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독후감
문학이라는 건 허위의 지반위에 쓰여진 것이지만, 삶의 본질속에 내재된 진실을 목표로 하고 있기에 생각할 꺼리가 많다. 우정과 침묵, 사랑과 권태 그리고 직업과 삶에 대해 쿤데라의 답변이 구석구석 녹아있는 소설이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샹탈(여주인공)은 직장에서 회사일을 혐오하지만, 동시에 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다른 말과 질문으로도 가능하다.
노동에서는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없는가?
자본가와 그렇지 못한 노동자가 있는데 이로인해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것이 현대사회다, 노동의 댓가로 최소한의 삶 만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노동의 신성함을 이야기 하는 것만큼 비열한 행위는 없다. 허나 밥벌이의 비루함, 노동의 신성함을 떠나 자본주의 체제가 가진 본질적 프레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란 타인의 시간과 노력으로 나의 부를 축척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 나머지는 126 page에 나오는 부역자다. 그리고 생산수단을 소유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부의 축척 말고도 하나 더 있다. 그건 바로 나의 삶 때문이다. 생산수단(자본가) 에 고용된 노동자는 자신의 삶을 노동하는 데 사용하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는 노동에서 자유로워 진다. 자신의 삶을 찾게 되는 것이다. 샹탈은 스스로 부역자라고 자신에게 세뇌시킨다. 그 자신이 얼마나 권력자 되려고 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위선을 혐오하는 시대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성욕까지도 감추기 보다는 노골적으로 드러낼 때 멋지다는 찬사도 받는다. 솔직하게 내면의 진실을 말했다는 것 자체는 그 말한 내용이 어떠하느냐와 관계없이 찬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위선이 아닌 용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하게 모든것을 털어놓는 용기있는 태도 속에 뭔가를 감추려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면 위선이다.우리는 그러한 위선을 가면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내면의 정직을 잃지 않으면서 타인에게는 친절함을 묻어내는 말투를 잘 하는것이 살면서 연마해야 하는 기술이다.나 편하자고 가면을 쓰고 싶지 않다고 솔직함을 강조하여 무작정 노골적으로 드러낸다고 해서 상대가 좋아하리란 보장은 없다. 누구나 정직하고 싶고 누구나 친절하고 싶고 누구나 꾸밈이없길 원한다. 허나 나이를 먹어갈수록 꾸밈이라는 표현의 형식을 고민하고 갈고 닦아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말의 꾸밈은 맨얼굴의 진실만큼이나 중요한 형식의 문제다. 내면의 정직을 잃지 않으면서 타인에게는 친절함을 전하는 것 그것이 사회가 요구하는 어른의 자질이기에 그것을 가면과 위선이라는 단어로 포장시킬수만은 없다.
권태를 벗어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는듯 하다. 새로운 사랑을 만나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무모할 정도의 과감함으로 새로운 “쉬는 것”과 “노는 것” 을 찾아내는 것도 좋을듯 하다. 권태를 벗어나 일상의 평범함을 유지하기 위해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공부하고 더불어, 내 안의 심리적 상태를 끊임없이 성찰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이 유지해야 하는 적정 각성수준이 있다. 권태가 어느순간 날 덥치기 전에 이것을 찾아야 겠다.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맺고 있는 우정의 유일한 의미를 깨달았어.
우정이란 기억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친구들은 우리의 거울, 우리의 기억인 셈이지.” _ 54 page
장마르크는 오랜 친구에게 ‘침묵의 배신’을 당하게 되고 다니던 직장에서 짤린다. 그는 이젠 우정보다 자신은 진실을 택할 거라고. 이 세게는 이미 우정을 상실했고, 우정은 단지 상호 존중의 게약, 예절 계약으로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외로움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나는 어떻게 하면 친구들과의 우정의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 할수 있을지 궁금했다.친구는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결국 관계에 대한 투자는 내게 이로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동기는 너무 전략적이고 타산적일수 있지만 현실을 직시한다면 관게에 대한 전략이 필요한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동료이외에도 우정을 나눌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다. 직장 동료나 가족들과의 관계보다 더 자유롭고 덜 복잡한 관계.
