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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균 Nov 18. 2015

조선시대 당쟁사

사림정치와 당쟁


본 내용은 이성무 선생의 '조선시대  당쟁사'와 조선 후기  '당쟁'과 관련된  논문을 읽고 정리한 사항임을 밝힙니다. 


내가 이 글을 쓴 동기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의 대의민주주의는 의회를 중심으로 정당정치를 실현한다. 모든 국민들이 정당이나 정치행위를 할 수 없기에 국민들이 선출한 사람들이  민심과 민의를 파악하여 안민을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이 목적 실행이 잘 안된 것이다. 그것이 질문의 시작이었으며 그 시작의 출발점은 과거로부터의 연속성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거사 중 어디를 기점으로 시작해 보아야 하는가? 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책과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다. 


 둘째, 한국은 광복 이후 민주주의를 받아들였고 그와 동시에 권력 투쟁에 있어서도 전근대적인 잔재를 제대로  청산할 수 없었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정치의 잔재를 극복하고 새로운 민주정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바로 앞선 조선시대 사림정치의 산물인 당쟁의 속성을 잘 알고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셋째,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기점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생각의 프레임을 가져보기 위해서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달리 역사를 전공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이유와는 다르다. 그들은 역사적  사실이나 역사적 인물을 되돌아보고 연구하는 것은 그 사건과 인물을 통해 당시 시대상을 들여다 보는데 진정한 목적이 있는 것이지 그 사건의 옮고 그름이나 그 인물의 선악 또는 공과를 따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일반적인 교양과 상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깊이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난 일반적 교양적인 상식일 뿐이다.


시작하기 전, 어떠한 이유이건 현대적 시각으로 과거를 해석하는 건 분명 무리가 있다.

과거 선비들의 시각으로 오늘을 해석할 수 없는 것처름, 당대에는 당대의 화두가 있었다. 



당쟁은 우리 민족의 당파심에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무작정 다투기만 한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 의리와 명분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전형적인 문치주의가 실시되었다. 당쟁은 이러한 문치주의에서 파생한 권력 투쟁의 한 형태이며, 일정한 원칙과 틀 안에서 권력 투쟁이 수행되었다. 사림정치에서는 여론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왕실. 재상. 외척의 권력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젊고 기개 있는 중견 관료들에게 인사권과 언론권을 부여해 부정과 부패를 척결함으로써 정계에 청신한 기풍을 불러 일으켰다. 사림들은 여론을 등에 업고 도덕적 수양을 갖추지 못하거나 권력을 남용해 부정. 부패를 일삼는 행위를 목숨을 바쳐 방지했다. 

그러나 아무리 의리와 명분을 내세운다고 해도 권력투쟁은 추악한 것이다.

권력을 잡기 위해 억지 논리를 내세우는 경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의리가 퇴색되고 명분이 구겨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1.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당쟁은 사림정치의 산물이고, 사림정치는 유교적 문치주의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당쟁의 원인과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양의 유교적 문치주의 성격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신라의 화랑도를 비롯한 삼국시대의 무치 주의가 어떤 이유로 문치주의로 바뀌게 되고, 그와 함께 우리는 왜 중국화. 유교화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해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고구려가 수. 당나라와 싸울 때는 무치 주의가 극성했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가 당나라에 멸망하게 되자, 무치 주의를 바탕으로 한 정복 왕조의 꿈은 사라지고 만다. 고구려. 백제의 멸망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일대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로부터 중국이 동아시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나라의 동맹국이었던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으나 자칫하면 전 국토를 당나라에게 빼앗길  뻔했다. 신라는 때마침 당나라에서 일어난 절도사의 난 때문에 그나마 대동강 이남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이와 같은 실패가 근본적으로 문화의 차이. 능력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적극적으로 중국화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당나라 동주에 신라방 신라소 신라원을 두고 중의 문물을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

한편 당나라는 세계 제국으로서 중화중심의 세계관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신라, 발해 안남의 유학생을 받아들였고, 이들에게 외국인 과거시험인 빈공과를 실시하여 중국 문화를 전파했다. 


한국의 중국화의 길을 걸으면서 많은 시련을 겪었다.

살아남기 위해 사대 정책을 써야만 했고, 중국 문화와 토착 문화를 조화시키는데 많은 힘을 들여야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이야기해 볼 생각이다. 학계에서는 소중화의 작업 일환으로 한글의 완성 , 직지심경 박연의 음악 등도 모두 소중화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특히 원나라 때에는 세계 최강의 제국에 직면하여 중국에 대한 종속적인 지위가 더욱 심화되었다. 강력한 황제권을 바탕으로 중국의 중앙 집권적인 문치주의를 장착시키는데 고려 500년이 다 소모되었다.

