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가 궁금하다.
후광효과란 어떤 대상의 한 가지 혹은 일부에 대한 평가가
그의 또 다른 일부 또는 나머지 전부에 대해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이를 최소한의 정보로 빠른 결정을 하기 위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후광효과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선천적 후광효과와 후천적 후광효과.
선천적 후광효과는 주로 나의 집안 배경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어느 위치에 있는가,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가지고 있는가가 그것이다.
이것은 때로 본인에게 심적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너의 어머니 아버지는 의사신데 왜 너는 공부를 못하니?”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너는 왜 튀려고 하니?”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대사들이 아닌가.
후천적 후광효과는 내가 이룬 무엇인가로 인한 효과이다.
내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직장에 다니는지, 얼마를 버는지.
이렇게 내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어느 집 자식 누구. 명문대를 나온 누구. 대기업에 다니는 누구. 연봉 얼마의 누구.
어쩌면 우리는 이런 수식어를 위해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남보다 조금 더 좋은 수식어를 갖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느새 본질을 잊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원래 문법에서 수식어는 빠져도 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어가 아니라 수식어만 남기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무슨 일을 하는 누구입니다.
연봉은 얼마고요, 차는 뭐고요. 어느 대학을 나왔고요. 부모님은 뭐하십니다.”
여기서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돈이, 학벌이, 부모가 나의 본질이 될 수 있는가.
“안녕하세요. 누구입니다. 저는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저의 장점은 무엇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된 ‘나’에 대한 소개이다.
나라는 본질을 설명할 수 있는 것.
왜 우리는 수식어에 집착하는 걸까.
나는 변명 같지만 환경 탓을 해볼까 한다.
다른 나라들보다도 유난히 사람을 판단하는 데 후광효과가 크게 작용하는
한국의 환경이 만들어 낸 현상이 아닐까?
특히 요즘 청년들에게 더욱 가혹한 것 같다.
예전에는 후천적 후광효과가 컸던 반면,
요즘은 선천적 후광효과가 없으면 후천적 후광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내 노력만으로 가질 수 있는 수식어에 한계가 생긴 것이다.
선천적 후광효과는 타고나야 하는 것이니 포기하더라도,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후천적 후광효과라도 얻으려고 하지만 그마저 쉽지 않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요즘 청년들에게 ‘스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런데 기업에서 요구하는 스펙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 청년들을 덮친다.
조금 더, 조금 더.
이렇게 꿈을 찾아야 할 청년들은 더이상 나의 진짜 모습을 찾는데 시간을 쏟지 않는다.
다만 사회가 원하는 조건을 맞추기 위해 잠시 나를 내려놓는다.
때로는 그런 내 모습이 가엾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우리는 아직 가진 수식어가 없으니까.
하나라도 번듯한 수식어를 갖기 위해선 신세 한탄도 사치다.
- 나는 같이 있으면 웃게 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