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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한결 May 09. 2020

밤새 벼락이 당산을 후려친다

브런치는 시간을 담는 공간

밤새 벼락이 당산을 후려친다.


수령 500년에 가까운 신령스러운 나무 당산. 조상 대대로 만수무강(萬壽無疆, 한없이 목숨이 긺)을 기원하는 나무 덕분인지 만수(萬壽)라는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장수한다. 하지만 당산이 벼락에 맥없이 두 동강 난 시점부터 사람들은 하나둘 자신의 시간 속으로 스러져간다. 마치 두 동강 난 당산이 불에 타 한 줌의 재로 자취를 감춰 버리듯.


읍내 장터에 다녀오는 길에 신세를 진 차량이 사고가 나자, 정다웠던 이웃사촌은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원수가 되고, 농한기 재미 삼아 두던 내기 장기로 큰 다툼이 일어나 병원 신세를 지는 이도 생겨난다. 여러 형제 중 하나가 먼저 세상을 등지자 남은 가족들을 홀대하던 이들, 이로 인해 마을을 떠난 이도 생긴다. 신흥 부자 세력이 소 떼를 몰고 와 쇠똥 내 풍기는 돈으로 기존의 가난한 토박이들을 몰아내고, 심지어 마을의 모든 행정을 휘어잡아 정겹던 옛 모습은 사진 속으로만 남게 된다. 지금도 고향을 방문하면 정겨운 그때 그 사람들은 한때나마 살다간 흔적만 남고, 반갑지 않은 고약한 쇠똥 냄새가 온 마을을 휘어잡고 있다.


안타깝지만 이 모든 게 과거와 현재의 내 고향이다. 나고 자란, 부모님이 잠드신 마을을 등지고 외지로 나가 타향살이를 시작한 지도 어언 30년이 넘어간다. 스무 살 남짓부터 고향을 떠나왔지만, 이제는 명절에나 가끔 벌초나 성묘를 핑계로 다녀갈 뿐이다. 다시 그 시절이 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나 이미 지나가 버린 수많은 어제의 일 아니겠는가? 더욱이 되돌리기 힘든 풍경과 고약한 냄새를 품은 돈의 그늘이란?


쓰러진 당산의 모습을 보고 ‘당산과 소년’을 주제로 이야기를 한편 만든다. 대학교 신입생 때 국어 과목 과제로 제출했고 덕분에 좋은 성적을 받는다. 그때가 ‘글 쓰는 삶’의 시작이다. 일기로 나만의 대화를 주고받던 것이 소설이라는 글의 형식으로 타인과 만나는 일, 어렴풋이 이 길이 오랜 소망의 길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한다. 말이 아닌 글로 이야기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하루의 시작은 가벼운데 그 끝은 무겁다. 


바쁘다는 핑계로 쓰는 일로부터 자꾸만 멀어지고 나중에는 읽는 일조차도 담을 쌓는다. 운명의 벼락이 이번엔 내 삶을 후려친다. 한때 재직 중이던 회사의 CEO가 ‘리더 간담회’ 때 남긴 노한 음성.


장차 이 시대의 리더가 될 사람들이 책을 멀리하다니! 이래서야 되겠는가!


나는 이때부터 없는 시간을 만들어내며 수많은 이들이 쓴 글을 읽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읽은 글에 대한 내 감정을 기록하며, 그 모든 결과물을 개인 계정의 블로그에 곱게 모으기 시작한다. 기록하지 못한 책이 많아 내가 읽어낸 책의 숫자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읽은 양이 대략 천 권에 가깝다는 것만 짐작될 뿐.


밤새 벼락이 당산을 후려쳐 마을을 격동의 소용돌이로 몰아가듯이 내 삶도 흔들린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수시로 일어나고, 이는 일상에서 상실이란 이름으로 나로부터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아간다. 사랑하는 이들과 그로 인한 기억마저도. 더 늦기 전에 하나씩 기록하는 일만이 오래도록 그들과 보낸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여긴다. 비로소 오롯이 내 온몸으로 벼락을 품는다.


보이지 않는 내일의 불안과 발등에 떨어진 오늘의 근심,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 어제의 후회를 등에 업고 시간은 잠시도 쉬지 않고 흐른다. 콕 집어서 ‘이것 때문이다’라는 누군가의 설명이 있으면 좋으련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쩌면 이 모든 문제와 해답은 내 안에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된 기록의 날들. 희미해져 가는 기억의 조각들을 붙잡기 위해 무언가 써야겠다는 마음을 품은 것. 당산은 비록 쓰러졌지만, 그로 인해 파생된 훗날의 시간은 흔적이 되어 쌓여 있다. 밤새 벼락이 당산을 후려쳤듯 글의 씨앗이 머릿속에서 하나둘 싹튼다. 작가로서 벼락이 그 처음을 알린다.


기억을 걷는 시간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때론 눈물을 불러온다. 어릴 적 기억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글쓰기라는 주제로 <나를 쓰다>란 책으로 출간하고, 홀로 미소 짓고 눈물 흘리던 시간은 브런치북 <시선으로의 초대>로 발행했다.


어릴 적 고향에서는 경조사가 있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 일처럼 챙겨서 보듬고 했는데, 차 사고로 이웃 간에 관계가 어그러지는 것을 보고 매사에 조심해야 함을 배운다. 사소함이 큰 것을 앗아간다는 교훈을 낳는다. 내기에 불과하지만, 언성이 높아지다 보면 과도한 경쟁의식이 발동되어 큰 싸움으로 번지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을 구석으로 몰아가던 일은 나를 더 단단한 어른으로 성장하게 한다. 비록 냄새나는 돈으로 없는 이들을 구박하며 외지로 몰아내지만, 그들의 세상이라고 매일 마음 편하겠는가? 쇠똥 냄새로 외면받는 고향을 만든 그들도 시간이 지나면 반성할 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시간의 흔적 앞에 누구도 그 비판을 비껴갈 재주는 없다. 생명이 고갈된 고향의 시냇물은 썩어 문드러지지만, 그들의 진정한 반성을 토대로 회생할 테니 머지않아 떠나간 생명도 다시 그 냇가로 모여들리라.


브런치는 시간을 담는 공간이다. 


벼락이 후려친 당산의 후예는 훗날 작가가 되고, 잃어버린 지난 30년을 되찾기 위해 계속 쓸 것이다. 하루씩 담고 담아 또 다른 30년의 그릇을 채웠을 때 비로소 밤새 벼락이 당산을 후려친 의미를 알게 되리라.



Written By The 한결.

2020.05.09 대한민국 대구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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