친구틈새이론(Friend Niche model)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일과 약간의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급한 볼일이 생겼을 때 자녀를 돌봐 주는 사람,등산 테니스 베드민턴 수영과 같은 운동클럽에서 오랫동안 함께 한 사람, 그리고 책일상이 여기에 해당될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다른 누군가로 대체하기 어려운 친구도 있을 것이고.어떻게 보면 작가가 말하는 중년의 우정은 예절계약에서 조금 벗어나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은밀한 비밀이란 무엇인가. 인간 존재의 가장 개인적이며 가장 독창적이며 가장 신비스런 점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은가? _ 116 page
엉덩이에 주먹만하게 난 점이 은밀한 비밀인가? 어릴적 개인적 사건을 계기로 생긴 트라우마 또는 질풍노도의 처절한 연애사. 무엇이 한 개인의 은밀한 비밀일까?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이 말.
자유. 내가 그토록 원했던 ‘자유’의 이미지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이 우리 운명이니 그것을 결점처럼 끌어안고 살지 말고 즐기는 법을 알아야만 한다.”
인생에서 즐기고 싶다는 말을 하는 순간 무엇이 가장 떠오를까. 자유. 그래 자유라고 하자. 자유 속에는 마음껏 하고싶은 사랑과 하고 싶은 섹스도 등장한다
사랑을 하고 싶다. 한창 때 처름 왕성하게 섹스도 하고 싶다.
살다 보면 이처름 “하고 싶다”를 목 놓아 외치는 시기가 찾아온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있는 집안 빈티지에는 감흥이 없고 집 밖 신품들 에게는 용기도 엄두도 나지를 않는다. 기회가 언감생신 이다.
일단 생각부터 고쳐 먹어야 한다. 사랑과 섹스의 출발지로서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은 자기 욕망 이전에 자신의 꼬라지다. 누구나 꼬라지는 그 어감처럼 참말로 거시기한 법인데.. 그래서 난 오늘도 열심히 운동을 한다. 내 꼬라지가 볼썽사납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에게는 섹스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가 당신에 게 당신성생활에 대해묻는다면 진실을말하겠어요? 질문하는사람이 당신 이름조차 모르고혹은 전화로 질문을 해서 당신 얼굴을 보지 못한다 해도 당신은 거짓말을 할 거예요. ‘섹스를 좋아하세요?’ ‘뭐라고요!’ 몇번 하세요?’ 하루에 여섯 번요, ‘포르노를 좋아하세요?’ 미치게 좋아하죠, 그러나 이런 건 모두 거짓말이에요. 상업적관점에서 볼 때 에로티시즘은 애매한 거죠. 모든 사람들이 에로틱한 생활을 꿈꾸지만 동시에 그것 이 그들의 불행, 욕구 불만질두, 열등감그리고 고통의원인이기 때문에에로틱한 삶을 증오하죠. _ page 58
몸에 대한 집착은 자본주의 고도의 전략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있다.
동안이 되고 얼굴이 예뻐지면 다 좋을 것 같지만 오히려 불안과 두려움이 점점 켜지기도 한다. 이 현상에 내재한 굉장히 많은 모순을 개인들이 다 감당해야 하기 때문다. 겉으로는 그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외모에 집착하고 자기성숙을 거부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생체 리듬에 맞게 자립을 하고 폐경-가을을 맞이해야 한다.
나이가 갈수록 호르몬이 변한다. 이는 현대의학과 광고가 만들어낸 이미지 때문이다. 계속 자극을 해야 아름다움과 성적 능력을 갈고 닦으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또다시 열등한 청춘이 시작되고 그래야 자유로운 사랑이 시작될수 있으니.
언제쯤이면 이러한 짝짖기 놀이에서 벗어날수 있을까.남성의 눈에, 여성의 눈에 들지 않아도 되는 자유. 이게 바로 노년이 외모와 성적 욕구로 부터 얻는 자유라면. 이 기막힌 노년의 자유를 누리고 싶다.
이제 이 소설의 마지막으로 들어가 보자.
내가 생각하는 정체성이란 타인의 인식과 자신의 자각으로 형성되는 독특하게 형성되는 그 사람의 인향이자 색깔이다. 허나 주인공 장마르크가 생각하는 정체성은 눈, 영혼의 창,아름다운 얼굴의 중심. 한 개인의 정체성이 집결되는 점. 바로 맑은 눈을 통해 사물을 보는 시선이다. 라고 말을 한다. 이 소설의 백미는 마지막 문장 샹탈의 대사에 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 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거에요.쉴세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요. 눈꺼풀이 깜빡일 때 다른 것이 끼어들지 않도록 눈길을 떼지 않겠어요”라는 샹탈의 말로 끝이 난다.
눈을떼지 않고 끊임없이 바라보면서 자신과 타자의 정체성을 확립하겠다는 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