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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한결 Apr 03. 2021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

누군가는 남아 고향을 지킨다

누군가는 남아 고향을 지킨다.


추석이 다가오면 부모님 산소를 벌초하기 위해 고향으로 향한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고향을 떠난 지 어언 25년이 다 되어가지만, 매번 방문할 때마다 가슴 언저리가 시리고 아프다. 2021년 현재 기준으로, 만약 살아계셨다면 지금쯤 85세가 되셨을 아버지와 78세가 되셨을 어머니인데, 너무 이른 때에 이생을 마감하신 게 여전히 가슴 아프다. 맑고 밝은 날 하늘을 올려다보면 괜스레 눈물이 괴는데 가끔은 흐르도록 둔다. 잠시나마 흐르는 눈물 속으로 두 분의 모습이 언뜻 비치는 듯한 착각을 느끼기 때문이다.


벌초는 대략 4시간 남짓 걸리는데 오후에 시작해 저녁 전에 끝낸다. 간단하게 먹거리를 챙겨오지만 아무래도 고향 마을에서 한 끼 해결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자주 가는 곳은 고향을 지키고 있는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친구는 대구 비슬산 <용연사>라는 절이 있는 시골 마을에 멋지게 흐드러진 정자나무 아래서 식당을 운영한다. 매운탕, 백숙, 산나물비빔밥이 주된 메뉴인데 매번 갈 때마다 매운탕을 시켜 먹는다. 맛도 맛이거니와 넉넉한 친구의 인심에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식사를 마치고 정자나무 아래서 쉬고 있으면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친구는 고향에서 살아가는 일이 즐겁고 보람을 느낀다니 한편으로는 부러운 마음도 든다. 그래, 누군가는 남아 고향을 지켜야 타지에서 고생하는 친구들이 돌아올 곳이 될 테다.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


중국 송나라 시대 도가의 대표적 사상가인 장자에게 어느 날 한 선비가 찾아와 장자의 이론적인 가르침이 아무 쓸모가 없음을 비판한다. 이론과 사상이야 좋지만, 현실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못난 나무와 같으며 크고 울퉁불퉁하여 목수들이 쳐다보지도 않는단다. 이에 맞서 장자는 햇빛이 쨍쨍한 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비바람과 눈보라가 치는 날은 훌륭한 울타리가 되며, 크고 울퉁불퉁한 나무가 산을 푸르고 울창하게 만들어 산사태까지 막아주니 얼마나 많은 쓰임이 있는지를 되묻는다. 선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물러난다.


돌 하나도 물가에 놓이면 작은 물고기들의 삶의 터전이 된다. 발길에 차인다고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당장 쓸모가 없다 하여 나중에까지 쓰임이 없는 게 아니다.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면,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키듯 자신의 쓰임을 알아주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아직 그런 기회나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때가 이름을 알고 조금 더 기다리는 지혜를 가졌으면 한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할 테니까. 나는 어떤 존재라도 때가 되면 반드시 쓰임새가 생길 거라 믿는다.


친구의 그늘이 되는 일이다.


부모님의 가업을 물려받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신의 적성에 맞아야 하고, 자신의 현재가 곧 미래의 모습을 대변할지도 모르니 성장 가능성 면에서 한정적일 수 있다. 그런데도 큰 결심을 하고 일을 시작했을 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어찌 작았으랴. 처음 몇 해는 고향을 지키는 일이 심적으로 불안했다는 친구. 결혼할 나이가 되어가는데 도시로 나간 친구들이 서서히 반려자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없이 부러웠단다. 그러다 지인의 소개로 평생지기를 만나 결혼하면서 비로소 안정된 가정을 꾸렸는데, 지금은 두 딸의 재롱을 보는 재미에 일이 힘든 것도 모른단다. 비록 몸에서는 음식 냄새가 떠나질 않지만, 세월의 더께에 장사치의 노련미를 더해 이젠 완연한 가장의 향기를 풍긴다.


자신이 고향에 남아 있으면 언제든 친구가 찾아와 쉴 공간이 될 테고, 그렇게 함으로 서로 즐겁다면 세월이 흘러감도 무상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친구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누군가 찾아와 쉴 공간이 되고 그늘이 되어주는 일은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장자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한다. 정자나무 아래서 친구와 나눈 대화 속에서 어떤 존재라도 삶에 있어서 하찮지 않다는 교훈은 단순히 교과서에서 배우는 지혜와는 다르다. 이론적인 지식도 경험의 옷을 입으면 무섭도록 강력한 삶의 지침이 된다. 우리가 언제 이토록 깊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으며, 이런 이야기조차 자연스럽다는 듯이 나누는 연륜이 되었는지 시간이 마냥 흐르기만 했던 것은 아닌가 보다. 친구도 나도 한층 더 자란 것 같아 흐뭇하다.


부모님의 쉼터가 된다.


돌아가신 분의 기일은 음력으로 지낸다. 산 자의 기운이 태양이라면 고인의 흐름은 달일 테니까. 달의 기운을 받고 매년 방문하실 거라 믿기에 소박하게 음식을 장만하고 기일을 맞는다. 처음 몇 해는 아내의 고마움이 컸기에 감사한 마음이 앞섰는데, 언제부턴가 부모님을 향한 애절함에 휩싸인다. 착하고 예쁜 아내를 부모님께 선보이지 못한 아쉬움도 크고 함께한 시간이 없기에 추억이라 부를만한 장면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휴대전화기가 흔했다면 사진이나 영상을 많이 남겨뒀을 텐데 그러지 못했음이 두고두고 아쉽다. 


아내와 내가 마련한 기일 음식 앞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한 상 차려놓고 몇 번의 절을 거듭하면 기어이 눈물이 흐른다. 못다 한 효도가 하늘에 닿을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흐느끼는 어깨를 아내가 감싸 안을 때쯤 기일은 서서히 지나간다. 올해도 그렇게 감사한 날이 쌓여 무탈하게 한 해를 넘겼으면 한다. 나의 산이었던 부모님께 난 여전히 못난 나무다. 넉넉하진 않지만, 내 삶 속에서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부모님이 다녀갈 산이 되고, 누군가는 남아 고향을 지키듯 나도 부모님의 쉼터로 자리하기로 한다. 아늑한 그늘이 되어 드린다.



Written By The 한결

2021.04.03 대한민국 남해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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