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배층집단의 권력 대물림
조선시대!
한국의 유교는 어떻게 사회적 입법의 지렛대가 되었을까?
그리고 지배층(권문세가, 양반) 권력의 되물림과 국가의 관습이라는 표현에 포함된 문화적 정체성의 명확한 개념을 정비하기 위해 중국과는 다른 유교문화를 우리는 어떻게 만들어 나갔을까?
또한 제사는 왜 지내는가?
족보의 형성과정은 무엇이고, 우리가 오늘날 성묘하는 문화는 어디에서 근거하는가?
이런 여러가지 의문점을 지닌채 오랫동안 살아왔지만, 궁극의 대답은 바쁘다는 핑계로 늘 외면되어 왔다.
그리고 그 실체를 몇 가지 논문과 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고려말의 유학자들은 당시에도 권력을 잡고 중앙의 주요관직에 있으면서도 왕조교체 라는 모험을 단행한다.
why?
신유학의 경전(유교 그리고 성리학 다른 이름으로 주자학(朱子學)) 의 역동성이 신 왕조건국으로 이어질 만큼 도덕적으로 획기적 이였는가?
그렇치 않고 일부 권문세가에서 밀려난 신진사대부들이 기존의 사대부가 소유한 거대한 농장(전시과 제도로 인한 토지 해택) 때문에 자신의 몫이 없어 종종 궁핍하게 살아야 했으며 현 경제상황(고려 말) 에 불만을 품어 무인세력(이성계) 과 손을 잡은 것인가?
이는 아마도 개별적 정치상황이였을 뿐일 것으로 사학자들은 추측한다.
여전히 통사는 왜 신진사대부들이 무인세력과 손을 잡고 왕조교체라는 모험을 단행하고 그 새로운 문화를 뿌리내리기 위해 신유학(유교)를 바탕으로 사회체제를 구성해 나갔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그러나 몇몇 사료에서 발견된 사실과 인류학적 접근법으로 유추를 해본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 될 수 있다.
한국의 유교화 과정은 네 가지로 크게 요약된다.
우선 고려시대의 사회 ,경제적 환경은 아래와 같다.
고려는 귀족, 평민, 그리고 노비로 구성된 고도로 계급화된 사회였다.
사회 지위는 주로 가문을 배경으로 하였으며 적어도 왕조 초기에는 쉽게 바뀔 수 없었을 것이다.
지배 엘리트인 귀족은 많은 특권을 가진 엘리트 지배계급이였다.
귀족 집단은 변하지 않는것이 아니라 고려 사회의 전개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이들을 받아들였다.
고려 왕조를 창건한 귀족들은 태조의 논공행상에 따라 건국 공신이 된 이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사회 배경을 가진 인물들로 구성된 혼합집단이다.
이들은 신라귀족,군사, 지휘관 그리고 지역의 실력자들이었다.
실력자들은 지방에 자신의 경제 기반이나 군사 기반을 소유하여 건국 초기 왕조에 만만찮은 위협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들 호족을 개성에 있는 중앙정부로 통합시켜 강력한 왕권에 예속 될 수 있는 관료로 창출하는 것이 고려 초기 국왕들의 주요 과제였다.
그리하여 광종에 이르러 처음으로 원래의 엘리트들을 숙청하고 중국을 본떠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체택하는등여러 관료 적 수단을 동원하여 초기의 엘리트들을 억누르려고 하였고 마침내 사회에 유교적인 제도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후 전시과를 시행하여 국가에 봉사하는 이들에 대한 보상을 제도화 하였다.
처음에는 출생과 세습만이 귀족에 속하느냐의 여부를 결정하는 주요한 조건이였다.
그러나 국가 기구가 점차 관료화 됨에 따라 인물에 대한 사회적 평가나 과거시험에서 입증된 능력과 지식을 우선으로 하게 되면서 관직이 지위의 새로운 근원이 된 것이다.
따라서 통제할 수 있는 관료적 요소를 채용함으로써 고려왕조가 시행한 유교화 작업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후 자연스럽게 한국사회의 유교화 작업은 그 기틀을 마련하고 조선으로 넘어간다.
