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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화원 Nov 28. 2019

제주도(上)


 마음이 너무도 가난해 영화관에서 영화만 보면 울었다.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항상 울었다. 가진 것은 없었지만 떠날 것은 많았던 때다. 영화를 보느라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하는 시간 동안 떠날 것들이 떠날까 봐 불안해서 그냥 울기만 했다.


 처음 보는 남자랑 영화를 보는데도 어김없이 울었다. 걔랑은 소개팅으로 만나서 라라랜드를 같이 봤다. 주인공인 미아가 ‘The fools who dream’을 부를 때부터 울었는데 걔는 나를 힐끗힐끗 보다가 티슈를 내밀었다. 팝콘을 사면서 챙겨온 뻣뻣한 재활용 티슈였다. 소개팅에 나와 라라랜드를 보면서 우는 애는 얼마나 별로일까 셈해보는데 걔가 “영화가 좋았죠?” 하면서 뭉근하게 손을 잡아 왔다. 얼굴을 마주한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계속 전화가 오고 계속 메시지가 왔다. 하지만 미래에 떠날 것을 가지기엔 너무도 가난한 나날이었다. 아직도 가끔 그를 생각하는 이유는 앞으로 내 눈물을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남았을까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번 6월에 비행기를 탔을 때는 울지 않았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보다 엄격한 단절이었지만, 마음 편하게 책이나 읽었다. 나와 연결된 이들에게 내가 먼저 떠나겠다고 선언한 덕이다. 나는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책 속의 데이비즈 실즈는 이렇게 썼다.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나는 그야말로 날아서 도망가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서는 자동차로 계속 도망쳤다. 운전은 우리 중에 유일하게 면허가 있는 청이 했다. 청은 베스트드라이버다. 청이 운전할 때는 노래를 크게 틀어도, 심지어 조수석에서 춤을 춰도 안전하다. 청이 운전하는 동안 면허가 없는 셋은 이 노래를 틀었다가 저 노래를 틀었다가 따라 부르다가 창밖을 보다가 창문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여행 일정을 되묻다가 바꿔보다가도 그냥 좋아서 웃고 도로주변이 너무 예쁜데 마침 고른 노래가 잘 어울리니까 노래와 스쳐 지나가는 풍경만이 담긴 동영상을 찍고 확인하고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리곤 했다. 동영상을 찍는 동안은 조용했는데 청이 우리가 동영상을 찍는지 모르고 자기가 말할 차롄가 싶어서 한 마디 하면 오빠 때문에 감성이 깨졌다면서 와하하 웃고 다시 찍을 테니 조용히 하라고 하면 넷 다 숨까지 훕, 참아버리고. 그렇게 시끄럽고 조용하게 무엇이든 뒤로한 채 달리고 있었다.


 6월의 제주도에는 어디든지 수국이 피어있다. 차가 매연을 뿌리고 다니는 아스팔트 도로 바로 옆에도 무성하게 피어있고, 바닷가에서도 꽃이 자랄 수 있나 염분 때문에 힘들지 않나 생각했지만, 해안에도 무성하게 피어있다. 몰랐는데 수국은 그런 식물이었다.

 “보라색 수국이랑 파란색 수국이랑 사실 다 똑같은 수국이다? 근데 땅에 따라서 다르게 피는 거야. 여기 땅은 산성인가 봐.”

 푸른 수국이 피어있는 도로를 지나면서 내가 말했다. 수국에 대해 아는 거라곤 이것밖에 없었다. 근데 혜와 제로, 청은 나더러 척척박사라고 했다.


 길가에 수국을 보다가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비 내리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 뒤에 앉은 제로는 손으로 나를 탁탁 쳐서 자신을 보게 한 뒤, 잠시만 기다려보라고만 하고 눈을 감았다. 뭐하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다가 갑자기 팍! 하고 팔을 뻗었다. 그리고 답했다.

 “내가 신호를 보냈어. 이제 맑아질 거야. 나는 햇빛의 요정이거든. 진짜야. 믿어봐.”

 제로가 진짜 햇빛의 요정은 아니겠지만, 섬 날씨는 원래 변덕스러우니 이런 일도 가능하다. 제로의 말대로 먹구름이 물러가는 바람에 청은 선글라스를 껴야 했다. 이후 제로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먹구름이 몰려올 때마다 부지런히 신호를 보냈다. 우리는 햇빛의 요정도 척척박사도 전혀 아니지만, 전혀 아니어도 상관없는 곳을 쌩쌩 달려서 유명한 당근 케이크를 먹으러 가고있었다.


 공항에서 숙소에 들릴 틈도 없이 달려온 카페는 관광지에 있는 카페답게 잘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기대에 차서 먹은 당근 케이크는 비싸기만 하고 맛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같이 마신 차가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그럼 여행에 실패한 건가? 비행기까지 타고 와서 비싼 돈 주고 먹은 당근 케이크가 퍽퍽하고 달콤하지도 않고 함께 마신 차가 그저 그렇지만 속상하지도 않고 심지어 하나도 아깝지 않은 건 나는 잠깐 앉아있다 왔던 곳으로 달아날 사람이니까 척척박사니 햇빛의 요정이니 실없는 농담이 흘러가 버리듯 나를 조금 놀리는 이 맛도 그냥 지나쳐 버릴 것이라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아무리 상처를 줘도 다시 볼 일 없을 테고 곱씹을 일 없을 테고 잊어버릴 테고 내가 먼저 떠나버릴 테고 그니까 내가 남겨질 일은 없다. 아 이런 게 여행이구나, 제대로 도망쳤다는 생각만 잠잠히 들고 대답할 힘을 아껴 부정적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사랑하는 이들과 그들 뒤의 생소한 배경을 가만히 살펴볼 뿐이었다.


2019.11.28.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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