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손맛 레시피
몇 해 전 요리 초보자를 위한 요리 프로가 방영돼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다. 진행자는 집에 흔히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 금세 뚝딱 한 상을 차려냈다. 원래 요리가 저렇게 쉬웠던가 싶을 정도로 쉽게 차려내는 밥상에 프로그램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렇게까지 인기가 있는 이유인즉 기존 요리 고수들은 계랑스푼과 계랑컵을 이용해 정확한 계랑을 알려주다보니 숫자에 집착하느라 맛이고 모양이고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 요리는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적당히 입맛에 맞춰 알아서들 간하셔유. 참 쉽쥬?”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하니 정말 쉽고 맛있는 요리를 할 수 있어 신기할 정도였다. 그가 말한 적당함. 그 적당함을 나는 분명 오래 전 엄마한테서 이미 익히 듣고 자랐는데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어린시절에 동네에서 잔치가 자주 열리곤 했다. 손맛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던 엄마는 결혼식이며 환갑 등 잔치가 있는 날이면 제일 먼저 불려갔다. 솜씨도 솜씨지만 불평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일을 해내던 엄마의 성품에 찾는 일이 잦았다.
특히 엄마가 만든 더덕양념구이와 돌나물 물김치는 대한민국 최고라고 할 정도였다. 더덕 껍질을 일일이 숟가락으로 벗겨 소금물에 담가 쓴물을 빼 홍두깨로 살살 두드린 뽀얀 더덕살에 매콤달콤한 양념을 발라 숯불에 구워내면 서로 먼저 맛보겠다고 줄을 섰다.
들판에 푸릇푸릇 돌나물이 자랄 때면 여린 순만 골라 씻어 체에 받쳤다 찹쌀풀에 마늘, 액젓을 섞은 김치 양념에 살살 버무려 고운 고춧가루물을 부어 한나절 익히면 상큼한 돌나물 물김치가 만들어졌다. 소면을 말아 한 그릇 내면 이보다 훌륭한 잔치음식이 없을 정도였다.
이런 기막힌 음식을 나는 스무 살 이후 더 이상 맛볼 수 없게 되었다. 어느 가을 갑작스레 병으로 엄마가 세상을 떠나셨다. 해질녁 집으로 들어서면 보글보글 구수한 된장찌개를 끓이던 엄마대신 온갖 재료만 늘어놓은 아버지의 등이 보였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 손수 설익은 밥을 짓고 멀건 국을 끓이고 비린내 가득한 멸치볶음을 만들었다. 입에 넣고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상황에 엄마의 빈 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나는 서점에서 요리책을 샀다. 쉽게 만들 거란 생각에 호기롭게 고기며 해산물로 잔뜩 장을 봐 요리를 했다. 계량스푼 대신 밥숟가락으로 계량을 해서인지 모양과는 달리 맛은 그럴싸 하지 못했다. 이마에 땀이 맺히도록 애쓴 모양에 아버지는 연신 맛있다며 칭찬을 했지만 동생들의 표정은 영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열심히 마르고 닳도록 요리책을 들여다보며 맛내기에 전념했음에도 요리 실력은 쉽사리 늘지 않았다. 돌도 씹어삼킨다는 성장기의 남동생마저도 내 요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할 정도였으니 말 다하지 않았을까. 맛을 내준다는 조미료의 도움으로 겨우 굶지 않을 정도였지만 미안함에 더 먹으라고 권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키우다 어느새 쉰을 훌쩍 넘긴 아줌마가 되었다. 이제는 제법 그럴싸한 요리를 해 멋들어지게 상을 차릴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요리책과 요리 방송의 도움도 있고 다양하고 좋은 조미료가 개발된 탓도 있다.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정체불명의 요리도 마법의 조미료만 솔솔 뿌려주면 기가 막히게 맛이 살아나니 참 세상 좋아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 어느 것보다 내 스스로 터득한 적당함의 미학이 가장 그럴싸한 이유가 될 것 같다.
“이 나물에는 소금을 얼마나 넣은 거야? 이 생선조림은 얼마나 조려야 되는 거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엄마에게 물으면 백이면 백 돌아오는 답은 하나였다.
“그냥 적당히 넣어. 눈대중으로 적당히.”
대체 그 적당함이 얼마였는지는 엄마만 아는 계량법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그 계량법으로 찌개를 끓이고 고기를 잰다. 1Ts이니 500ml니 정확한 계량을 하지 않고 눈대중으로 적당함을 맞추면 가족 입맛에 맞는 밥상이 차려진다.
그 적당함의 기준은 아마도 가족을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길을 밝히며 일을 나가는 남편을 위해 뭇국을 끓이며 그 수고로움에 고마움을 담고 사랑을 담았을 것이다. 고열과 배앓이를 하는 아이를 위해 쌀죽을 끓이며 어서 낫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복되고 복된 날을 축하하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더덕을 구웠을 것이다.
이런 정성과 사랑이 녹아있으니 어떤 음식인들 맛이 없었을까. 마음을 담을 생각은 않고 그저 정확한 계량에만 집착했으니 맛이 있을 리 없다. 대접하는 사람의 마음이 담기지 않은 음식은 그저 요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왜 쉰이 되어서야 깨달았을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만한 넉넉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나는 진즉에 내 사람들에게 맛난 음식을 냈을 텐데...
음식은 맛보다 추억으로 먹는다는 말이 있다. 어려운 형편에 고기 대신 콩밥을 짓고 두부를 조려 풍성한 밥상을 차려주셨던 내 엄마, 일년에 한 번 통 크게 남편의 생일을 위해 쌈짓돈을 꺼내 신선한 고기를 끊어다 미역국을 끓이고 불고기를 쟀던 어머니.
음식을 준비하며 엄마가 일러주고 싶었던 건 한 끼의 배부름이 다는 아니었을 것이다. 가끔은 남에게 져주는 미덕을, 조금 더뎌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이웃과 더불어 사는 재미를 알아가는 마음의 적당함을 일러주고 싶으셨을 거다. 사랑하는 아이들 곁에서 따듯한 밥상을 차려 일러주고 싶었던 진리를 미처 일러주지 못하고 떠나야 했을 그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그 무게를 이제야 깨달으니 나는 참 어리석은 딸이다. 하지만 이런 딸임에도 분명 엄마는 괜찮다 하시겠지.
곧 아버지의 생신이 다가온다. 없는 솜씨지만 예전에 엄마가 차려냈던 것처럼 뭉근하게 미역국을 끓이고, 더덕을 다져 굽고, 상큼한 돌나물 김치를 담가 찾아 뵈어야겠다. 그리고 엄마의 이야기를 디저트 삼아 이야기꽃을 피워야겠다. 동생들과도 엄마가 전하지 못 했던 적당한 손맛의 레시피를 공유해 추억을 나누며 햇살 좋은 봄을 만끽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