둘째 새로운 사회모델의 모색이다.
신유학(유교) 수용 초기에 주자를 추종한 한국의 신유학자들이 중국의 고재 중 중국 요. 순 임금과 하. 은. 주를 세운 이들의 사회제도가 인간의 요구에 맞춤으로써 백성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여 위협하지 않고도 순순히 따라오도록 한 모델을 이상적인 사회모델로 제시 하였다.
그렇다고 왕조 대 귀족이라는 한국의 기본적인 정치구도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들은 이 구조의 일부였다.
세 번째는 고려의 사회제도 (하단 참조)를 없애며, 불교 전통 (하단 참조)에서 해방하고 국가의 관습이라는 표현에 포함된 문화적 정체성의 명확한 개념을 정비하는 것이다.
그중 사회통제의 일환이자 사대부의 사명은 이상적 행동규례로 규정한 가훈(家訓 )이다.
이 규율은 수신(修身)이 제가의 출발점이라는 유교 가르침을 강조하고 개인의 의무를 동심원 중앙에 놓았다.
따라서 사회의 도덕 질서 속에 특권층 젊은이를 훈련하기에 적합한 가족 분위기를 창출하고, 결과적으로 사대부라는 적합한 지위를 얻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 사회통제의 일환이자 이데올로기를 일상생활에 실천하기 위해 주자의 마지막 작품인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유용하다
첫째, 의례와 법 사이의 균형을 잡으며 그 안에서 천지의 원리를 구현하여 인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중요하다
둘째, 백성이 불교 전통에서 해방되어 도덕적인 삶을 지향하도록 이상적 의례편람을 제공하였다.
특히 상례와 제사에 대한 입법은 불교의 오용을 막는 유익한 해독제로 작용하였다.
네 번째로 한국을 유교사회로 확립하기 위해 종법(宗法)을 사회 기반으로 이식하여 출계집단(出系集團) 안에서 부계친 의식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화 하기 위해 제사라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제사는 단순히 죽은 사람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제사는 유교구도 속에서 종법을 의례적으로 실천하여, 산사람과 죽은 사람을 하나의 부계 출계집단의 성원으로 동등하게 이어준다. 무엇보다도 제사는 집안과 공적 영역 모두에 의미 있는 체계를 규정한다.
‘경국대전’ 에는 본가를 영속화하는 수단으로 적장자 원칙을 처음 확립하였다.
이는 계승문제에 장자상속을 도입한 것은 한국 사회가 고려 전통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첫 걸음이었으며, 수평 지향적 사회에 장자상속이라는 수직적 원칙을 이식해야 했던 일이었다.
제사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지위 의식과 연결되어 있었다.
장기간에 걸친 혈통순환은 사회 정치적 엘리트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앞서의 이야기를 종합해 본다면 한국의 종족은 지역 공동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적. 경제적 실체일 뿐 아니라 관리를 배출하는 충원지 이기도 했다. 달리 말해서 종족 조직은 정치과정과 직접 관련이 있었다. 이것을 중급 관리인 김동金憧(1673~1676) 은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이조의 관리들은 국왕에게 누군가를 천거할 때 으레 누구의 아들이라거나 형제라고 하며 누구의 족속이므로 임명하거나 승진할 만하다고 언급합니다. 이들은 천거한 인물들이 현명한지 어리석은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 결과 종족 배경은 한 인간의 정치 경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과거시험 응시자들은 이에 대해 철저히 조사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례식과 풍수지리.
먼저 중국 고대 문헌에서는 상례의 사회적 의미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기' 에는 장례와 제사는 사람들에게 선과 애정을 심어주는데 도움이 된다.
상례와 제사를 분명하게 이해한다면 비로소 자식된 도리를 다하게 된다
라고 했다. 공자 역시 이것은 살아가는데 도덕 수준을 높이는 것이라 말했다.
조선초기 신유학자들은 사후세계에 대한 불교와 유고의 관념은 기본적으로 상호 대립된다고 판단하였다.
