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2021년의 책들을 기록하며.
올 한 해 여러 권의 책을 읽었다. 값진 시간들이었던 만큼 마음의 울림도 적지 않았다.
독서를 왜 하는가? 높은 지위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독서를 하는가?
모든 사람들이 그렇치만은 아닐 것이다. 번뇌와 집착을 버리가 위해, 때로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물질이나 권력보다 더 많은 지혜를 얻기위해 타인에겐 사랑을 더 많이 받기 위해 라고 말할 수 있다. 낮은 지위가 끼치는 영향이 물질적인 맥락으로만 볼 수 없다. 적어도, 생계는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로 인한 고통이 신체적 불편으로만 그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제 생계유지를 조금 벗어나, 삶의 본질은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삶이라면 평범한 일상생활을 자신만의 의식을 통해 일상을 보물로 만들어 나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 이런 나 만의 작은 의식을 갖는 것이다.
올 한 해도 좀 더 많은 독서를 원했으나 뜻대로 되진 않았다. 허나 몇 권의 책들은 삶의 자양분과 지혜를 얻기에 충분했으며, 깊게 생각해 볼 다양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볼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리 스스로 매력 있는 사람이 되고자, 다른 사람에게 주목을 하고, 관심을 갖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사근사근하게 맞장구치면서 알은 체를 해주는 것이 우리가 사회적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관계의 지혜라면 최소한 우리는 그에 걸맞은 노력을 해야 한다. 결국 인문의 종착역은 사람이 아닐까. 남 사는 것을 잘 보는 이유 또한 사람 공부를 통해 내가 살아갈 길을 알기 위함이다. 이건 가방끈 길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즉 학식이 많다고 하여 세상사 돌아가는 이치에 밝다고 할 수 없다. 책을 통해 견문을 넓히고 경청을 통해 사람을 볼 줄 알며 그 속에서 자기의 모습을 점차 알아가는 것이 스스로 밀도 있는 삶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리라.
유년시절, 책을 읽었다면 문해력을 갖춰 지문에 대한 높은 이해력이 성적을 좌우하기도 하며,그것을 바탕으로 성적은 좌우되기도 한다.
성인이 된 후에 독서는 "현실 파악"과 "문제 해결"이라고 여겨진다. 더불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내면의 힘"도 얻을 수 있다. 이런 것은 유투브를 통해서도 얻을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학생을 거쳐 성인이 된 사람들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것이 내 변치 않는 생각이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고소득, 전문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재테크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책을 올바른 자세로 읽는다면 최소한 "자기 관리 능력"은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자기 관리를 하면서 돈을 번다거나 하는 물질적인 것도 자신의 상황과 시대에 맞춰 스스로의 본질을 알며 맞춰 나가는 것이다.
지금 다시 물어본다.
지금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책 읽는 노인이 되기 위함이다.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이 있다는 것은 그건 아마 본인이 스스로의 머리로 판단할 수 있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데에서 나오는 자신감일테다.특히 독서 모임 등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분들이 특히 힘 있어 보인다.
활동하는 어린이가
독서를 통해 지식을 쌓아가고
고뇌하는 젊은이가
독서를 통해 스스로의 능력을 획득하고
번뇌하는 중년의 독서가
"현실 파악"과 "문제 해결"이라면
노년에는 평생 독서를 통해
판단력과 소통 능력을 지니고 산다.
책을 읽는다고 그것이 곧바로 돈으로 연결되지는 않겠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선종의 핵심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①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로써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울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선종에서 내려온 깨달음에 대한 인식의 태도이다.사람들이 흔히 아는대로 진리는 글로써 드러낼 수 없다.말이나 글이라는 것이 진리를 포용하기에 부족하고, 온전한 대변을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② 직지인심, 견성성불 (直指人心 見性成佛)
자신의 마음을 직접 응시하는 것. 스스로의 본성을 보고 깨끗함을 확인하는 것.
여러군데 볼 것없다. 내마음 하나 살피는것이 시작이자 끝이다.
선종에서의 깨달음은 마음의 본성을 꿰뚫어보아,
마음으로 법을 전하는 것을 그 근본으로 하고 있다.
Best 1.
깨달았다는 것. 그래서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주인공으로 살아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석가와 미륵마저도 노예로 거느리고 있는 '그'는 누구입니까? 법연 스님의 질문에 '나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석가모니나 미륵의 노예가 될 것인가? 그들의 주인이 될 것인가?"
석가도 미륵도 오히려 그의 노예일 뿐이다. 자 말해보라 그는 누구인가?
작가는 여러명의 철학자를 대동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 니체를 등장시켜 그의 철학을 소개한다.니체에 대해선 조금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
지적세계의 다윈이자 해머로 철학하는 사람 -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니체가 한 일을 크게 세가지다.
① 신은 죽었다.
② 학문의 계보학을 처음으로 만들었다.
③ 도덕의 뿌리는 원한감정이다.르상티망(ressentiment)
1. 신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가장 유명한 선언이다. 진리와 정의, 그리고 아름다움의 기준으로서 신의 지위가 박탈되었다는 선언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일체의 외적인 권한에 기대거나 모방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신은 죽었다" 라고 말한 이유는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모방과 숭배의 대상이였지만 이렇게 모방의 대상이 있다면 어떻게 자신만의 가능성을 현실화 할 수 있겠는가 라고 역설한다. 누구도 모방하지 말라고 했던 차라투스라 본인이나 그의 가름침도 "나를 부정하라","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오직 그럴때에만 스스로 자기만의 존귀함을 깨달을 수 있으니.
