그렇다


비록 그것이 아주 사소하고 찰나적인 개별적 순간이거나 하나의 단순의미라고 해도 우린 삶의 의미를 또 한번 느낄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의미라는 것이 단순히 객관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말해 의미라는 것이 우리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따로 독립적으로 생성되어서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의미는 분석과 해석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일종의 해석학과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해석학적 풍부함. 삶의 의미가 풍부해지는 핵심적 요소이다. 이렇게 모든 일에 대해 ,하루하루 매 순간순간 대해 의미를 찾고 의미를 부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삶에 의미의 풍성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그것이 행복의 해석학이다. 이제서야 이해가 되는 선사들의 경구가 있다.

 

“길가에 핀 꽃이 아름답다.”

“평상심이 도(道)다!”


이것은 삶에 대한 경지에 대한 표현이다. 우리는 아주 종종 체념과 수동성으로 오인하기도 하지만 대충 살아온 사람들은 결코 저와 같은 말을 이해할 수 없다.

이젠 더 이상 남이 만들어놓은 기준의 행복이 아닌 나 만의 행복을 만들어갈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타이탄의 도구' 에서 알려준 나 만의 행복 레시피를 공개하고자 한다.


행복한 아침을 보내는 나 만의 레시피.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다. 아침을 얼마나 일관적으로 시작하느냐가 중요하다.

3분 잠자리 정리하기
- 매일 아침 잠자리를 정리하는건 그 날의 첫번째 과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했다는 것. 오늘도 작은 성취감이 자존감으로 이어진다.

5분 아침일기 쓰기
- 일기는 피곤한 하루의 마무리가 아니라 활기찬 하루의 시작을 위해 쓸때 가장 효과적이다. 밤에 쓰는 일기와 아침에 쓰는 일기는 확연히 틀리다. 그런 하루가 모여 성공하는 삶이 된다. 내 인생은 늘 체크리스트와 실행의 연속이였다. 그러다 보니 계속 일과 미래에만 집중한다. 미래에만 매달리는 사람의 가장친한 친구는 ‘불안’ 이다. 불안이 커질땐 2,3분 만이라도 이 순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게 가장 좋은 처방이다. 추구하는 것에만 집착하면 현재 가지고 있는걸 잃는다. 반대로 현재 갖고 있는것에 감사하면 마침내 추구하는 것을 얻게 된다.  그것 외에도 왜 일기를 쓰는가?

첫째 현재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다.
망할놈의 원숭이 처름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내 정신을 종위 위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다.
아침의 일기는 정신의 지우개다. 혼란한 생각들을 일기에 적어놓기만 해도 좀 더 맑은 눈으로 하루를 마주할 수 있다.

10분 명상하기 - 명상을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현재상황을 직시하고 사소한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고, 침착하는 태도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평상심이다. 명상은 정신을 위한 따뜻한 목욕이다. 명상을 하게되면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목격자의 관점’ 을 얻게 된다. 생각에 사로잡혀 휘둘리는 대신 일정한 거리 뒤에서 나 자신을 관찰할 수 있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탁기안에서 빠져나와 그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명상시간이 20분이라면 15분은 마음속 흙탕물을 가라않히는데 써라. 타인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내 몸을 보호하고 깨달음의 지혜를 획득하자. 내 안의 두려움의 용과 싸우자. 명상의 99%가 딴 생각으로 이루어지는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요한 건 나머지 1%다. 명상의 목표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않히는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관찰하는 것이다.

1시간 한 가지 규칙에 집중하기 - 중요하게 생각한 일에 대해 하루 한 두시간만 집중하면 썩 괜찮은 하루를 살게된다. 하루의 한 두시간이 모여 한달의 성과를 되돌아 보았을때 꽤나 괜찮은 성과가 이루어졌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의도적인 노력을 할 것 - 아침에 일어났을때 먼저 우리를 짓누르는 문제들을 아주 작은 것으로 만드는 의도적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럴대 우리의 가장 놀라운 능력들이 발휘된다. 먼저 호흡하며 천천히 걷기다. 둘째 3가지 사실에 감사하기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악 , 그리고 단순한 것에 감사하자. 그런 감사의 마음으로 영혼을 채우자.  우리는 쉽게 무너진다. 약간의 좌절만으로도 그런 생각을 한다. 그렇게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불안과 두려움을 보내오는 운명의 여신에게 맞설수 있는 인간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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