불교신자들은 화장을 선호했는데 이것은 정신이 육체에서 벗어나는 즉시 극락에 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학자들은 '예기' 의 한 구절인 '장사지낸다'는 용어를 '간직하다' 는 의미로 바꾸어 해석했다. 유교의 관점으로 볼때는 묘가 이승과 정승 사이를 근본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므로, 묏자리를 마련하는 일이 장례식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불교에서는 주검이 흩어져서 '물고기와 새들의 먹이' 가 되는 반면, 유교에서는 주검을 매장하여 삶과 죽음사이를 순환한다고 여겨지는 기를 보존하도록 하였다. 만일 조상이 땅에서 평온을 찾는다면, 자손은 세상에서 평안을 찾는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상호의존은 나무에 비유되었다.
즉 나무뿌리가 불탄다면 그 나무의 가지와 잎은 말라죽으므로 번성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성현들은 시체가 너무 빨리 부식할 것을 우려하여, 안팎이 견고한 관을 짜고 시체에 두꺼운 수의를 입혔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 관 속에 침입한 해충이 주검 대신 먹을 수 있는 곡류를 넣었다는 것이다. 유학자들은 망자를 사당뿐만 아니라 묘에서도 돌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 가운데 하나인 효(孝) 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바로 이 효 가 고려시대 공계(부계와 모계) 와 조선시대 부계 사이의 전환이 일어나게 만든 결정적 매개체였다.
효는 유교적 입장에서 보았을때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 사상이다.
효는 집(家) 를 중심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내부적으로 직계가족에 대한 효를 중시하여 가문을 중시하게 만들어 엘리트 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한 하나의 정신적 무장이였다. 그러나 공계사회(고려시대)에는 효를 꺼집어 내기는 힘들었다 왜 공동체사회이기 때문이다.
3년상의 유례
논어에 포함된 공자의 가르침에서 찾을 수 있다.
아이는 3살이 되어야 부모의 품을 떠나므로 3년동안 애도하는 것은 하늘 아래 어디에서나 같아야 한다.
그렇지만 '의례'에 따르면 모친에 대한 3년상은 부친이 먼저 사망한 뒤에만 적용할수 있다.
평민의 제사
유교식 제사는 엘리트의 특징으로 존속하였다.
'예기' 에서 예는 평민에게 내려가지 않는다' 는 격언에 따라 낮은 사회계층에서는 유교식 의례를 수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오늘날 마침내 일정한 형식의 의례가 대중의 의레로 여과되어 내려갔고, 평민도 결국 조상을 기념하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봉사(奉祀)의 주제자(主祭者) - 적장자의 제사
조선초기에는 장자 혼자 봉사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자손들 심지어 사위까지 돌아가며 봉사했다.
경제적 이유에서 그와같은 책임분활이 고려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들 아들에게 동등한 의무를 부여하는 고려의 강력한 양변적 관행에 기인한다고도 생각된다.
형제자매가 많을경우 몇 년에 한 번씩 봉사 책임을 맡았다. 또는 봉사자가 시제와 묘제를 책임지고 동생들은 기제를 나누어 맡기도 했다. 중요한것은 예학자들은 제사를 돌아가며 지내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묘제는 묘 앞에서 행하므로 흩어져 살던 후손들이 이때는 모두 참석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고려의 사회제도
고려의 사회제도는 친족구조 중심이자 공동체 사회로 구성되어있다.
다시 말해 나를 중심으로 친족,인족,외족 세 계의 집단을 형성하여 부락단위로 생활을 하였다.
고려의 사회제도를 돌아보면 아래와 같은 주요 특징들을 볼 수 있다.
우선 가장 특징적인 거주형태의 하나가 처가 거주제도였다.
왜냐하면 이는 고려 여성들에게 경제력의 원천은 남자 형제들과 나누어 갖는 상속권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에 따라 상속권을 부여받은 여성은 매력 있는 신부일 뿐만 아니라 그 가문의 중요한 구성원 이였다.
다시말해 균분상속제 였다.