그러나 그에 힘입어 조선시대에는 중국과도 다른 독특한 중앙 집권적 문치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러면 중앙집권적 문치주의란 무엇인가?


당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부터 먼저 짚어 보아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 어는 나라에서나 권력 투쟁은 항상 있었다. 다만 어떤 방법으로 권력 투쟁을 하는가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세계 역사를 통틀어 전근대 시대의 권력투쟁은 무력에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 이었다. 칼을 휘둘러 권력을 잡으려는 무치 주의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칼을 쥐어야 권력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붓으로 하는 권력투쟁도 있었는데 문치주의가 바로 그 예이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유교적 교양을 갖춘 문관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문치주의 정치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문치주의는 황제나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 집권 체제를 수반한다. 통치술이 그 만큼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2.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일본 학자의 견해.

조선시대 당쟁의 원인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조선시대의 당쟁이 한국인의 분열적인 민족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 정치의 구조적인 산물이라는 견해이다. 전자는 일본 학자들의 견해이고 후자는 한국 학자들의 견해이다. 

시데하라 히로시의 견해, 가와이 히로다마 의 견해, 호소이 하지매의 견해. 등이 있다.


한국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견해요, 다른 하나는 광복 이후 학자들의 견해이다. 

당쟁의 원인에 대해 거론한 대표적인 실학자로는 이익, 유수원, 이중환, 이건창, 박제형 등을 들 수 있다.

이익의 견해는 관직 수는 적은데 관직을 차지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은 것이 당쟁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유수원의 견해는 문벌의 폐해와 주론자의 여론 조작 때문에 당쟁이 생겼다고 보았다. 관직수는 적고 관직을 바라는 사람은 많기 때문에 당쟁이 심해졌다는 유수원의 견해는 이익의 주장과 흡사하다. 

그러나 해결방법으로 사. 농. 공. 상의 사민이 각각 본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하여 신분제의 타파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이건창의 견해는 도학태중,명의태엄,문사태번,형옥태밀,대각태준,관직태청,벌렬태성,승평태구의 여덟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도학태중이란 도학을 지나치게 높이다 보니 자격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도학을 핑계 삼아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려고 해서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요.

명의태엄이란 명의에 가탁해 상대방을 깔아뭉개니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요,

문사태번이란 남의 글을 흠잡아 상대당을 타도하려 하니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고

형옥태밀이란 상대방을 난적으로 몰아 득세를 하려 하니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다.

대각태준이란 대간의 언론이 지나치게 준엄해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요,

벌열태성이란 문벌 가문이 패거리를 지어 관직을 독차지하려 하니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며,

승평태구란 임진, 병자란 이후에 200여 년간 밖으로 대규모의 외적이 쳐들어온 적이 없어 정신을 못 차리고 당쟁만 일삼았다는 것이다. 


광복 이후 학자들의 견해.

이태진의 견해는 우선  당쟁이라는 용어는 한국인을 폄하하기 위한 오염된 용어이니 써서는 안되고, 그 대신  붕당정치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한말 일제하에서 정치와 역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입장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져 쓰이기 시작한 용어이다. 조선왕조 당대에는 당쟁이 아니라 붕당이란 말이 주로 쓰였는데 주로 일인 학자들이 파쟁 성을 부각하여 붕당 간의 싸움이라는 뜻으로 당쟁이란 용어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3. 사림정치 즉 조선시대 정치의 문제점 

다음은 송찬식이 작성한 글로 이중환 선생의 다음과 같은 글에 착목해 사림정치의 권력구조를 천명했다.

