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을 놓치지 않게 도와주는 어른이 세상엔 꼭 필요하다는 것.”
어린 날의 결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그저 평범한 회사원 부모님의 삶으로 흘러갔다. 특별한 예술적 환경도, 화려한 배경도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운명처럼 가까운 동네 친구 삼촌이 김선두 화백이셨다. 나는 그 작업실의 냄새와 햇빛, 묵직한 붓질의 울림을 가장 먼저 배운 아이였다. 그 첫 경험은 그저 ‘그림을 배우는 시간’이 아니라, 나에게 예술이라는 세계가 문을 열어준 순간이었다.
엄마는 교육에 누구보다 진심인 사람이었다. 클래식 음악이 흐르던 집, 수영·기계체조·피아노까지 매번 “한 번 시작하면 끝까지 가야 한다”는 철학은 우리를 단단하게 길렀다. 덕분에 어린 나는 여섯 해 동안 선수반에서 물살을 가르고, 피아노 앞에 묵묵히 앉아 마디를 쌓아갔다. 끝까지 해보는 경험은 나의 첫 번째 자존감이 되었다.
분당이 신도시로 막 조성되던 시기, 서울에서 새로 이사 온 나는 말수가 적고 존재감도 흐릿한 아이였다. 그런 나를 학교 미술 선생님이 유독 오래 들여다보시더니 “그림이 좋은 아이”라고 말해주셨다. 그 한마디가 중학생 나를 움직였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며 강남에 있던 미술학원을 가게 만들었다. 저녁도 거르고 그림을 그리다 보면 교복 치마가 돌아갈 정도로 살이 빠졌지만,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설렘이 허기를 전부 이겨냈다. 그 시절의 나는 그저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IMF가 삶을 뒤흔들었다. 아버지의 회사도 휘청였고, 부모님이 피땀으로 모아 지은 건물에는 빨간 딱지가 붙었다. 세상의 무게를 너무 일찍 알아버린 나는 ‘돈을 함부로 쓰면 안 되는 삶’을 그때 배웠다. 집안 형편에 맞춰 대학을 선택했고, 부유한 아이들 사이에서 기죽지 말라며 용돈을 챙겨주던 엄마의 마음을 읽어내며 만 원짜리 한 장도 쉽게 쓰지 못했다.
유학을 가는 친구들을 보며 동경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나는 어느 순간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간이 너무나 즐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술학원 아르바이트가 일이 아니라 ‘행복한 자리’로 느껴졌다. 아마 그 때 이미, 나의 길은 조용히 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화려하지 않은 그 시절을 지탱해준 건 엄마였다. 학원비를 마련하려고 이모에게 돈을 빌리면서도, 딸이 좋아하는 일을 놓지 않도록 끝까지 밀어주던 사람.
그 믿음 덕분에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림을 사랑하고, 예술을 가르치는 일을 해오며 삶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어쩌면 단순하다.
“좋아하는 것을 놓치지 않게 도와주는 어른이 세상엔 꼭 필요하다는 것.”
그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