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엔 협재 해수욕장으로 헤엄치러 갔다. 자동차 트렁크에 앉아서 바다를 볼 수 있도록 주차하고 혜를 제외한 우리는 수영복을 챙겨서 화장실로 갔다. 갈아입으면서 제로와 청이 어떤 모습일지 계속 생각했다. 잘 아는 사람의 수영복 차림은 기대된다. 평소보다 과감하기로 작정한 모습은 어딘가 용감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차려입고 쭈뼛거리는 모습은 학예회 무대에 올라간 일곱 살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수영복으로 갈아입을 때마다 배우를 기다리는 관객의 마음이 된다. 하지만 막상 수영복 차림이 되면 가장 쭈뼛거리는 건 나다.
쭈뼛쭈뼛 나가보니 혜와 청이 분주했다. 혜는 차 트렁크를 열고 그 안에 앉아 물통에 붓을 풀고 있었다. 청은 혜의 팔레트와 종이가 바다와 함께 모두 담기도록 카메라를 설치해주고 있었다.
언니 진짜 수영 안 해도 돼요?
응, 놀다 와. 난 수영하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게 좋아.
심심하면 꼭 손 흔드는 거예요. 그럼 수영하다가 나올게요.
혜와 약속하고 제로와 청과 나는 과감하고 쑥스러운 발걸음으로 바다로 들어갔다.
물이 배꼽까지 오는 곳에 닿자, 청이 챙겨 온 스노클과 마스크를 나눠줬다. 각자 요령껏 껴보기로 했다. 마스크 고무가 너무 빡빡해서 쓰기만 하는 데에도 힘이 들었다. 애써 스노클링 장비를 차고 마주 본 삼 인은 머리카락이 엉망이고 얼굴이 꾸깃꾸깃하고 난데없이 비장했다. 셋 다 입에 스노클을 낀 상태여서 ‘호호호’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입을 벌리는 대신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코에서 뜨거운 바람이 나와 마스크 안에 김이 서렸다. 서로를 보고 안 웃기까지 오래 걸려서 우리는 여러 번 마스크를 뺐다 껴야 했다.
가까운 곳에 구조요원이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그는 선글라스와 밀짚모자를 쓰고 팔짱 끼고 있었다. 사뭇 근엄해 보였다. 수영하는 모습은 안 봐도 고수가 틀림없었다. 나는 헤엄치다가 두 발로 설 때마다 풍경을 보는 척하며 곁눈질로 그를 봤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 있으면 심심하지 않을까. 아무 말 없이 햇빛 속에 서 있으려면 힘들지 않을까. 잠수가 하고 싶은데 참고 있진 않을까. 제일 궁금한 건 초라한 내 수영이 웃길까였다. 힐끗힐끗 훔쳐보는데 갑자기 그가 조끼 주머니에서 손가락 두 마디 만한 초코바를 꺼냈다. 그는 과자를 한입에 털어 넣고, 남은 쓰레기는 주머니에 넣었다. 혹시나 떨어뜨릴까 봐 지퍼까지 잠그는 모습을 보니 불쑥 말 걸 용기가 생겼다.
덥지 않으세요?
괜찮습니다.
한마디만 할 줄 알았는데 그는 생각보다 수다쟁이였다.
아직 6월이니까요. 7월, 8월에는 정말 힘들 때도 있습니다. 날씨도 더 더워지고요 사람도 더 많아지고... 이제 밀물 시간입니다. 슬슬 해변 쪽으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기 바위 있는 곳 보이시죠. 좀 기다리셨다가 물이 차면 저기에 가보세요. 여기는 그냥 흙바닥이라 물도 뿌옇고 별로 볼 게 없어요. 저기엔 고둥도 많고 떠밀려 간 작은 물고기도 몇 마리 있을 겁니다.
그는 힘들진 않지만 심심하긴 했나 보다. 그와 몇 마디 더 나누다가 인사하고 멀어졌다. 얕은 곳으로 가는 김에 혜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아저씨의 말을 듣다 보니 혜의 기분이 걱정됐다. 혜는 다행히 하나도 안 심심했다고 했다. 혜는 바다를 그리고 있었다.
차 트렁크 앞에 앉아 귤을 몇 개 까먹으면서 아저씨가 말한 곳에 물이 차는 걸 기다렸다. 햇볕이 우리를 꼭 안았다. 바위 봉우리들이 점점 물속으로 숨었다. 제로와 청이 햇볕 속에 잠드는 바람에 다시 돌아갈 땐 내가 혼자가 됐다.
바다에 서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혼자 손을 모으고 있으니 왠지 기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조용한 마음으로 들어간 바다는 고요했다. 나른해진 몸과 마음을 잔잔한 파도에 맡겼다. 바위 주변에는 아저씨가 말 한대로 고둥이 많았고 물고기도 있었다. 죽은 해파리도 있었다. 죽었지만 물결 때문에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평온한 광경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겁이 났다. 내가 해파리처럼 떠 있기만 해서 죽은 줄 알고 아까 그 아저씨가 구하러 오면 어쩌나. 멀쩡한데 구조요원에게 건져 올려지는 상황은 상상만 해도 민망해서 죽고 싶다. 민망한 생각이 몰려올 때마다 살아있는 걸 보여주기 위해 헤엄쳤다. 근데 삶은 숨 쉬는 것만으로는 삶일 수 없나. 구태여 살아있다고 말해야만 하나. 죽었지만 살아있는 것 같은 해파리는 죽은 것 같아도 살아있는 해파리일 수도 있지 않나. 사실은 해파리처럼 죽으나 사나 별 차이 없어서 죽어도 구하러 안 오면 어쩌나가 제일 걱정이었다. 살아있다고 부단히 헤엄쳤다. 헤엄치다가 어딘가 익숙한 강박을 깨닫곤 울고 싶어졌다. SNS를 좀 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숨이 가빠져 일어나 보니 해변에서 잠에서 깬 청과 제로, 혜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청은 두 손을 입 옆에 모아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고, 혜와 제로는 턱밑에 검지를 대고 있었다. 나머지 손은 나오라는 듯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까 꽤 멀리까지 간 내가 못 알아들을까 봐 몸으로 표현해봤다고 했다.
그들은 혼자 너무 깊은 데까지 들어가지 말고 핫도그나 먹으러 가자고 물 밖으로 나를 구원하고 있었다.
2019.12.07.土