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의 나라"
나는 2000년도에 삼성전자 반도체총괄 기획팀에 대리로 입사를 했다.
이 때는 막 IMF를 극복하고 경제가 활력을 되찾고 특히 반도체 가격 상승으로
삼성전자의 실적이 호조를 기록할 때였다.
나는 경력사원 공개채용 신문광고를 보고 지원하여 서류전형, 면접시험을 거쳐
삼성전자의 반도체총괄 기획팀(경기도 용인시 기흥 소재)에 입사를 하였다.
그 이전에는 동아건설 자금팀에 근무를 하였는데 IMF로 인해 동아건설이
부도가 나서 2년간을 쉬고 있었다.
1999년도는 전혀 취업이 안 되고 2000년부터 여러 회사에 면접보고 취업이 되기도 했는데
삼성전자에 취업이 결정된 후 바로 삼성전자를 선택했다.
가족들도 매우 기뻐했고 홈런을 쳤다고 좋아해주었다.
나는 삼성전자에 입사를 하고 2개월간은 서울에서 통근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다가
불편하여 수원으로 이사를 하였다.
(삼성그룹 경력사원입문 교육중, 용인시 삼성그룹연수원에서)
수원으로 이사하니까 여러모로 행복했다.
공원도 주위에 많았고 사람들이 잔디에 들어가서 놀고 배드민턴도 치고
마음껏 어린이들도 뛰노는 것을 보고 놀랐다.
서울에서는 잔디밭에는 출입을 금지하면서 잔디를 밟지 마라고 하는데,,.
여러모로 삶의 질이 서울보다는 좋았다.
왜 사람들이 서울에 살까?
지금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 이후로 계속 수원에 살고 있는데 서울보다는 경기도가 살기가 좋은 거 같다.
공원도 많고 차도 적어서 대충 아무 데나 주차할 곳도 훨씬 많다.
그렇게 나의 삼성전자 시절은 희망차게 시작이 되었다.
나는 반도체 사업부 기획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삼성전자에서 제일 잘 나가던 사업부이고
우리나라 수출 제1품목이 반도체였기 때문에
나도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다. 어디를 가든지 자부심이 가득했다.
“누가 우리나라를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이야기했는가?
우리나라는 조용한 반도체의 나라야”라고 혼자서 생각하며
부푼 마음 가득히 품고서 잠을 자곤 하였다.
나는 전(동아건설) 직장에서는 자금팀에서 돈을 빌려오는 일을 담당했다.
신입사원 교육 후 부서 배치를 받으면서 인사팀에서 자금팀에 배치가 되었다고 해서
인사담당자에게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물어보니
회사 밖에 나가서 돈 빌려오는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굉장히 당황했다.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남에게 돈을 빌려 본 적도 없고,
그런 말을 잘 못 하는데(친구끼리 만원씩 빌리는 것 제외하고),
이 일을 내가 잘 감당할지가 걱정이 많이 되었다.
그런데 일을 해보니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돈을 빌리는 대상이 내가 아니고 동아건설이라는 법인이고,
당시는 회사의 신용이 좋아서 금융회사들이 서로 돈을 빌려가라고 했다.
그들은 나에게 술도 사주고 밥도 사며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들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당시는 예금금리가 15% 정도 하였다.
저축률도 지금보다 높았으니 은행으로 유입되는 돈이 많았다.
은행 창고에 돈이 쌓여 있는데 이 돈을 빨리 대출을 하여
15% 이상으로 이자를 받아야지 이익이 나는 것이었다.
만약에 대출로 돈을 풀지 못하고 은행에 돈을 쌓아 둔다면
은행은 연간 15%의 손실을 보게 된다.
대출희망자는 많았지만 신용이 없는 상대방에게는 해 줄 수가 없고
신용이 있는 상대방에게 빨리 대출해서 밀어내기를 해야지 되는 것이었다.
이때 발생하는 대출금리와 예금금리의 차이를 전문용어로 "예대마진"이라고 한다.
이것이 은행의 주 수입원이다.
여하튼 이러한 분위기를 파악하고 나니,
근심 걱정이 떠나고 갑자기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며,
일이 재미있어졌다. 내가 할 일은 여러 금융회사의 조건 중에서 비교하여서
회사에게 유리한 조건을 선택하여 차입을 하면 되는 것이 되었다.
물론 나에게도 잘 해야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특히 내가 싫어하는 유형은 담당 실무자인
나를 건너뛰고 바로 상사(부장)하고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은 거래를 축소하든지 서서히 끊어 버렸다.
나를 중시하고 나와 함께 손발을 맞추어서 일하는 금융회사위주로 거래를 하였다.
그렇게 해서 돈을 빌리다 보니 내가 빌려서 관리하는 돈이 5천억 원이 되었다.
동아건설은 차입금이 약 1조 5천억 원이었다.
5천억 원은 은행에서 빌린 차입금, 5천억 원은 회사채,
5천억 원은 CP(기업어음)라고 불리는 단기차입금인데
처음에는 CP(기업어음)을 담당하였고 나중에는 회사채를 담당했다.
주로 증권회사, 은행, 종합금융사, 증권감독원 등을 돌아다니면서
돈을 빌리는 일인데 내 대학 전공(경영학)과도 맞았고
거래처인 금융회사에 대학동창들이 많아서 일을 수월하게 하게 되어 적성에도 맞고 보람이 있었다.
CP(기업어음)를 발행하여 단기자금조달업무를 맡았을 때에는
내 주머니 속에는 최소 100억 원, 최대 1,000억 원짜리 자기 앞 수표가 항상 있었다.
이 100억짜리 수표는 나에게 돈이라는 느낌을 전혀 주지 못했다.
그냥 분실하면 아주 골치 아파지는 물건이다라는 느낌뿐이었다.
동료 중 한 사람이 분실해서 회사에서 징계를 받고 신문에 분실신고하고
법원에 출두하여 판결을 받는 등 수습하느라고 고생하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판결문을 은행에 제출해야 수표금액을 지급한다).
자금팀 업무는 돈을 취급하는 업무이므로 항상 긴장해야 만 했다.
동아건설이 IMF 때 부도가 나지 않았다면 나도 아마 계속 근무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