따라서 재산을 소유한 딸이나 누이가 혼인한다고 해서 가문이 이들을 저버리는 것은 가문에 대한 이해에 맞지 않았다
둘째, 정치세계 에서는 종종 장인의 음서 특권으로 출세하기도 하였으며 사위가 특별히 처가에 거주하는 동안, 사위는 처가 식구의 중요한 구성원의 한 사람 이였다.
셋째, 여성이 첩이라는 단어와 결합하여 사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고려에는 첨이 없었으며, 중혼하는 경우라도 (배우자와) 성격이 맞지 않아도 헤어지게 된다.라고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려사)
고려시대에는 부인을 쫓아낸다고 쉽게 위협할 수도 없었으며, 부인은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남편을 떠날 수 있었다.
그 근거로는 정치. 경제적 상속권이 있었기 때문이며, 고려의 경우 상당수 남성들이 분명히 처가살이가 정치적 경제적 진출의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전기에는 장자 혼자 봉사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자신들 심지어는 사위까지 돌아가며 제사를 지냈다. 높은 제사비용 탓에 그와 같은 책임분활이 이루어졌을것이라고 사학자들은 이야기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조선후기와는 달리 모든 자식, 심지어 딸도 동등하게 의무를 부여한 고려의 관행에서 기인했다고도 주장되고 있다.
불교 전통
조선 왕조가 건국된 이후 제도와 종교 양측면에서 더욱 거세고 정교하게 불교를 공격했다.
비판의 초점은 두 가지에 맞추어졌다.
불교가 저승을 강조하여 현세와 무관하게 만든다는 것과 자신의 수양에만 몰두함으로써 가족과 나라에서 개인을 소외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에 신유학자인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통해 신유학이 적극적으로 수신으로 인간 본성을 충분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비해 불교는 같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명상적. 수동적 방법을 보인다고 비난하였다. 또한 승려들이 상례를 치를 때 부처의 특별한 복을 받으려고 헛된 바람을 갖도록 만들어 재산을 탕진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잘못된 신앙으로 백성을 위협에 빠뜨린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당나라에서 송으로의 건국 그리고 170년 정도 지난 뒤 여진족이 북중국을 침입하여 금나라를 세우면서 송나는 남쪽으로 물러간다. 그리고 역사는 남송시대에 이르러 사회체제의 개편이 이루어 진다.
송나라 이후 과거제를 밑바탕으로 중앙집권의 관료국가시스템이 정착되면서 중국은 신분제를 벗어났다.
이런 시스템에 대응한 사상체계가 주자학이다.
주자학은 일군만민(一君萬民)을 주장하는 철학이자 통치이념이다.
조선과 중국은 지역 내에서 독점적 지배체제를 갖는 영주를 허용하지 않았다.
주자학적 교양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은 국왕 일인하의 관료시스템의 구성원이 되었다.
중국과 조선은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나라였던 것이다.
여하튼 송대에는 사회 행위나 조직의 가치가 부계 출계집단의 중심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 출계집단은 공동 조상을 의식하면서 출계에 기초를 두고 남계 후손을 확정했다.
그런데 왜 중국과 한국이 두 국가가 겪은 왕조변환기를 겪으면서 다른 차이를 보일까?
다시말해 중국의 송나라에에서는 귀족의 전통이 완전하게 개선된 과거제도로 파괴된 반면 한국에서는 왕조가 교체되었는데도 사회와 정치에서 강력한 귀족적 요소가 나타나는가?
여기에서 유교는 어떤 역활을 하였는가?
유교에 존재하는 평등주의적 요소와 위계적 요소는 이 같은 합성을 허용하였는가?
조선은 신유학을 정치철학으로도 이해했지만 사회철학으로 더 이해를 했다. 유교의 평등주의도 인정한 동시에 새로운 관료들은 출계를 제한하는 유교적 계책을 적용하여 장기적으로는 자신의 사회지위와 정치권력을 높였으며 사회영역에서든 정치 영역에서든 어떠한 평등주의에도 맞서 이를 지켰다.
한마디로 한국에서는 유교가 귀족적인 요소를 보전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경계도 명확하게 굳힐수 있었다.
한국정치의 부정부패와 역사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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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당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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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여행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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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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