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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한결 May 15. 2020

산은 홀로 타지 않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산은 홀로 타지 않는다.

나는 화마(火麻)를 낳고, 녀석이 쓸고 간 자리는 처참하다. 작은 호기심으로 인해 반나절 만에 산 하나가 모조리 타 버린다. 영하의 날씨지만, 정확히 어느 정도의 추위인지 떠오르지 않는다. 젖어 있던 옷 소매가 오줌 누는 찰나에 얼어버렸다는 흐릿한 기억뿐. 추워서 너무 추워서. 일이 그렇게 되려고 그랬나 보다.


작은형과 나, 서너 명의 동네 형들. 다 합해서 대략 여섯 남짓. 점심 이후부터 해가 산을 타고 넘는 오후 한나절까지 얼음판이 깨지도록 썰매를 타고 논다. 정신없이 놀다 보면 옷과 신발이 젖고, 저수지 언저리에 피워둔 모닥불에 잠깐씩 손을 쬐면 금방 마르곤 한다. 모닥불을 한참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멍해진다. 나를 잃어버리고 그 안에 다른 누군가가 자리하는 순간, 사고는 벼락같이 찾아 든다.


모닥불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이런 원대한 생각이라면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나는 대책 없는 일을 왜 했을까? 저수지 둑은 가파른 경사를 뽐내면서 많은 억새를 품고 있지만, 나에게 다가오라는 어떠한 유혹도 하지 않는다. 억새는 하얀 보풀라기를 한껏 날리며 솜 뭉치 같은 모자를 쓰고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저 혼자 따뜻해 보이는 억새. 나는 그 품으로 뛰어들고 싶다. 불씨 한 줌을 둑으로 옮겨놓는 순간, 불어온 바람을 등에 업고 불길은 산을 향해 달린다. 서투른 몸짓으로 저 멀리 달아나는, 밑도 끝도 없이 번져나가는 불길의 모가지를 비틀기는 역부족이다. 누군가 자신의 썰매만 챙겨 달아난다. 이를 시작으로 모두 다 자신의 얼음 썰매를 챙겨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도망친다.


마을이 제대로 뒤집어진다. 이장의 다급한 목소리를 실은 재난 방송이 마을 사람들을 재촉한다. 쇠스랑이, 삽, 곡괭이를 들고 집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너나 할 것 없이 불이 난 산으로 향한다. 잠시 후 소방 헬기가 날아들고, 경고음을 울리는 소방차가 나타나며, 어디 출신인지 모를 공무원들이 대거 산으로 향한다. 다행히 불길은 반나절 만에 발목을 잡혀 맥없이 쓰러진다.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하는 법. 마을 주민들은 숨어 있던 작은 불씨마저 샅샅이 밟아버린다.


일은 그때부터 시작. 산에서 내려온 주민들이 마을 회관에 모여 원인 추궁에 들어간다. 모닥불을 시작으로 산에 불이 붙은 거로 봐서 제법 큰 녀석의 소행이라는 누군가의 말은 틀림이 없다. 불씨를 옮긴 당사자는 이제 겨우 예닐곱 살의 소년이지만 모닥불을 제공한 이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제법 큰 동네 형이니까. 범인이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


모든 것이 너로 인함이다.


이불 뒤집어쓰고 벌벌 떨고 있기보단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다. 이럴 바에는 나가서 몰매라도 맞아야 시원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 어렵지만 순순히 자수한다. 작은형은 잘못이 없으니 혼내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부모님은 그런 나를 지켜보시면서 가만히 안아주신다. 떨리는 어깨 너머로 눈물을 삼키며.


두려움이 컸던 것에 비해 뜻밖의 행복한 마무리. 산 주인은 덕망이 높으신 마을 어르신이고, 너그럽게 용서를 해주신다. 아이가 한 행동에 부모까지 힘겨워할 이유가 없다면서. 아이를 키우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라고. 그러면서 남겨주신 따뜻한 말씀. 아이는 그렇게 크는 거라며. 다만 앞으로 조심해야 하고 누군가 다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행동에 주의하라는 말씀. 금하는 행동은 하지 말라는 교훈. 이후 부모님께서는 이 집안 경조사엔 빠짐없이 참석해서 가족 일처럼 챙기셨으니,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그리하셨으리라.


고마움을 간직하고 자라난 소년은 나만의 방식으로 그 마음을 알린다. 어르신의 사랑으로 자칫하면 큰 벌을 감내해야 했을 한 생명이 구원을 얻었으니. 이는 소년만의 일은 아닐 터. 소년을 비롯한 한 가족의 운명이 통째로 바뀔 수 있는 중차대한 일. 산은 타 버렸지만, 소년은 계속 자라날 것이고 그만큼 산도 회복될 것이다. 그렇기에 한 생명의 미래까지 태워버릴 수 없다는 어르신의 결심. 참 어른의 본보기다.


해마다 5월에 가까워지면 전국의 큰 산에서 불이 난다. 소중한 우리네 자산이 불에 타는 모습을 보면, 내가 한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깨닫는다. 그러면서 한없이 따스했던 어르신의 눈길을 떠올린다. 한 인간의 운명을 쥐고 흔들 수 있는 패를 가졌지만, 함부로 휘두르지 않으신 그 고귀한 모습과 함께.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나는 아직도 어르신을, 산은 홀로 타지 않음을 또렷이 기억한다. 내 가슴엔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길이 살아서 이글거린다. 큰불로 작은 불을 다스리는 법. 사람을 대하는 마음에 화가 일어날 때면 언제나 그때를 상기한다. 차분하게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음은 산이 남겨준 선물이며, 홀로 타지 않은 이유다. 한 인간의 인생에 큰 획을 남긴 산불과 어르신의 가르침. 산은 나로 인해 태워져 이젠 더 울창한 숲이 되었듯이 모든 일에는 가르침이 있다. 고백의 시작은 두려우나, 시간 앞에 솔직한 삶을 산다면 훗날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잠들지 않겠는가?



Written By The 한결.

2020.05.15 대한민국 대구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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