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들에게 작업 과정에서 에세이를 쓰게 한다.
이는 표현력을 키우기 위한 부가 활동이 아니라,
그림 이전에 아이의 사고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핵심 과정이다.
아이가 무엇을 그렸는지는 결과에서 보이지만, 왜 그렸는지는 과정 속에서만 드러난다. 말로 정리되지 않은 생각은 그림으로 먼저 나타나고, 글은 그림을 되짚는 통로가 된다. 그래서 나는 에세이를 평가하지 않는다. 맞고 틀림을 묻지 않고, 문장의 완성도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선택을 인식했는지를 본다. 이 과정을 거친 아이들의 그림은 분명히 달라진다. 형태가 아니라 판단의 밀도가 달라진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 역시 처음부터 이런 교육을 했던 것은 아니다. 나 또한 정형화된 미술을 배웠고, 아무런 의심 없이 남들이 하던 방식을 그대로 반복했다. 8절 도화지 위에 크레파스를 쥐여주고, 정해진 주제를 정해진 방식으로 그리게 하는 수업. 이 방식은 지도하기 쉽고, 결과도 빠르게 나온다. 전시하기에도 편리하고, 보호자를 설득하기에도 수월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이의 사고가 머물 자리가 없었다. 아이들은 무엇을 그릴지 스스로 결정할 필요가 없었고, ‘잘 그렸다’는 기준은 언제나 어른의 눈에 맞춰져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문제는 아이들의 표현력이 아니라, 아이들이 생각할 틈을 허락하지 않는 수업 구조 자체였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수업을 멈췄고, 아동 미술심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그림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제공한 언어와 환경이 문제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 무렵, 나는 결혼을 했다. 삶의 리듬이 달라졌고, 작업실과 일상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맞닿기 시작했다. 커다란 캔버스 앞에서 사람의 눈을 그리고 싶다며, 빨간 얼굴과 파란 얼굴로 허구적 리얼리즘을 그리던 아버님의 작업을 가까이에서 보게 되었다. 그때 하나의 질문이 생겼다. 왜 우리는 사람 얼굴을 반드시 살색으로만 그려야 한다고 가르쳐왔을까. 왜 사실처럼 보이지 않으면 틀렸다고 말해왔을까. 아이들에게 상상은 늘 ‘나중에’ 허락되는 것이었고, 정확함은 언제나 창의성보다 먼저 요구되었다. 이 질문은 곧 나의 교육을 근본부터 바꾸었다.
자유미술공간 수업을 시작하며 내가 가장 의도적으로 하지 않은 일은,
다른 학원의 작업을 보지 않는 것이었다.
비교는 동기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이를 가장 빠르게 침묵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타인의 기준을 배우는 순간, 자기 감각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나의 실패와 시행착오, 삶에서 얻은 감각들을 숨기지 않고 전달했다. 예술이 언제나 확신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시간은 흔들림과 불확실성 속에 있다는 사실을 함께 경험하게 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결과를 잘 그리기보다, 과정에 머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질문을 미루지 않고, 선택의 이유를 말하려 애쓰며, 완성보다 방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게 미술이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지만,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은 언제나 기준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대신 아이들이 자기 언어로 쓰고, 자기 감각으로 그리는 시간을 끝까지 지켜주었다. 글은 생각을 정리하지만, 그림은 생각 이전의 감각을 드러낸다. 아이에게 그림은 말보다 앞선 언어이며, 글은 그 언어를 스스로 이해하게 만드는 도구다. 나는 이제야 그 순서를 정확히 알고, 그 순서대로 가르친다.
#집필중은에세이중일부분
#글을무단복제재생산을원치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