그렇기 때문에 참 된것은 없다.모든것은 허용되며 진리는 결코 따로 없다는 것이다. 모든것은 네가 만들어라. 힘에대한 의지는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당신이 당신의 것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2. 학문의 계보학
학문의 방법론으로서 ‘학문의 계보학’을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제사를 지내기 싫다. 이 명제를 가지고 내가 왜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
언제부터 제사를 지냈는지를 뿌리부터 파해쳐 나뭇가지 모양(Tree 구조)의 가지형태로 계보를 만들어 나간 최초의 철학자이자 문헌학자이다.
그 끝을 들여다보면 권력관계가 최초 태동했으며 그 속에 파벌과 권력을 위해 문화와 관습을 만들어 간것이다. 나중에는 그걸 푸코가 따라하게 된다
3. 도덕의 뿌리는 원한감정이다.
니체는 ‘원한’을 약자의 도덕감정으로 분석하고, 약자들이 어떻게 가치의 전도를 이루었는지 『도덕의 계보』에 설명했다. 니체는 약자가 강자에 대해 가지는 질투, 원한, 열등감 등의 감정인 시기심을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감정)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독일어에는 없는 단어이기에 프랑스어 그대로 사용한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시험에 불합격하였거나 노력을 하지 않아 돈을 벌지 못하였으면서도 마치 다른 사람들은 부정을 저지르거나 행운이 따라 성공한 것이라고 질투하고 시기하는 경우가 그 예이다.
또 다른 예는 이른 나이에 교수가 된 사람에게 원로교수가 그에게 단 한 가지만을 주문한다. 바로 학생과의 사랑을 하지마라고 당부한다. 그 기저에는 자신이 했다라기 보다는 나도 못했는데 너가 학생과 사랑을 한다면 내가 너무 억울할것 같다는 원한감정이다. 이것을 처음으로 밝혀낸 사람이 바로 니체다. 약자들의 원한감정.
니체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태도라고 생각했다. 니체 철학의 핵심에는 “완벽한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자신의 방향성을 바꾸려는 시도” 가 있었다. 이는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알려준다.
Best 2
순응은 눈먼 사람의 허세.
우리는 상대의 반응을 보고 일차적으로 나오는 지혜를 직관(intuition)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모든 모든 행동은 내재된 교양(tuition)을 통해 나타난다. 이처럼 내 생각의 깊은 곳에 숨어있는 힘. 은 축척된 교양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곳에서부터 우리의 행동과 사상의 원천이 있고 우리에게 지혜를 주는 영감의 허파가 숨 쉬고 있다. 생각이 얕은 사람들은 남의 의견을 반박하듯이 직관의 진술도 반박한다. 그들은 직관과 지적인 개념을 서로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관이란 변덕스러운 것인가? 난 운명이라 생각한다.
Best 1.
인생의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 당신 자신을 자기 이외의 곳에서 찾지 말라.
위 하나의 격언을 얻기위해선 책 전체를 완독해야 한다. 오롯이. 우리에겐 늘 지혜가 필요하지만 삶의 단계마다 필요한 지혜가 다르다. 열다섯살에게 ‘어떻게’ 라는 질문과 서른다섯살 또는 오삽다섯 살에게 중요한 질문은 갔지 않다. 철학과 사상은 각 단계에게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Best 3
철학이 질문을 던지는 기술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질문이란 무엇인가? 질문은 일방향이 아니다. 질문은 양방향으로 움직인다. 질문은 의미를 구하고 또 전달한다. 적절한 때 친구에게 적절한 질문을 묻는 것은 연민과 사랑의 표현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자주 질문을 무기로 사용한다. 상대를 저격하고 자신을 저격한다. 질문으로 변명을 삼고 나중에는 정당화한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진정한 창문을 눈이 아니라 질문이다. 볼테르가 말했듯, 사람을 판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의 대답이 아닌 질문을 보는 것이다.
Best 2.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공부하며 불교를 가장 위대한 종교라 선언했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자기 서재에 부처상을 올려두기도 했고 쇼펜하우어를 '프랑크푸르트의 부처'라고 했다. 그는 내면세계에 관심이 많았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이 세계도 알 수 없다. 우리 모두는 환한 불빛 아래서 자기 열쇠를 찾는 술주정뱅이나 마찬가지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여기서 열쇠를 잊어버리셨소?" 지나는 사람이 묻는다. "아니오 열쇠는 저쪽에서 잃어버렸소." 술 주정뱅이가 저쪽 어두운 주차장을 가리키며 말한다. "그런데 왜 여기서 열쇠를 찾고 있는 거요?" , "여기가 환하니까요."
쇼펜하우어는 달랐다. 그는 가장 어두운 곳을 살폈다. 살면서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해답을 찾아야 할 때 우리는 인터넷을 열고 책을 찾는다.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스스로 생각해서 해답을 내놓는 것이 100배는 더 가치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자기 생각과 함께 머무르지 않고 너무 자주 책(인터넷) 앞으로 달려간다고 말한다.
Best 1.
지혜는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그 뜻을 정의 내리지 못하는 단어다. 심리학자들은 지혜의 정의에 대해 수십 년간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1960년 베를린 지혜프로젝트는 지혜를 규정하는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사실적 지식, 절차적 지식,인생전체에 걸친 맥락주의, 가치 상대주의,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나는 이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기준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불확실성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
보통 우리는 불확실성에서 도망쳐 확실성을 향해 달려간다. 우리는 확실성이 아닌 정반대에서 즐거움을 찾기로 선택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삶은 꽤나 다르게 느껴진다. 불확실성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낮에 회사에서 있었던 심란한 일은 하루의 끝에 와인한잔으로 축하할 일이 된다. 불활실성에서 즐거움을 찾으면 질병마저도, 신체적 고통이 계속될지라도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이러한 변화의 관점은 미묘하지만 그 영향력은 엄청나다. 이것이 바로 철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