대개 우리나라의 관제가  상세(上世)와 달라 비록  삼공육경(三公六卿)을 두어 여러 관청을 통솔하고 있지만 대각(臺閣) 에 치중해 

풍문 (風聞 ) - 직접 견문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들은 정보를 가지고 공격하는 것

- 피혐 (避嫌) - 공격을 받은 사람이 혐의를 피해 사표는 내는 것

- 처치 (處置) - 공격한 언론기관이 아닌 다른 언론기관에서 사실을 조새해 판결을 내리는 것

의 법규를 두어 오로지 의논으로서 정사를 삼고 있다. 무릇 내외의 재비를 3공(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게 시키지 않고 오로지 이조에게 귀속시켰으며, 또한 이조의 권한이 무거워질까 염려해 3사의 임명은 판서에게 돌리지 않고 오로지 전랑에게 맡긴 까닭에 이조의 정랑. 좌랑이 또한 대각의 권한을 주도해 3공 6 경이 벼슬은 비록 고관대작이지만 조금이라도 만족 스러지 못한 점이 있으면 전랑은 3사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논하게 하는데, 조정 풍속이 염치를 숭상하고 명절을 중히 아는 까닭에 한 번 탄핵을 받으면 부득불 벼슬을 버리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전랑의 권한이 3 공과 서로 같다. 


4. 붕당의 발생과정.

선배 사림과 후배 사림의 충돌은 1575년(선조 8년) 에 일어났다.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추천된 것을 심의겸이 반대한 데서 사림 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 것이다. 김효원을 편든 사람들을 동인, 심의겸을 편든 사람들을 서인이라 했다. 당시는 동인의 세력이 강해 많은 사람들이 동인에 가담했다. 그러나 동인은 정여립 옥사를 과도하게 도루어, 동인을 해친 서인 정철의 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갈리었다. 

정철의 죄뿐만 아니라 서인들을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이발, 정인홍, 등 강경파를 북인, 온건파를  남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남인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 화의론에 찬동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의병을 많이 일으킨 북인이 집권해 광해군을 옹립했다. 북인은 정치적 이해관계로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갈리었는데 대체로 광해군조에는 대북이 우세했다. 

조선 후기 당쟁은 크게 노론, 소론, 남인으로 삼분되었다.

노론은 이이. 송시열 계이고, 소론은 성혼, 운선거계이며, 남인은 이황. 조식계였으나, 영남 남인들은 이미 선조. 광해 군조에 떨어져나가고 윤휴.허목.허적계의 경기도. 충청도 남인들(기호 남인) 만이 살아 남았다. 


물론 이건 순수 이성무 선생의 견해이고 통설이기도 하다. 다른 논문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선조시대를 기점으로 훈척 세력은 지고 사림 세력이 실제 권력과 정치권에 대거 진입한 시대는 맞지만 그렇다고 민생이 안정되고 정치가 나아진 것은 없다는 것이다.

대신권의 무력화 그리고  언관권의 비약적  강화로 조정에는 기강이 서지 않고 통영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선조 초반의 정치적 상황이기도 한 것이다. 



5.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

사대부 정치기 : 고려말 조선초 유학적 소양을 지닌 문관 관료인 신흥 사대부들이 집권한 시기.

이들은 새로운 농업 기술인 중국의 강남 농법을 도입해 경제적 기반을 닦고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신진 학자 관료들이다. 

 

훈신 정치기 : 사대부 정권이 확립되자, 이들의 기득권이 강화되어 사대부 독주의 정국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해 수양대군이 (1453년) 쿠데타가 일어난다.  이 이후 250명의 공신이 등장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가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물론 이때 세조는 자기를  지지하지 않는 집현전 학자들 대신 김종직을 비롯한 젊고 야심 찬 사림을 정계에 불러들이게 된다. 


권신 정치기 : 공신 세력의 도태와 늙어감으로 인해 정권은 외척 세력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 시기다.


사림정치기 : 바로  이때부터 사림정치의 시작과 동시에  붕당정치라고 말하는 붕당이 생겨나게 된다. 


6. 붕당 이후의 정치과정.

선조 그리고 광해군 인조 까지는 붕당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통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인조 때까지는 민생이 극도로 피폐했으며, 북으로는 오랑캐가 남으로는 일본 오랑캐가 끊임없이 공격하였으며, 사회적으로는 사노비가  급증하였으며 민생은 그야말로 파탄 일보직전이었다. 


7. 결론.

조선 망국의 책임이 당쟁과 관련이 있는가?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개인적 소견이다. 그 이유로는 가문과 학벌, 지역별로 나누어져 싸우도 보니 국론이 분열되고 외침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물론 조선 사림정치의 틀은 비판과 견제라는 시스템이 서양 민주주의보다 한 발 앞선 시스템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무릇 권력이란 상대방을 일망타진해야 끝이 난다. 

현재의 정치가 과거와 다를 것이 무엇 있겠는가? 명분은 사라지고 오리자 자신의 입지만이 중요할 뿐, 안민(安民)은 그 어디에도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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