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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화원 Nov 18. 2019

석류


 어느 날 ‘예비 살인마’라고 매도된 적 있다. 1학년 7반 순수한 우리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태어나기만 했는데 낙인찍혔다. 못된 말을 한 사람은 내가 다녔던 여자 고등학교의 보건 교사였다. 중학교 3년 내내 자연스럽게 바지를 입고 다니던 친구는 그냥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어쩐지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여자라는 수식을 달고 있었다. 보건 교사는 소리를 꽉꽉 지르던 사람이었고, 애들은 아파도 다쳐도 보건실에 가지 않았다. 가면 도리어 마음까지 아팠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보건실이 아니라 교실에서 자주 만났다. 일주일에 한 번, 그에게 성교육을 받았다. 나라에서 시킨 교육이었다. 오래되고 낡은 영상을 보는 게 다였는데, 답게 진부하고 편파적이고 고루했다.


 성폭행 방지 영상을 보던 게 기억난다. 우리는 모두 스마트폰을 쓰고 있었는데 영상 속 여자가 사용하는 휴대폰은 폴더폰이었다. 심지어 안테나가 솟아있는 민망한 휴대폰이었다. 여자에게 민망한 휴대폰을 사준 건 남자였다. 그리고 강간하려 들었다. 그 순간 화면이 회색으로 변하더니 ‘성폭행 방지 지침 셋, 너무 비싼 선물은 받지 않는다.’ 따위가 나왔다. 쓰면서도 거짓말 같지만 진짜다. 그러곤 국가기관 마크가 나왔다. 숨이 턱 막히고 약간 어지러웠는데 우리는 뭐가 잘못됐는지 명확하게 말할 수 없었다. 옆 학교 바지들도 이런 걸 보는지 궁금했다. 보건 교사는 그런 영상을 틀어주면서 조용히 잘 보고 있는지 확인만 잠깐씩 하러 왔다.


 다른 날에 보건 교사는 1984년에 나온 잭드위엔의 다큐멘터리를 틀어줬다. 제목은 The silent scream. 그는 잘 보고 있으라며 소리를 지르고 교실을 나갔다. 그 다큐멘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봐와서 뻔했다. 뻔해도 변치 않게 폭력적이었다. 기구를 피해 도망 다니는 태아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 우리는 보기 싫어서 살짝 떠들었다. 떠들다가 들켰다. 보건 교사가 말했다.

 “너희는 모두 예비 살인마야!”

 그리고 우리를 의자 밑으로 꿇어 앉혔다. 나는 마음이 뻐근해서 꿇어앉지 않았다. 보건 교사는  화를 내면서 반장이라는 애가 조용히 시키지는 못할망정 이제 대놓고 선생을 무시하냐고 소리 질렀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떠든  잘못했지만 우리는 예비 살인마가 아니라고 했다가 수업 시간이 끝나고 보건실로 불려가 혼났다. 그것 말고도 포궁을 가졌단 이유만으로 상처받는 일과, 어지러운 일과 번거로운 일이 많았으므로 나는 딱히  장기에 애정을 갖지 않았다.


 내 포궁에 신경을 나보다 많이 쓰는 건 미경이 동생 미영이다. 사실 내 모든 건강을 자주 걱정하는데, 내가 앞으로 혼자 살 날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가족이기 때문인 것 같다. 아니면 자기 언니 미희, 미경이가 크게 아픈 걸 가장 가까이에서 봤기 때문에 무서워서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괜히 자기 갱년기 얘기를 하면서 젊었을 때 관리를 잘 해야 한다고 석류즙을 한 아름 보내왔다. 아침에 한 팩씩 꼭 챙겨 마시라면서. 괜한 객기로 안 마시다가 그게 설탕도 하나도 안 들어가고 얼마나 비싼 건 줄 아냐는 타박에 아무 시간에나 하나씩 마시기 시작했다. 먹다 보니 맛있는 게 문제였다. 달콤하고 빨간 그것이 생기있게 내 몸에 들어차는 느낌이 좋았다. 뽀득뽀득하고 팽팽한 알 하나하나가 버틸 수 없는 힘에 눌려 만들어 낸 최선과 최선이 부딪히는 맛. 그런 맛이 났다. 네 팩을 내리 까먹고 그날 밤에 속이 쓰려서 잠도 못 잤다.


 아홉 살이었다. 그날도 석류 때문에 잠 못 이뤘다. 흐린 기억이지만 석류가 한 과에 오천 원이 넘었었다. 미경이는 새콤하고 달콤한 것이라면 환장을 하는 딸을 위해 시장에서 석류 두 과를 사 왔다. 나는 석류 두 개를 까먹는 데에 하루를 다 썼다. 석류를 먹다가 저녁밥을 먹고 다시 석류를 먹고 씻고 잠자리에 드는 동안은 아프지 않았는데 바깥이 어스름할 때 너무 아파서 깼다. 위치만 대충 아는 곳이 찢어지는 느낌이었고 위로 올리고 싶은지 아래로 내리고 싶은지 잘 몰랐다. 속에서 불이 난 것 같았다. 이게 어떻게 아픈 건지 전혀 모르겠어서 더 아팠다. 옆에 누워있는 미경이를 깨웠다.

 “엄마, 엄마. 배가 너무 아파. 매실, 매실!”

 

 잠귀가 어두운 미경이는 깨지 않다가 내가 우니까 깼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어서 횡설수설하게 설명했다. 일단 배가 아프다면서 우니까 미경이도 헐레벌떡 매실액을 꺼내러 냉장고로 갔다. 잠시 냉장고 안을 살펴보다가 석류 두 개를 다 먹었냐고 했다. 울면서 그렇다고 하니까 미경이가 자기 이마를 짚었다. 자기가 꼭지를 열어준 석류 하나를 어떻게 저렇게 오랫동안 먹는지 좀 이상하긴 했다고 했다. 자기가 안 보는 사이 탐스러운 과일 하나를 쏙 빼먹은 식탐이 와글와글한 딸을 미묘한 표정으로 봤다. 우니까 안쓰럽긴 할 텐데 분명 골때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미경이랑 웃을 때랑 울 때 똑같이 생겨서 다 안다.

 “채원아 이건 매실 먹으면 안 돼. 이렇게 배 아픈 건 신 걸 많이 먹어서 그래. 매실 먹으면 더 아플 거야. 이런 식으로 아플 때는 속이 쓰리다고 말하면 돼. 이럴 때마다 엄마한테 속이 쓰리다고 하면 되는 거야 알겠지?”

 

 미경이는 손바닥으로 내 위가 있을 부분을 살짝 짚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울음을 그쳤는데 미경이는 우유를 데워줬다. 그리고 전보다 더 가깝게 누워서 내 등을 쓸어줬다. 나는 그날 새벽에 알았다.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어서 가늠도 할 수 없고 스스로 이름도 붙일 수 없는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앞으로 새롭게 아플 날이 많다는 것을.


2019.08.18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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